진오비 산부인과

제목: #13. 내일이면 장님이 되는 사람처럼 [프린트]

글쓴이: 심상덕    시간: 2020-04-09 01:55
제목: #13. 내일이면 장님이 되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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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까마귀 나는 밀밭
작가: 빈센트 반 고흐
소장: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다. 머리가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하는 기준에는 기억력, 어휘력, 창의성, 공간 지각력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 여러 가지를 종합해서 아이큐 (지능 지수)를 측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요즘도 아이큐 검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초등학교 때든가 중학교 때든가 정기적으로 아이큐 검사를 했다. 우리나라의 전체 국민 아이큐 평균은 106이라고 한다. 천재들의 모임이라는 멘사는 아이큐 148 이상의 사람들만 가입이 가능하다고 한다. 나는 어릴 때 얼핏 들은 바로는 아이큐가 113인가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평범한 학생의 아이큐 수준이다. 그러나 나는 기억력은 평균 이하이고 공간 지각력은 0점에 가까워서 펼쳐진 종이를 접어 상자를 만드는 테스트는 너무 어려웠다. 공간 지각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상자 곽을 접는 일을 직업으로 갖지만 않으면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지하철에서 내려 엉뚱한 출구로 나오는 등 길을 못 찾아 헤매는 경험은 한두 번이라면 모르지만 매번 반복되면 짜증을 넘어 겁이 나기도 한다. 이건 집안 내력이라 어머니도 그렇고 나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막내딸은 학원에서 오다가 집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바람에 한밤중이나 돼서 집에 온 적도 여러 번이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학교 선생님들의 성함은 한 두 분 외에는  기억하는 분이 거의 없다. 그렇게 기억력을 포함하여 아이큐가 뛰어나게 좋지도 않은데  어떻게 의과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종종 있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내게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나은 것이 하나 있다면 집중력이라고 하는 능력이다. "나는 돌머리다.  돌에는 글을 새기기는 어렵지만 한번 새기면 안 지워진다."는 것이 학창 시절에 내가 위안을 삼은 지침이다.  그 점이 아마 지금의 내가 있도록 된 이유라면 이유라고 하겠다.

이런 집중력이 가장 크게 발휘된 시기는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그동안 잘하지 못하던 영어를 확실히 마스터하기 위해 고시생들이 들어가서 공부하는 경기도 수원의 어느 절에 들어가서 한 달간 공부를 한 적이 있다. 절의 이름도 산의 이름도 모르고 이성계 장군이 조선을 세우기 전 말을 씻은 정자라고 해서 세마대라는 이름의 정자가 산 정상에 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 당시도 고등학교 3학년이라면 영어 공부에 매진할 때가 아니라 종합적으로 전 과목을 한번 훑어보고 미진한 부분을 보강하는 기간일 것이다. 그럼에도 중간 정도 성적밖에 올리지 못하던 영어를 정복하겠다고 성문 종합 영어라는 참고서와 영어 사전 하나만 달랑 들고 절에 공부하러 들어갔으니 제정신인  학생은 아니었다. 그 한 달 동안 정말 열심히 영어만 공부했고 그 후 영어는 상위권 성적에 속할 정도로 잘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너무 늦게 정신을 차린 탓에 그해에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고 재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내가 한 것은 영어 참고서를 달달 외우는 것이었다. 문법이나 구문 등에 대하여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책을 몽땅 외우는 방식이다. 그때 영어 참고서는 영어로 된 책에서 일부의 문장을 가져와서 설명하는 방식이어서 외국 유명 작품의 문장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때 감명 깊게 읽었던 문장은 헬렌 켈러가 쓴 수필 중 하나였다. 20세기에 쓰인 수필 중 가장 명문장이라는 수필로 알려진 "Three days to see"라는 수필이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이라는 뜻이다. 그때는 영어로 외웠지만 지금은 다 잊어버렸고 번역문을 아래에 올려 본다.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에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 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보고 싶다. 이제껏 손끝으로 만져서만 알던 그녀의 얼굴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그 모습을 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 두겠다. 오후가 되면 밖으로 나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과 들꽃들, 그리고 석양에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다.

둘째 날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는 가슴 떨리는 기적을 보고 싶다. 그리고는 서둘러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을 찾아가서 그동안 손끝으로만 보던 조각품을 보면서 인간이 진화해 온 궤적을 눈으로 확인해 볼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겠다.

