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휴대폰 모드 | 컴퓨터버전으로 계속 방문
전에 TV에서 봤던 영화인데 오늘 EBS에서 다시 방영해 주길래 잠깐 본다는 것이 결국 끝까지 다 보고 말았네요.
스토리가 복잡한 영화가 아니라 이미 다 아는 내용인데 홀린 듯 넋놓고 봤습니다.
영화는 설경구가 연기한 주인공 김영호의 현재부터 과거 20대 초반의 기억까지 단편 단편 되짚어 가는 특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몇편의 기억들은 아내와 이혼하고 쓸쓸하게 비를 맞고 떠도는 무일푼의 처량한 신세인 최근의 모습부터 바람 피우는 현장의 아내를 폭행하는 장면, 경찰이 되어 운동권 학생을 거칠게 고문하는 장면, 첫 사랑 여인의 가슴을 아프게 실망시킨 장면, 군대 복무 시절 광주 사태에 차출되었다가 실수로 어린 학생을 총으로 쏘아서 죽이게 되는 장면 등 모두 괴로운 기억 뿐입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더듬어 올라간 기억이 그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기억이군요.
공장에서 일하면서 처음 소풍을 가서 첫사랑 여인을 만나게 되는 가슴 설레는 기억입니다.
그때로 돌아가서 멈춘 채 영화는 끝납니다.
영화의 시작은 그의 현재이고 영화의 끝은 그의 가장 행복했던 과거인데 그 두 곳은 같은 장소입니다.
아마도 강촌이나 대성리 어디쯤인 것 같은.
같은 장소에서 달려오는 기차 앞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나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그의 모습이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영화는 우울하기는 하지만 박하사탕처럼 상큼한 여운을 조금은 남깁니다.
저는 이 영화를 과거로 돌아가는 방식이 아닌 처음의 행복한 기억부터 현재로의 순차적  방식으로 구성했다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더군요.
추측이지만 아마 같은 내용임에도 훨씬 더 우울한 느낌을 줄 듯 싶습니다.
그래서 다행입니다.
밤 늦은 시간 우울에 쩌는 영화를 보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요.

저는 그렇게 돌아가야 할만큼 현실이 아주 괴롭거나 지난 기억들이 모두 괴로운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영화의 주인공처럼 죽어서는 아니고 살아서 내 인생에 단한번 그렇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신이 준다면 어떻게 하게 될까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돌아가는 선택을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돌아간 순간부터 현재까지의 기억과 인연은 다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만일 그런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사람도 잃지 않고 돌아갈 수 있다면 20여년전 공중 보건 전문의로 지방에 의무 근무하던 때로 가보면 어떨까 싶네요.
비록 경제적 여유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별로 없을 때지만 마음에 여유가 있었고 꿈의 모습이 가장 밝고 유쾌한 시기였으니까요.
지금도 꿈은 잃지는 않았지만 무겁고 심각한 것들 뿐입니다.
비뚤어진 의료 현실을 바꾸어 보겠다는 꿈, 원칙을 지키면서도 병원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는 꿈, 처음 마음을 잃지 않고 정답지는 않아도 최선을 다하는 의사가 되겠다는  꿈, 많은 빚을 한 순간에 갚을 수 있었으면 하는 꿈. 정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꿈.
모두 주제 넘게 크고 벅차고 어렵기만 한 것들 뿐입니다.
젊을 때는 오히려 따스한 날에 햇볕 좋은 마당에 앉아 어린 세아이들과 함께 노는 꿈. 이번 여름에는 사택  근처 개울에서 짧은 휴가를 보낼 수 있었으면 하는 꿈.  별로 비싸지 않은 카메라를 가지고 싶은 꿈.
그런 소박하고 잔잔한 것들이었습니다.
이젠 나이가 들면서 꿈은 무거워지고 거창해지고 이루기는 어려운 것들을 욕심을 냅니다.
그래서 돌아가야만 한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군요.
가볍고  이루기 쉽고 심각하지 않고 생각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지는 꿈을 꾸던 시절.
영화의 주인공이 꽃잎을 따서 첫사랑 여인에게 건네면서 그녀의 웃음 띈 얼굴을 한번 더 보기를 꿈꾸던 그런 소박한 시절로 말입니다.


이 글에 좋아요를 표시한 회원

brugges [2019-12-15 14:27]  이연경 [2015-03-24 09:46]  최현희 [2015-03-23 08:30]  

스마트폰 모드|진오비 산부인과

© 2005-2024 gynob clinic

빠른 답글 맨위로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