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stetrics is art and science combined.
이 문장은 모든 산부인과 의사들이 배우는 산과학 교과서인 "Williams Obstetrics"라는 책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산과학은 예술과 과학으로 이루어진 학문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런 특성은 꼭 산과학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의학의 전 분야에 어느 정도씩은 해당이 된다. 다만 산과학이 그런 특성이 더 크기 때문에 책의 제일 앞부분에 그런 문장을 넣었다고 생각한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도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기회는 순간이며 경험은 불안정하며 판단은 어렵다."라는 문장에서 Art를 말했다. 그가 말한 Art는 문맥상 의술 혹은 기술로서의 의료를 말하는 것이라 현재의 Art와는 조금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과학과 예술은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점이 있지만 다른 점도 몇 가지 있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과학은 지식을 추구한다. 과학은 맞는 것과 틀린 것이 분명하고 객관적이지만 예술은 주관적이라 어느 사람에게는 아름답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주장이 과학적으로 진실이라고 입증되려면 누가 실험하든 조건만 같다면 같은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 의학이 과학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같은 원리가 작용하고 같은 처방은 항상 같은 효과를 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일례로 페니실린과 같은 항생제에 대한 과민성 쇼크는 생기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것을 가려내기 위해 과민 반응을 초래할 위험이 있는 모든 항생제들은 혈관 투여하기 전에 반드시 스킨 테스트 (Skin Test)를 시행한다. 스킨 테스트는 아주 소량의 약을 피하에 투여하여 피부의 발적 반응이 일정 범위 이상 나타나는지 하는 것을 관찰하는 방법이다. 침대는 과학입니다라는 광고가 한때 유행했는데 침대가 과학인지 가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의학은 과학은 아니다.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치료 혹은 처치라도 모든 사람에서 반드시 같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점 때문에 의료 분쟁이 종종 발생한다.
내가 알고 지내는 어떤 선생님의 병원에서 몇 년 전에 한 할아버지가 사망한 사례가 있었다. 그분은 검사를 위해 병원에 잠시 입원하였고 포도당 수액 주사를 맞은 후 화장실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119를 불러 급히 근처 대학 병원으로 이송하였지만 할아버지는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사망하였다. 가족들은 할아버지께서 병원에 와서 주사를 맞고 사망하였으니 의료 과실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문제를 삼았다. 의료 분쟁으로 가게 되면서 부검을 하였다. 부검 결과 사인은 급성 심근 경색증에 의한 심장 마비로 인한 사망인 것으로 나왔다. 평소 심장이 좋지 않은 지병이 있었던 분인데 아마 본인이나 가족들이 미처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러므로 병원에서 맞은 포도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사건은 그렇게 해서 별문제 없이 마무리되었다.
이런 사례도 있다. 내가 산부인과 전공의 2년 차 수련을 할 때의 일이니 30년도 훌쩍 넘은 일이다. 내가 수련하던 병원은 당시 국립병원이어서 의료 분쟁과 관련하여 의사의 의견을 묻는 질의서를 받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그런 질의서는 일차적으로 전공의들이 교과서와 논문 등을 바탕으로 초안을 적어서 드리면 최종적으로 과장님이나 교수님께서 검토하여 법원으로 보내는 식이었다. 당시 사례는 진통 중 자궁 파열에 의한 과다 출혈로 산모와 아기가 모두 사망한 사례였다. 진통 중 자궁 파열은 흔하지는 않지만 간혹 생기기도 하는데 제왕절개나 자궁 근종 절제술을 과거에 받은 산모, 자궁 기형이 있는 산모, 오랜 시간의 난산 산모, 쌍태아나 양수 과다증 산모, 노산, 거대아 임신 산모 등에서 주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산모의 병력은 지금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다른 해당 사항은 없고 단지 첫아기를 제왕절개 수술로 출산한 경우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왕절개 후 자연분만을 위한 진통 중 자궁 파열이 발생했고 과다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분쟁이 발생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산모나 보호자는 자궁 파열의 가능성에 대하여 전혀 사전에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제왕절개 후 자연 분만 (VBAC)은 외국이든 국내든 흔히 시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시도하는 병원들이 있고 그런 경우 반드시 자궁 파열의 위험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동의를 해야 시도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100명 중 한 명 꼴로는 자궁 파열이 생길 수 있다는 통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제왕절개 후 자연분만을 시도하는 경우들도 거의 없었던 때였기도 하고 사전 동의서도 받은 적이 없다는 가족의 진술이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용은 사전에 제왕절개 시술을 하였다는 병력을 의사가 미처 알지 못한 채 자연 분만을 시도하여서 사전 동의서가 없었던 것이다. 보통 산전 진찰 동안에 과거의 출산력 (몇 명의 아기를 낳았는지 어떤 방법으로 낳았는지 하는 것)을 묻는 것은 기본일 뿐 아니라 임신 중에 반드시 한번 이상 내진 진찰과 복부 관찰을 하기 때문에 복부의 제왕절개 상처를 미리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담당 의사는 한 번도 내진이나 복부 진찰을 하지 않았고 제왕절개 병력도 미처 알지 못했다.