마지막 셋째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큰길에 나가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오페라하우스와 영화관에 가 공연들을 보고 싶다.  저녁이 되면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와 나를 이 사흘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다시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그녀의 글을 보면서 만일 그녀가 정말 3일 동안 눈을 떠서 볼 수 있게 된다면 그 3일의 일분일초는 그냥 흘려 보내기에는 정말 아까운 시간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읽고 나서 그녀가 눈을 떠서 만나는 시간과 내가 지금 보내는 시간이 다른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내게 주어진 한 달도 무엇보다 소중한 날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시를 앞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에게 여름 방학 한 달이 당락을 좌우할 정도로 소중한 시간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다시 오지 않는 소중한 날들이라는 생각에서 그랬다. 그래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절의 좁은 방에서 촛불로 불을 밝혀 가면서 원 없이 공부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마라톤 풀코스를 다 뛰고 났는데 힘이 남아 있는 것처럼 멍청한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고 밀도 높게 살았던 기간을 꼽으라면 그때를 꼽는다.  그 후 대학에 들어가고 일상적인 일들에 치여 살면서 그때의 절절함을  잊고 살았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흔한 것들, 혹은 당연한 것처럼 주어지는 것들의 소중함을 잘 모른 채 산다. 그러다가 대학병원에 산부인과 전공의 4년 차로 근무할 때 만났던 어느 산모가 그런 당연한 것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기억하게 해 주었다.

4년 차인 수석의로 산과 병동 근무를 하던  때였다. 어느 날 외래를 통하여 한 산모가 입원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대학병원은 교수님 특진으로 입원하는 산모들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경제적 형편이 어렵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교수님 특진이 아닌 일반 산모로 입원하는 산모들이 있었다. 그런 산모들은 수련 과정인 전공의들이 주치의와 수석의가 되어 분만도 돕고 제왕절개 수술도 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날 입원한 산모도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서 교수님 특진이 아닌 일반으로 입원한 경우로 알고 있다. 문제는 산모가 척추 후만증 즉 민간에서 흔히 쓰는 말로 꼽추라고 부르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척추 변형은 척추 측만증이라고 해서 옆으로 휘어져 있는 경우와   척추가 뒤로 휘어져 몸이 앞으로 굽은 척추 후만증이 있다. 선천적으로 생겨난 경우도 있고 후천적인 영양 결핍으로 생기기도 한다. 앞으로 심하게 굽은 척추 후만증은 가슴과 골반이 매우 좁다. 따라서 자연 분만은 거의 불가능하며 제왕절개 수술을 해서 출산을 해야 한다. 다만 척추 후만증이 심하면 폐와 심장도 제대로 발달을 못해서 심폐 기능도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제왕절개 수술을 감당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팀이 맡게 된 산모는 후만증이 매우 심하여 심폐 기능이 정상인의 20% 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임신으로 인해서나 아니면 제왕절개 수술로 인해서 합병증이 발생할 위험이 매우 높았다. 산모는 임신하기 전부터 내과 교수님으로부터 피임을 하도록 철저히 당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산모는 일부러 피임을 하지 않았고 임신을 했다.  임신과 출산으로 자신이 얼마나 위험에 처할지 알고 있으면서도 임신을 하게 된 이유를 물어보니  남편은 사고로 한쪽 팔이 없고 자신은 척추 이상으로 평생 한 맺힌 삶을 살았기 때문에 건강한 아이를 낳아서 그것을 보상받고 싶다고 했다. 그로 인해서 자신이 죽게 되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마음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수술이든 자연분만이든 산모의 건강한 출산을 책임져야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수술을 앞두고 마취과와 내과에 협진을 요청하였다. 답신은 전신 마취는 심폐 기능 저하로 할 수 없고 척추 마취는 마취 바늘이 들어갈 척추의 틈이 없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니 국소 마취 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소 마취로 할 수 있는 마취 범위는 피부 정도이고 근막이나 복막, 자궁은 국소 마취로 마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소 마취를 한다는 것은 거의 마취 없이 생으로 수술을 한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중세 시대라면 모르지만 지금 세상에 마취도 없이 하는  제왕절개 수술이라니..... 산모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 그런 수술을 진행해야 하는 우리도 황당했다. 결국 산모의 팔다리를 단단히 묶고 한계 용량에 가까운 많은 양의 국소 마취제를 사용하여 간신히 수술을 마쳤다. 그리고 건강한 남자 아기가 태어났다. 산모는 수술로부터 어느 정도 회복하는 듯했지만 수술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몸이라서 며칠이 지나면서부터 심부전증의 소견이 나타났다. 여러 치료에도 불구하고 결국 산모는 한 달 정도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심부전증이 나타나 생사의 고비를 넘나 들게 되었을 때 산모는 결국 예상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다만 건강하고 우렁차게 우는 아이와 함께 다만 며칠이라도 더 살아서 아기를 안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헬렌 켈러가 단 3일만이라도 눈을 떠서 하고 싶었던 일이 그 산모에게는 아기와 함께 보내는 일이었다. 여러 치료에 시달리느라 산모가 마음 놓고 자신의 아기를  안아 보고 행복에 겨워한 날은 며칠 되지 못했다.

그 산모가 아이를 출산하던 무렵 나에게는 4살과 2살의 두 아이가 있었다. 아내는 두 아이 모두 순산하였고 두 아이 모두 건강하게 태어났다.  나는 그것에 대하여 그렇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냥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당연하게 생각한 그 일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산모를 보면서 알았다. 그 산모는 당연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순간에 대하여 그 아이에 대하여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내의 순산과 건강한 아이들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소중한 순간이고 소중한 아이들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사실 나에게나 아내에게나 그 산모에게나 그 일은 소중한 일었는데도 말이다. 헬렌 켈러가 눈을 뜨게 된다면 보는 나뭇잎과 들꽃, 별과 영화는  장애가 없는 우리가 보는 것과 완전히 같은 것들이다. 다만 한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고 있었고 나처럼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산다.

