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오비 산부인과

제목: #16. 딸아들 구별말고 [프린트]

글쓴이: 심상덕    시간: 2020-04-14 01:07
제목: #16. 딸아들 구별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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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여름
작가: 프랭크 웨스턴 벤슨
소장: 미국 스미소니언 미술관  

위로 두 명의 여자 아이가 있는 분이 셋째를 임신해서 오게 되면 왠지 긴장이 된다. 혹시 아들을 낳으려고 해서 셋째를 임신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서다. 물론 대부분은 아이를 여럿 키우는 것을 좋아해서 임신을 하게 된 분들이지만 간혹 아들을 낳으려고 해서 셋째까지 임신한 분들이 없지는 않다. 그럴 경우 거의 다 임신 32주 전에 아기의  성별을 알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법으로 허용된 32주 전에는 성별을 알려주지 않는다. 나는 얼굴에 미소가 없는 무표정한 인상 때문에  무뚝뚝한 의사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단점에 더하여  임신 32주 전에 태아 성별을 알려 주지 않는다는 점도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의사로 보이게 하는 한 요인이다. 심지어 몇 년 전에는 성별을 알려주지 않으니 뭐 이런 의사가 다 있냐고 화를 내면서 진료실 문을 발로 차면서 나가시는 분도 있었다. 의사는 법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며 그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키라고 하는 법을 지켰는데 항의를 들어야 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우리나라 의료법 20조에는 의료인이 임신 32주 이전에 부부에게 태아의 성별을 알리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과거에는 임신 전 기간에 걸쳐서 성감별이 금지되었지만 성감별 규정이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난 후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허용 시기를 놓고 공청회를 열었다. 종교계 인사들은 전 기간 금지를 주장하였고, 여성 단체는 전 기간 허용을 주장했다. 의사 단체는 태아가 생존 능력을 가지는 임신 20주 이후에는 성별을 알려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었다. 여러 계층의 의견을 종합하여 최종적으로 임신 32주 이후에는 성감별을 허용하도록  2009년에 법이 개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정상적인 남녀 성비는 105~106:100이다. 남자가 약간 더 많은데 그 이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1993년부터 2013년까지 우리나라에서 셋째 아이의 경우 남녀 성비는 아래와 같다.

1993년 203:100
1995년 177:100
2000년 142:100
2003년 137:100
2005년 128:100
2008년 117:100
2009년 114:100
2010년 111:100
2011년 110:100
2012년 109:100
2013년 108:100

1993년의 경우 203:100으로 남자아이의 수가 심각할 정도로 많았으나 다행히 2013년부터는 자연적인 남녀 성비에 가깝게 유지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남녀 성비 전체는 2016년도의 경우 105:100이다. 참고로 다른 나라의 경우를 살펴보면  중국 (115), 인도 (112), 베트남 (111) 순서로 남아가 여아보다 상당히 많다.  남녀 성비가 100이 안 되는 나라는  나우루 (83), 카자흐스탄 (94) 등이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에서 매년 발간하는 월드 팩트북 통계 2016년 자료)

중국이나 인도는 아직도 남아 선호 사상으로 여아의 낙태가 횡행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과거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렇게 특정 성별의 태아를 낙태하거나 태어난 아기를 살해하는 것을 젠더 사이드 (gendercide)라고 한다. 인종간 살인을 뜻하는 제노사이드 (genocide)에서 파생된 말이다. 주로 여성에 대한 인권이 낙후된 지역에서 여아에 대한 살해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십여 년 전에 겪은 일이 생각난다.
"원장님, 의료 보험 카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딸만 셋을 두었습니다. 저는 장손이라 아들을 낳을 때까지 아이를 낳아야 합니다. 그런데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형편이라 지금도 먹고살기가 힘듭니다. 한 아이만 낳아야 하는데 계속 낳게 되면 이미 낳은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기도 학교에 보내기도 힘듭니다. 그러니 원장님께서 이번에 임신한 넷째가 아들인지 딸인지 꼭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넷째 아기를 임신한 임신부의 남편께서 임신 3개월쯤 되어 초음파 검사를 할 때 내게 부탁했던 말이다.  그 당시는 아예 임신 전기 간 동안 태아 성별을 알려주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알려 줄 수는 없었다.