위의 두 사례에서 한쪽은 의사의 과실을 딱히 지적하기 어려운 경우고 다른 하나는 의사의 과실이 분명해 보이는 사례다. 두 사례는 양극단의 사례로 현실에서의 의료 분쟁은 그 중간 어디쯤인가 위치하고 있다. 내과 의사이자 종양학을 다루는 전문의인 싯다르타 무케르지라는 의사가 "의학의 법칙들"이라는 책을 얼마 전 출간했다. 그는 책에서 의학에 있어 몇 가지 법칙을 열거했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의학에 법칙이라는 것이 있냐고 묻는다면 30여 년의 의사 생활 동안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답을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책의 저자는 2001년에 내과 레지던트를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1987년에 산부인과 레지던트 생활을 한 나보다 오히려 의사 경력이 짧은데도 불구하고 상당한 지혜와 경험을 가진 의사임이 분명하다. 이런 책도 내고 TED 무대에서 감동적인 연설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역시 책의 내용을 보니 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다음 문장은 책의 서문쯤에 해당하는 문장이다.
"의학이란 분야가 이렇게 원칙도 없이 불확실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설소대, 중이염, 해당 반응 등 신체 부위와 질병과 화학반응의 명칭을 달달 외우는 것도 알고 보면 의사들이 광대한 지식 영역을 대부분 알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개발한 장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가 책에서 말한 '의학의 법칙'이란 불확실성, 부정확성, 불완전성의 법칙들이다. 의사가 아닌 일반 사람들은 의학이 그렇게 불확실하고 불완전하고 오류 투성이라고 하면 의아해하고 불안해하겠지만 의학 분야에 오래 몸담은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그런 점을 절실하게 느낀다. 의학을 수행하는 의사가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토록 오랜 기간의 학습과 수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최선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수많은 오진과 악결과로 하여 의료 분쟁이 발생한다. 어떤 분야에서 10년을 열심히 노력하면 혹은 만 시간을 투자하면 달인의 경지에 다다른다고 한다. 그러나 의학에서는 10년이 아니라 20년 혹은 30년 이상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다고 해도 달인은 될 수가 없다. 명의니 뭐니 하는 것은 그저 경험이 조금 많은 의사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 이유는 의학이 과학이나 수학과 같은 종류의 학문 영역이 아니라 경험의 기록인 역사나 혹은 영감과 감성의 영역인 예술에 가까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 학자 중에 달인은 없다. 모차르트도 피아노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쳐서 유명해진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도 의학은 예술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의학은 주술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주술사는 과학자적인 측면도 있고 천문학자적인 능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예술가였다. 주술 행위에 동반된 노래와 춤, 그림이 지금의 예술의 기원인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음악 치료나 미술 치료는 지금도 그 역할이 적지 않다.
의학의 불확실성은 의학이 가진 예술적 측면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의학의 불확실성에 대한 강조가 의료 분쟁에 대한 면피를 위한 사전 포석이나 변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 의료 분쟁의 경우 그런 주장은 오히려 환자 가족들의 감정만 더 악화시키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밖에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팩트 체크라고 하는 말처럼 그것이 팩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의학 혹은 의술의 존재 의미를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음악과 미술이 아직 그 힘을 잃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더 강력한 힘을 가지는 것처럼 어떤 것의 존재 의미가 수학처럼 모든 경우에 항상 일정한 답을 분명하게 보여 주어야 생기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음악이 이 사람에게는 감명적이지만 저 사람에게는 소음에 불과하다고 해서 그 음악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의학은 머리 위에 불확실성이 드리워진 채 지식을 다루는 학문이다. 소독용 알코올과 표백제 냄새를 걷어 내고 등받이가 조절되는 침대와 병동 표지판과 반짝이는 대리석이 깔린 병원 로비를 지워버리고 파란색 면 가운을 입은 환자가 병실에서 견뎌야 하는 수많은 신체적 수모와 그를 낫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의사의 모습을 잠깐 한편에 밀어 놓고 나면, 아직도 순수한 지식과 현실 속의 지식을 조화시키는 법을 배우느라 애쓰는 학문의 모습이 드러난다. 가장 젊은 과학은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과학이기도 하다. 실로 의학은 인간의 일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섬세한 것이다."
