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오비 산부인과

제목: #22. 반려동물보다 반려자 [프린트]

글쓴이: 심상덕    시간: 2020-04-22 16:19
제목: #22. 반려동물보다 반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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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여인 1
작가: 윌렘 드 쿠닝
소장: 윌렘 드 쿠닝 재단

[그런데 딱 한 마리, 고양이를 본 척도 하지 않는 새하얗고 예쁜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 곁으로 다가가, " 난 백만 번이나 죽어봤다고! "라고 말했습니다.  하얀 고양이는 " 그러니. "라고만 대꾸할 뿐이었습니다. 고양이는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안 그렇겠어요, 자기 자신을 가장 좋아했으니까요.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 너 아직 한 번도 죽어 보지 못했지? " 하얀 고양이는 " 그래. "라고만 대꾸할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 앞에서 빙글 빙글 빙글, 공중돌기를 세 번 하고서 말했습니다. " 나, 서커스단에 있었던 적도 있다고. " 하얀 고양이는 "그래."라고만 대꾸할 뿐이었습니다.  " 난 백만 번이나......." 하고 말을 꺼냈다가 고양이는 "네 곁에 있어도 괜찮겠니? "라고 하얀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하얀 고양이는 " 으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 곁에 늘 붙어 있었습니다. 하얀 고양이는 귀여운 아기 고양이를 많이 많이 낳았습니다. 고양이는 이제 " 난 백만 번이나......."라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와 아기 고양이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할 정도였습니다. 마침내 아기 고양이들이 자라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 녀석들, 아주 훌륭한 도둑고양이가 되었군."이라고 고양이는 만족스럽게 말했습니다. "네에."라고 하얀 고양이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야옹야옹 부드럽게 울었습니다. 하얀 고양이는 조금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고양이는 한층 부드럽게 울었습니다. 야옹야옹 울었습니다.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와 함께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하얀 고양이는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또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고양이는 백만 번이나 울었습니다. 아침이 또 밤이 되고 , 어느 날 낮에 고양이는 울음을 그쳤습니다.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그러고는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노 요코가 쓰고 그린 "100만 번 산 고양이"라는 그림책의 내용 중 일부다. 누구나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을 더 이상 꾸미고 보탤 것 없이 완벽하게 해 낸 경험. 그래서 똑같은 것을 다시 반복하여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든 적이 있을 것이다. 100만 번 산 고양이가 아마 그랬을 것이다.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고 행복한 삶. 그런 인생을 산다는 것은 고양이에게든 인간에게든 쉽지 않다.  내가 전문 화가의 마음을 알기는 어렵지만  화가들도 더 이상 손을 댈 곳이 없는 완벽한 작품을 그렸다고 생각해서 붓을 놓는 작품을 남기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화가 윌렘 드 쿠닝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그리려고 해도 계속 그리다 보면 어느새 추한 인상으로 변해 버린다."라고 농담 삼아 고백했다. 물론 그는 실수로 그렇게 그린 것이 아니라 일부러 실제의 모양을 일그러뜨리고 숱하게 지우고 덧칠하는 과정을 통해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얼핏 보면 아니 자세히 봐도 마찬가지지만 그리다 만 것 같거나 아주 솜씨가 없는 화가가 그린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가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는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전시회에 출품하기 직전까지도 붓을 놓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여기 올린 작품 "여인 1"도 1950년에서 1952년까지 3년에 걸쳐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여인 시리즈의 작품은 아무리 봐도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솔직히 말하면 가슴과 샌들 비슷한 신발로 추측할 뿐 여인인지도 잘 모르겠다. 여인이든 아니든 그가 그림을 통해 추구한 것은 아름다움은 아닌 듯하다. 완벽함도 물론 아니다. 그는 그림을 위해 이렇게 힘든 수고를 기울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빼고 더할 것도 없이 완벽한 삶이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얼마 전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에서 반려 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천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반면 출산은 파업이라고 할 정도로 대폭 감소해서 부부 한 쌍이 평생 낳는 아기가 1명도 채 되지 않는다. 국내 굴지의 출산 전문 병원인 제일 병원이 직원 월급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다가 결국 폐원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거리에 사람은 여전히 넘쳐 나고 청년 실업률은 갈수록 높아진다는 기사를 보면 출산이 줄었다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을 듯싶다. 그러나 산부인과 병원, 산후 조리원, 분유 회사, 아기 용품점 등 출산과 관련한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그 여파를 절절히 느낀다.  반려 생물을 키우는 사람은 늘어나고 출산은 줄어드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전문적인 연구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고 나는 사회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그 둘이 무슨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반려 생물을 키우는 사람 중에 홀로 사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듣기는 했다. 출산을 하기에는 여건도 안되고 아기를 키우는데 따르는 부담이 있지만 반려 생물은 인간 아기를 키우는 것보다는 쉬운 것이 이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아기를 낳아서 키우는 것보다 반려 생물을 키우는 데 있어 장점을 내 나름대로 추측해 보았다.  