척추 후만증과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어 임신과 출산 자체가 위험한 산모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산모들은 임신과 출산을 무사히 끝내고 건강한 아기를 얻는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그렇게 되기를 산모나 가족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인 나도 바란다. 그러나 당연히 얻어지는 결과라고 해서 소중하지 않은 것들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이 사실 쉽지 않다. 공기가 너무 흔하고 대가 없이 얻는 것이다 보니 소중함을 모른다. 공기는 잠시만 코를 막고 입을 막아 숨을 쉬지 않아도 너무도 괴로워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 특히 가족은 그것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새로운 한 가족이 출산을 통해서 올 때 느낀 그 감동과 소중함을 평생은 아니라도 때때도 잊지 않고 느끼면서 살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어제 출산한 산모의 출산 영상을 편집해서 USB에 담는다. 퇴원할 때 드리는 USB에는 불과 20여분 남짓밖에 안 되는 짧은 영상이 들어 있다. 그나마 전문가의 솜씨로 멋지게 촬영한 영상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는 그 순간에만 찍을 수 있는 모습과 노력이 담겨 있다. 잘 보관했다가  언제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가족이 짐이라고 느껴질 때  보기를 권한다. 출산 순간의 감동과 소중함을 소환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몇 년 동안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영어 참고서는 이사를 여러 번 다니면서 잃어버렸다. 촛농이 군데군데 묻은 채 추억이 서린 책이었지만 이제는 볼 길이 없다. 소중함의 의미, 치열하게 살았던 날들의 흔적을 더듬어 볼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게으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헬렌 켈러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하다. 물론 그녀는 볼 수도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었으니 그녀의 목소리는 들어 볼 수가 없지만 세월을 뛰어넘어 내게 말하는 듯하다.  "맹인인 나는 맹인이 아닌 당신에게 한 가지 힌트밖에 줄 수 없다. 내일이면 장님이 될 사람처럼 당신의 눈을 사용하라."

그때 내가 수술을 맡았던 그 산모는 교수님 특진 산모로 돌려서 교수님께서 직접 수술을 하시고 나는 옆에서 어시스트하려고 했었다. 일반으로 입원한 척추 후만증 산모를 수술하고 나서 정상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잘못될 경우 전공의가 수술한 것보다는 교수님의 책임으로 수술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도 있었고 나는 그런 산모를 수술해 본 경험이 없으니 경험이 많은 교수님께 넘겨 드리는 의미도 겸해서였다. 그때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내가 맡아서 하기는 곤란하고  하버드 의과 대학 병원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

나는 병원이 아닌 숭인동 달동네 작은 집에서 태어났으니 옆에 산부인과 의사도 없었고 당연히 출산 순간을 담은 영상도 없다. 대신  뜨거운 시절을 다시금 떠올려 볼 수 있는 도구로서  내가 찾아올 수 있으면 찾아오고 싶은 것이 위에 말한  "성문 종합 영어" 책이다. 책이 아니라면  비록 짧은 시기였지만 미술반 동아리 시절 처음으로 완성한 유화 작품을 찾아보고 싶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성적인 내가 큰 용기를 내서 미술반 동아리에 들어갔을 정도로 미술을 좋아해서 그림에 열중했던 시절도 내게는 그리운 시절이다. 그때 그렸던 작품은 함춘 미전에 전시하기 위해서 그렸던 바이올린 정물화였는데 전시회가 끝나고 따로 보관한 기억도 없이 잃어버렸다. 무척 못 그린 그림이지만 숙제로 그린 그림이 아니면서 내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려 완성한 최초의 그림이었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다시 한번 보고 싶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비록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붓을 손에 든 이후부터 죽기까지 그는 단 하루도 화가가 아닌 삶을 살지 않았다. 고흐는 비록 한 점 밖에 그림을 팔지 못하였음에도 평생 붓을 놓지 않았다. 동생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아서 그림을 그리느라 항상 생활에 쪼들렸다. 모델을 구할 돈이 없어 그가 그린 그림은 대부분 풍경화이고 자화상도 많이 그렸다. 물감을 아끼느라 그랬던 것인지 그의 자화상 중 일부는 바닥이 비쳐 보일 정도로 얇게 펴 바른 그림도 있다.  여기 실은 그림은 그가 생의 마지막에 그렸다고 하는 그림이다.  보통 사람들이 고흐나 헬렌 켈러처럼 자신의 삶에서 하루도 소홀함이 없이 살아 있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면서 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삶의 어느 한순간만큼은 정말 죽도록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는 경험 하나쯤은 가지고 살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쓴 술에 달콤한 안주처럼 고단한 인생에 뿌듯한 추억은 삶을 버티는 데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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