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의 운명
작가: 빅토르 위고
소장: 프랑스 파리 빅토르 위고 박물관

세상일은 모두 우연히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정해진 운명에 따라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후자를 운명론자 혹은 결정론자라고 한다. 요즘에 그렇게 운명에 의해 삶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과학이 발달한 요즘 그런 운명론에 빠져 있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별의 움직임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점성술이 현재의 과학이 누리는 권위를 가진 시절도 있었다.  점성술은 20세기 초까지도 유행하였고 지금도 소수지만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19세기에 활동한 소설가가 운명론을 철저히 신봉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그런 미신에 빠져 있다니 한심한 사람이라고 과거의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깬 돌로 고기를 자르는 구석기시대 사람에게 칼을 쓰지 왜 둔한 돌을 쓰느냐고 말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다. 여하튼 그렇게 운명론을 철저히 신봉한 소설가 중 한 명이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다.

빅토르 위고의 대표작은 17년에 걸쳐서 썼다는  "레미제라블"이다. 책으로 번역되어 나온 것이 총 5권이니 상당히  방대한 양이라 전문을 다 읽는 것이 쉽지 않다. 대부분은 나처럼 장발장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온 한 권짜리 요약본을 읽었을 것이다. 소설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주인공 장발장은 억울하게 19년간 감옥살이하고 내내 자베르 형사에게 쫓겨다니며 온갖 고난을 겪는 끔찍한 운명을 타고났지만 그 운명을 사랑으로 극복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에서도 운명을 의미하는 부분이 몇 곳 나온다.

"물론 그건 불쾌한 시간이겠지. 그러나 이내 거기서 벗어나게 될 거야. 요컨대 나의 운명이 아무리 악화되어 가려고 해도, 나는 그것을 내 손안에 쥐고 있다. 나는 나의 운명의 주인공이다."

"신 하나가 부랑아 위를 통과했다. 운명이 그 어린것에 정성을 들인다. 운명이라는 말은 다소 우연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다. 배우지 못하고, 바보스럽고, 상스럽고, 하층민에 속하는 이 난쟁이는 장래에 현명한 사람이 될 것인지 아니면 바보가 될 것인지? 좀 기다려 보도록 하라."

"어찌하나? 코제트는 여태껏 잘 자라 왔는데 그녀의 청춘이 깨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그녀의 삶을 지켜야만 한다. 내일, 우린 여기서 멀리 떠난다. 내일은 모두에게 있어서 거짓말을 못하는 날이 되리라. 내일이면 저마다의 운명을 알게 되리라."

빅토르 위고는 작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다른 화가들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는데  오히려 우리에게는 익숙한 그림 양식이다. 그의 그림 작품 중에는 다채로운 색감의 유화 작품은 얼마 없고 흑백의 강한 대비가 돋보이는 그림이 대다수다.  잉크와 물을 이용하기도 했고 먹을 사용한 그림도 있다.  그는 먹은 색깔이 아주 검은 데다가 시간이 오래 흘러도 빛깔이 퇴색하지 않아 은은한 아름다움이 우러나오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다. 수묵화를 닮은 그의 그림과 운명을 믿는 그의 철학은 묘하게 어울리는 구석이 있다. 동양 철학은 사주팔자와 같이  운명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 점에서는 운명을 믿는 위고가 동양화인 수묵화 방식을 택한 것도 우연이 아닐 듯싶다.