임신 중 태아의 성별을 미리 알고자 하는 욕구를 넘어서 아예 원하는 성별을 임신하려는 시도도 다양하다. 임신 초기에  어떤 약을 먹으면 성별이 바뀐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고 성관계를 언제  하느냐에 따라 아기 성별이 결정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몇 년 전 한 방송사의 기자분께서 어떤 약을 가지고 와서는 이 약이 정말 아들을 낳게 하는 효과가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런 약이 암암리에 소통되고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 내심 나도 궁금해하던 차였다. 기자가 아들 낳는 약이라고 약국에서 구입해 온 약은 특별할 것도 없는 칼슘 영양제였다. 도대체 이 약으로 어떻게 아들을 낳느냐고 오히려 내가 반문을 했다. 칼슘은 알칼리성으로 체질을 바꾸어 주는데 남아가 되는 정자는 알칼리성에 강하고 여아가 되는 정자는 산성에 강하니 알칼리성으로 체질을 바꾸어 주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사실처럼 퍼져있다고 했다. 우리 몸에는 항상성 (homoeostasis)이라는 것이 있어서 산성도나 체온 등 신체 내부의 환경이 일정한 상태로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특성이 있다. 더운 지방에 산다고 체온이 36.5도를 넘어 38도가 되지 않으며 산성인 식초를 퍼 마신다고 하여도 혈액의 산성도 (pH)가 변하지도 않는다. 설사 체내의 산성도가  바뀐다고 해도 남아가 되는 정자가 알칼리에 강하다는 근거도 없다. 그러므로 근거도 없는 것에 기반한 약이 효과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약이 입소문을 타고 퍼져 나가는 것은 아들 혹은 딸을 골라서 낳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고 잘못된 것인 줄을 알면서도 약을 팔아 이득을 남기려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이 정말 전혀 효과가 없다면 금방 사기라는 것이 들통이 나고 말아서 많은 사람들이 현혹될 리가 없지 않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도 점성술을 믿는 사람이 있고 점을 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근거에 기반하지 않은 것들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아들 낳는 약을 먹고 아들을 낳은 산모는 정말 약이 효과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다. 누군가 말했듯이 믿고 싶은 대로 보인다는 말이 이 경우 적절한 지적이라 하겠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현상은 확증 편향이라는 말로 심리학에서는 잘 알려진 인간의 특성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73년에 스탠퍼드 대학교의 데이비드 로젠한이라는 심리학 교수가  자신을 포함하여  대학원생, 주부, 화가, 학자로 구성된 7명의 사람들과 함께 정신 병원에 가짜로 입원하였다.  실험 주동자인 로젠한 교수는  쿵 소리가 들린다는 간단한 거짓 증상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데 성공한다. 그 이외의 7명의 사람들 모두 무사히  정신 병원에 입원하여 겪은 내용과 결과를 종합하여 그해 사이언스 지에  "정신병원에서 제정신으로 지내기"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실험은 로젠한 실험으로 유명하며 정신 의학계에 상당한 경종을 울렸다고 한다. 로젠한 교수는 정신 병원에 들어가자마자  다른 환자들 돕기, 환자들에게 법적 조언해 주기 등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처럼 행동하였는데  그의 모습을 본 정신과 의사는 그를 정신 분열증을 가진 환자로 진단하였고 동료 환자들은 그를 미친 척하며 실태 조사를 하려는 정상인으로 판단하였다.  함께 입원한 가짜 환자 8명 중 7명은 입원한 병원에서 정신 분열증, 1명은 조울증으로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반전은 그 뒤에 일어났다.  로젠한의 실험으로 일대 파란이 일어나고 나서 석 달이 지난 후  한 정신 병원이 로젠한 교수의 실험팀이 보낸 환자 중 41명의 가짜 환자를 찾아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로젠한 교수는 실험이 끝난 후 단 한 명의 가짜 환자도 그 병원에 보낸 적이 없었다.

위 이야기는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것에 부합하는 증거는 쉽게 발견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믿는 것에 반하는 증거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심리학적 오류를 지적하는 내용이다. 아들 낳는 약에 관한 인터뷰는 10여 년 전에도 한번 하였는데 불과 삼사 년 전에 또 그런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을 보면 원하는 성별을 낳고 싶은 마음의 간절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신혼여행 때 제주도를 갔었는데 돌하르방의 코가 닳아서 작아진 것을 많이 보았다. 돌부처나 돌 하르방의 코를 갈아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이 있어서 생긴 현상이다. 그 외에도 아들을 여럿 낳은 여인네의 속곳을 입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등 여러 속설들이 있지만 모두 다 과학적 근거가 없다.