위 문장은 '의학의 법칙들'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확실히 의학은 불확실한 학문이고 의사는 그런 학문을 대단한 종교처럼 떠받드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런 점 때문에 의학이 대단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위험이 중간에 놓여 있는지 그 끝은 과연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함께 길을 나서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픈 이들에게는 힘이 된다. 의사가 든 등불이 과학에 가깝든 예술에 가깝든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환자 옆의 가이드인 의사가 든 등불이 밝아서 위험을 좀 더 일찍 알려주고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있게 해 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앞으로 과학과 기술 (예술?)이 더 발달하면 등불의 빛은 더 밝아지고 더 멀리 비추기는 하겠지만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듯이 그 빛이 세상의 모든 아픈 이들이 바라는 것만큼, 더 건강해지고자 하는 이들이 기대하는 것만큼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함께 떠나 준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의학은 그런 학문이고 의사는 그런 사람들이다. 물론 그 대가는 돈이기도 하고 명예이기도 하고, 때로 존경이기도 하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종교가들이 한 말이나 성경 혹은 불경의 구절은 좋아하는 것이 많다. 인생의 지혜를 주기 때문이다. 종교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며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나는 그 문장에서 알기 위해서를 낫기 위해서로 바꾸고 싶다. 나을 것을 확실히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의사의 조언을 따르기 때문에 낫는다는 말이다. 결국은 의학은 과학이면서 예술이고 동시에 종교이기도 하다. 기독교에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사랑이 으뜸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의학 분야에 있어서 만큼은 서로 간에 믿음을 가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산부인과 교과서를 쓰는데 기여할 가능성은 없지만 만일 그런 기회가 있다면 나는 제일 첫 문장에 그렇게 쓰겠다.
Obstretrics is religion, art and science combined.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는 화가이자 과학자이고 해부학자였으며 오랜 전통의 공증인 가문 자손답게 살아생전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림도 많이 남겼지만 투석기와 같은 정비를 개발하고 인체 해부 그림도 남겼다. 후세의 사람들이 그가 관찰한 내용의 목록이나 아이디어, 또는 스케치를 등 여러 저술을 모아서 정리했는데 그것을 코덱스라고 한다. 코덱스는 무려 3만 장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기록물이다. 그런 코덱스 중 하나인 코덱스 레스터는 350억 원에 빌 게이츠에게 판매되었다고 한다.
의료 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차트와 검사 결과, 영상 자료들이다. 어떤 검사가 행해졌고 결과가 어떤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처치가 행해졌는지 하는 것이 의료 사고의 발생의 실마리 혹은 인과 관계를 확인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화가는 의사와 같은 길드에 속해 있었다고 할 정도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관찰한 내용을 그림으로 남기는 역할은 화가가 적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램브란트의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처럼 화가들이 그린 의학 관련 그림들이 지금도 여러 점 남아 있다. 물론 지금은 화가의 그런 역할은 사진이 맡고 있다.
여러 측면에서 의학과 예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의학이 추구하는 바는 인간의 건강한 삶이다. 그리고 예술이 추구하는 바는 아마도 삶이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그 둘이 다르기는 하지만 깊은 연관이 있다. 살아볼 만한 삶과 건강한 삶은 상호의존적이다. 정신병원에 있다가 권총 자살한 고흐, 파킨슨병으로 고통받다가 봉지를 뒤집어쓰고 자살한 뷔페, 우울증으로 손목 동맥을 절단해 자살한 로스코 등 정신병이든 지병으로든 자살한 화가들은 적지 않다. 예술가들의 예민한 감수성 탓도 있겠지만 건강한 삶과 살아볼 만한 삶이라는 것은 반드시는 아니지만 서로 영향을 준다. 물론 건강하지 않아도 당연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삶이다. 말년에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었음에도 손목에 붓을 감고 그림을 그려 나갔던 르누아르 같은 경우가 그런 경우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반대의 경우보다는 훨씬 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요지는 건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세계 보건기구(WHO)의 헌장에 건강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건강이란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은 것 외에 신체적 · 정신적 · 사회적 그리고 영적으로 완전히 좋은 상태를 의미한다."
의학은 불완전하다. 때문에 완전히 좋은 상태인 건강을 위해 의학이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그 길을 걷는 의사들이 흘려야 하는 피와 땀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짧지 않은 길을 가는 데 있어 꼭 필요한 연료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