첫째. 상대가 없이도 혼자서도 구할 수 있다.  임신은 반드시 두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반려 생물을 얻는 것은 혼자서도 가능하다.
둘째. 여성의 입장에서 출산이라는 부담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반려 생물을 데리고 오면서 출산에 따르는 고통을 겪는 사람은 없다.
셋째. 키우는데 따르는 비용이 저렴하다. 반려 생물을 키우는데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지만 억 단위의 양육비와 학자금이 드는 것은 아니다.
넷째. 키우다 잘못되었을 경우 처벌이 약하며 심적 부담도 덜하다. 동물의 경우 학대죄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이지만 인간의 경우  아동 학대는 8년 이상의 징역이고 사망하면 그 처벌은 징역 15년까지 올라간다.  

물론 인간과 동물 혹은 식물을 동일하게 비교하는 자체가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인간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도 과거에 비하여 그 위상이 많이 올라갔다. 동물을 위한 병원은 생긴 지 이미 오래고 동물을 위한 호텔이나 학교도 있다고 들었다. 반려 동물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사람도 있다. 반려 동물이 죽거나 다치면 그 상실감 또한 적지 않고 장례도 가족 못지않게 치른다. 반려 동물을 통해 위안을 받는다면 잃었을 때의 상실감도 클 것이고 키우는데 드는 비용도 점점 올라갈 것이다. 앞으로 인공 지능과 로봇 공학이 더 발달하면 지금의 반려 생물의 자리를 로봇이 차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로봇의 경우 인간이나 동물과 흡사한 외형과 행동을 보여줄 수 있다면 죽는 것으로부터 오는 상실감을 겪지 않아도 되니 장점이 크다. 일본에서는 페퍼라는 로봇이 노인들의 대화 상대로 활용되는 사례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런 로봇을 통해서 자녀들이나 친구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유대감과 위로를 얻는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이성의 배우자가 유일한 반려자이던 시대에서 동성의 배우자도 반려자가 될 수 있도록 인식이 바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법적으로는 많은 나라들에서 아직 동성 결혼은 허용되지 않는다. 생물이 반려자가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나  로봇이 반려자의 하나로 여겨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아마 그것보다는 짧을 것이다.  로봇은 화를 내지 않는다. 인간을 해치지 않도록 미리 프로그램되어 나올 것이며 인공 지능까지 탑재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서 척척 들어줄 것이다. 일부러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까칠한 로봇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 가능성은 거의 없지 싶다. 오작동으로 주인을 다치게 하는 경우도 인간끼리 서로 다치게 하는 경우보다는 훨씬 적을 것이다. 내 마음대로 되는 로봇과 함께 사는 세상, 내가 눈치를 보거나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대상과 평생을 함께 사는 세상. 분명히 많이 편한 세상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편한 것이 과연 행복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세탁기와 청소기가  여성들이 주로 겪던 과중한 노동의 일부를 없애주었다. 대신 빨래를 하는 시간 동안 나들이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그 외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늘었다. 내 아내는 내 어머니보다 빨래에 들이는 시간이 훨씬 적다. 내 딸은 아마 직접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 것이다. 근로 현장에서도 귀찮은 노동을 대신해 줄 로봇이나 기계들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변할 것이다. 기계가 대신해주어서 남는 시간 동안 하는 일이 빨래를 하면서 또는 제품을 만들면서 얻는 몸의 건강, 마음의 정화 또는 경제적 이득보다 더 값진 것인지는 아닌지는 개개인에게 달렸다. 어쩌면 더 가치없이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총량보다는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잘 보냈는지가 중요하다. 반려자를 두거나 반려 생물을 두는 것은 그것으로 하여 내가 좀 더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다.