원하는 성별을 낳기 위한 믿을 만한 방법이 없는 현실에서도 과거에 남아 선호 사상으로 심각한 성비 불균형이 초래되었다. 앞으로는 과거와 같은 남아 선호 사상이 다시 생길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은 오히려 여아 선호 사상이 득세를 하는 편이다. 그런 상황에서 효과적이고 저렴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딸 아들 선별 방법이 생겨난다면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비효과라고 해서 중국의 나비 날갯짓이 뉴욕에 태풍을 몰고 올 수 있다는 말처럼 개개인의 작은 선택이 크게는 나라의 장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딸 아들을 골라 낳는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는 것은 개인적인 관점을 떠나 국가 사회 나아가 인류 전체로 볼 때 매우 다행이다. 물론 난임 의학이 점점 발달해서 착상전 유전 진단이 보편화된다면 딸 아들을 골라 낳을 수 없는 의학의 한계도 허물어질 것이다. 그런 세상이 온다면 자연의 조절 작용에 비해 인간의 조절 작용이 더 나았던 적이 없었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레이철 카슨이 1962년에 쓴  "침묵의 봄"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낯선 정적이 감돌았다. 새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이런 상황에 놀란 마을 사람들은 자취를 감춘 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새들이 모이를 쪼아 먹던 뒷마당은 버림받은 듯 쓸쓸했다. 죽은 듯 고요한 봄이 온 것이다.
....
자연의 균형이란 유동적이고 계속 변화하며 조절과 조정이 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인간 역시 자연이 이루는 균형의 일부분이다.  그런데 가끔씩 인간이 이런 상태를 자의적으로 바꾸곤 한다. 살충제의 수, 다양성, 파괴성 등이 매년 실질적으로 증가하면서 환경 저항은 점점 더 감소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질병을 옮기고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는 곤충의 개체수는 유래 없을 만큼 심각하게 증가했다.
화학회사들은 살충제 연구와 관련해 많은 대학에 연구비를 퍼부었다. 하지만 생물학적 방제 연구에는 지원하지 않는다. 생물학적 방제는 화학 방제처럼 확실한 이윤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랭크 웨스턴 벤슨은 미국 화가다. 명작을 남긴 대부분 화가들은 굴곡진 인생을 산 경우가 많은데 그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평온한 삶을 살며 비평가와 일반인 모두에게 사랑을 받은 화가로 알려져 있다. 딸 3명과 아들 1명을 두고 아내와 함께 평생 해로하다가 89세에 죽었다고 한다. 낚시와 사냥도 즐기고 자연을 좋아하여 온화한 자연 풍광을 그린 인상주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동양화를 생각나게 하는 수채화 작품도 남겼는데 특히 수채화 들은 인기가 많아 미처 그림이 마르기도 전에 팔렸다고 한다.  평생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한 고흐에 비하면 행복한 화가임에 틀림이 없다. 위 그림은 그의 작품 중 "여름"이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뒤를 돌아보는 나이 든 여자는 화가의 아내이고 젊은 세 여자는 화가의 세 딸이다. 그는 흰색을 좋아해서 아내나 딸들의 옷은 거의 모두 흰색으로 그렸다. 흰색을 좋아하는 것이 그와 내가 유일하게 닮은 점이다. 그에게는 아들도 한 명 있었는데 "조용한 아침"이라는 제목의 그림에 아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딸을 모델로 해서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아마 딸 바보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60년대부터 이십여 년간 정부가 인구 억제 정책을 펴던 시절 유행하던 구호다.
"한 부모에 한 아이 이웃 간에 오누이”
좀 더 강력한 인구 억제 정책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1980년대 초부터 정부가 내세웠던 구호다. 1983년은 우리나라의 합계 출산율이 2.1명 이 된 시기다.  이 수준은 적정 인구를 유지하는 최저 선임에도 계속 인구 억제 정책을 펴다 지금은 세계 최저 합계출산율을 가진 저출산 국가가 되었다.
"자녀에게 가장 큰 선물은 동생입니다."
2000년대 들어와 정부가 내세운 구호다. 전에는 명령조의 구호이던 것이 존댓말을 쓰는 것부터 구호가 상당히 공손해졌다. 세상이 많이 달라진 듯싶다. 그러나 인구란 정부가 조절한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인구 정책이란 수자원 정책이나 에너지 정책과는 다르다. 사람은 물이나 전기 같은 무생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인구란 줄이기도 쉽지 않지만 늘이는 것은 더 어렵다. 출산이란 개개인의 여러 사정에 따라 좌우되는 것으로 정부가 나서서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항간에는 딸 둘을 낳으면 100점, 딸에 이어 아들을 낳으면 90점, 아들에 이어 딸을 낳으면 80점, 아들만 둘이면 0점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과거의 남아 선호 사상이 사라지는 것은 다행이지만 사실 그 말도 옳은 말은 아니다. 하나가 되었든 둘이 되었든  부부의 가족계획에 따라 낳아서 잘 기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딸이 되었든 아들이 되었든 건강하게 잘 키우면 되는 것이지 다 나은 성별이란 없다.

웨스턴 벤슨의 그림에 나오는 세 딸의 모습은 밝은 파란 하늘과 어울려 그녀들의 앞에 펼쳐진 삶이 얼마나 즐겁고 희망적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그런 자녀들의 모습을 담는 화가의 얼굴에는 흐뭇한 아빠의 미소가 서려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딸 셋을 낳아서 슬퍼하거나 아쉬워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 그림을 보여 주고 싶다. 물론 아들만 둘 혹은 셋을 낳은 분들에게도 마찬가지의 그림을 보여 줄 수 있다. 다만 나는 여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의사들이 택하는 분야인 산부인과를 전문 과목으로 선택한 것에서 보듯 아들보다는 딸이 좋아서 딸 셋의 그림을 여기 넣은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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