산부인과 의사인 내 입장에서는 아이를 낳지 않고 반려 생물을 키우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우선 첫째는 의사로서 밥벌이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간적 연민 때문이다. 어미로부터 분리한 아기 원숭이가 철사로 만든 원숭이보다 헝겊 원숭이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볼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안타까움이다. 아기 원숭이에게는 철사 원숭이보다는 헝겊 원숭이가 필요하고 헝겊 원숭이보다는 진짜 어미 원숭이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는 동물보다 사람이 필요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바람직한 사회적 관계를 위해서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다른 생물과 인간은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반려 생물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반려자나 자식을 위해 또는 부모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마다하지 않는 그 선택을 반려 생물에게 똑같이 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과 반려 생물은 수평적 관계가 아니며 수직적 혹은 종속적 관계라는 의미다.

참고로 나는 강아지도 여러 마리 키워본 적이 있고 길 고양이도 여러 마리 키워 본 적이 있다. 내가 똥까지 치우고 목욕을 시킨 것은 아니니 엄밀히 말하면 아내나 아이들이 키우는 것을 옆에서 본 것에 불과하기는 하다. 하지만  상당한 기간 같이 살면서 봤기 때문에 반려 생물을 키우는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나는 반려 생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반려 생물이 주는 것이 있고 인간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반려 생물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인간 반려자나 가족에서도 얻을 수 있지만 인간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반려 동물에게서 완전히 동일하게 얻을 수는 없다.  

흔히 님 하나에 점 하나 찍으면 남이고 내가 아닌 남의 편을 들기 때문에  남편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남편(男便)의 便은  1차선 편도 할 때의 편과 같은 한자어로 쪽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남자 쪽이라는 뜻으로 남편이 된 것이고 반대로 여자 쪽이라는 말이 여편이다. 여편이라는 단어는 과거에는 쓰였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쓰이지 않고 여편네라고 낮추는 말로만 남아 있다.  남편의 편은 편리하다고 할 때의 편과도 같은 한자다. 남편이란 남자로서 나를 편하게 해 주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기를 키울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함께 살면서  나를 편하게 해 주는 남자가 남편이다  

진료가 끝나고 나서 마실 삼아 혼자 경의선 숲길을 걸어 홍대에 있는 한가람 문구에 들렀다. 평소 살까 말까 망설였던 제이 허빈 빨간 잉크 작은 병을 하나 샀다. 루주 까르비에라는 이름의 잉크다. 잉크는 파카 주머니에 넣고 바람이 차가워 옷깃을 세우고 천천히 홍대 앞길을 걸어 상상마당까지 왔다. 상상마당은 오랜만에 들렀는데 1층의 진열 공간도 조금 바뀌고 2층은 디자인 소품, 3층은 예술 관련 서적을 전시 판매하는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3층에서 콘셉트진이라는 작은 잡지 두 권을 사고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쓴 로버트 달의 책 몇 권도 눈대중으로 넘겨봤다. 상상마당을 나와 저녁을 무얼 먹을지 고민하면서 호미화방 쪽으로 내려오다가 마침 항상 긴 줄로 들어가 볼 엄두를 내지 못하던 홍대 돈부리 집이 한가하여 돈카츠로 저녁을 해결했다. 아마 저녁으로는 좀 늦은 9시 가까운 시간이라서인지 아니면 날씨가 추워서 대기자가 없었던 건지 영문은 모르지만 맛있게 저녁 한 끼를 먹었다. 새로 산 잉크도 테스트해 볼 겸 쉬어도 갈 겸 내게는 참새 방앗간 같은 예스 24 중고서점에 들른다.  100만 번째 산 고양이 책도 읽어 보고 얼마 전 새로 산 미도리 무지 노트에 베껴 쓰기도 해 본다. 몰스킨 노트는 비싸기도 하고 모양도 마음에 들지 않고 무지 노트도 한동안 열심히 썼는데 종이질은 좋지만 넓게 퍼져 깔린 dot가 눈에 걸려 미도리 노트 무지로 바꾼 지 며칠 되었다. 그렇게 책 구경하면서 한 시간쯤 때우고 입원 산모 회진도 돌고 해야 해서 10시 반쯤 나왔다. 너무 늦으면 산모들의 잠을 깨우게 될지도 모르고 예스 24 서점도 어차피 11시면 마감이라. 그렇게 추운 길을 걸어 길거리 공연하는 젊은 친구의 브레이크 댄스도 흘깃 보면서 나의 집이자 일터인 병원으로 간다. 백만 번이 아닌 단 한 번만 사는 인생의 하루가 지나고 있다. 까만 하늘에는 진주처럼 하얀 보름달이 떴다. 오늘은 아내와 내가 결혼한지 30년째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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