그의 그림 "나의 운명"은 1867년 그러니까 위고의 나이 65세에 그린 그림이다. 낡은 사진처럼 갈색조의 그림으로 파도치는 바다의 모습이 화면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왜 이런 파도에 "나의 운명"이라는 제목을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자신의 험난한 인생을 파도에 빗댄 것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 있어 운명이라고 할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운명론자가 아니다.
의과대학은 2년의 예과 과정과 4년의 본과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과 과정은 국문학, 물리학 등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는 시기이고 본과는 해부학부터 시작해서 내과학, 외과학, 산부인과학, 소아과학 등 임상 과목을 배우는 시기다. 따라서 예과 시절은 시간이 여유가 많은 편이라 동아리 활동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나는 미술반 동아리에서 1년 정도 활동했었는데 그때 서울의대 미술반은 지금도 그렇겠지만 서양화부와 서예부가 있었다. 잠깐 배우다 만 상태라서 주로 데생에 시간을 많이 보냈고 아그리파라든가 쥴리앙 같은 석고상도 그때 처음 보았다.  유화는 몇 점 그리지 못하였는데 함춘 미전에 출품하기 위해 나름 열심히 그렸던 작품이 하나 있다. 바이올린을 그린 것이었다. 음악에 대하여는 문외한이고 악기도 다룰 줄 아는 것이 없는 내가 바이올린을  그린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풍경이든 인물이든 정물이든 모두 다 그리기 어렵지만 특히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초보자들은 주로 정물을 많이 그린다. 그리고 그때 마침 미술반 동아리 방에 낡은 바이올린이 굴러 다닌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것도 어쩌면 운명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바이올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대부분 문화권에서  음악은 탄생이나 죽음과 관련이 깊다. 음악이  없는 장례는 생각할 수가 없으며 지금도 생일 축하에서는 노래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는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샤갈의 그림에 나오는 바이올린이다.  마르크 샤갈은 러시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 녹색의  바이올린 연주자, 푸른 바이올린 연주자,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 double visage 등의 작품에서 보듯 바이올린이 들어간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가 왜 이렇게 바이올린을 많이 그렸나 찾아보니 그가 자란 러시아에서는 아기가 태어났을 때나 결혼할 때 축하의 의미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샤갈도 그런 축하의 의미로  혹은 아기를 수호하는 천사의 의미로 바이올린 연주자를 그렸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러시아에서 탄생을 축하할 때 쓰이는 도구로서 바이올린이 쓰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문화는 러시아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 내가 바이올린 그림을 그린 것과 탄생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것이 산부인과를 하게 될 운명의 암시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내가 은평구와 서대문구에 개업한 8, 9년 기간을 지나 세 번째 개업 장소로 마포구 동교동에 터를 잡은 것도 벌써 20년이 다되어 간다. 나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2, 3 년간을 빼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거의 대부분의 학창 시절은 모두 동대문구에서 보냈다. 동대문구는  마포구나 서대문구는 정반대의 장소다. 의과 대학도 서대문구에서는 먼데 어쩌다 내가 이 동네로 와서  개업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마포구가 나와 전혀 인연이 없지 않은 것이 내가 아내와 약혼을 한 서교 호텔이 있는 곳이 이곳이기도 하다. 30여 년 전 어리벙벙한 채로 서교 호텔에서 약혼을 할 때 이 동네 언저리에서 밥벌이를 하면서 살게 될 거라고는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다.

바이올린을 그린 것이나 마포구에 자리를 잡은 것이나 그 모두는 사실 우연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어쩌면 나도 모르는 어떤 힘 혹은 섭리가 작용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물론 나는 이 세상이 절대자의 섭리에 의하여 움직이는 세상이라기보다는  그저 자연적 법칙을 따르면서 우연에 의하여 굴러가는 세상이라고 믿는 무신론자다. 다만 누군가에게 추천하라고 하면 나는  우연에 의하여 굴러가는 삭막한 세상보다는 필연에 의하여 매사가 의미를 갖고 나아가는 세상에 사는 쪽을 추천하고 싶다.  산부인과와 바이올린 그림과 내가 모두 어쩌다 발생한 우연으로 만났다는 것보다는 다 미리 예정된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멋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아내와 결혼하게 된 것이 미리 예정된 운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우연히 그날 친구를 만났고 친구의 여자 친구를 만났고 친구의 여자 친구의 친구를  만났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여자와 남자가 만나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운명일 수도 있고 우연일 수도 있다.

방금 출산을 끝내고 아기를 산모의 가슴에 안겨드리면 감동에 겨운 산모와 남편들이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우리에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 행복하게 잘 살자."
우연히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났고 어쩌다 보니 결혼을 해서 그저 어느 날 우연히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이 되어 지금 아기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부부들은 특별히 소중한 인연이 작동을 해서 한 영혼이 특별히 자신들에게 찾아왔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도록 운명 지어졌다고 생각한다. 아기가 그 부부를 찾아가듯이 그 부부가 내가 운영하는 병원을 찾아온 것도 어쩌면 운명적인 어떤 이끌림이 작동했을 수 있다.

얼마 전 아기의 성별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다 직원 중에 한 명이 아기 성별은 아빠에 의해서 결정 나는 것인데 왜 아기가 딸이라고 혹은 아들이라고 엄마를 탓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남녀를 구분하는 성염색체는 여자는 XX만 가고 있고 남자는 XY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난자는 X만 있고 정자는 X를 가진 것과 Y를 가진 것으로 나누어지니 어떤 정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성별이 결정된다는 이치를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이 도달한 정자들도 난자의 벽이 열리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다. 난자가 어떤 정자를 선택하는지 그 기전은 아직 모르지만 난자에게 선택권이 달린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별의 결정은 난자와 정자 모두에게 달려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은 우연히든 혹은 운명적으로든 특별한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데서부터 시작한다는 이야기다.

난임 시술 중에 미세 수정 시험관 임신이라는 방법이 있다. 여성에게 배란 유도제를 사용하여 채취한 난자에 남성으로부터 얻어진 정자 중 한 마리를 골라 난자에 직접 넣어 준 후 배양하여 자궁에 착상을 시키는 수정 방법이다.  자연적인 환경에서는 난자가 선택하던 정자를 인간의 판단에 의해 선택하여 넣어주는 것이다. 미세 수정이 자연적 임신에 비하여 어떤  부작용이나 문제가 있는지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의학적으로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다만 의지를 가진 인격체는 아니지만 난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선택권을 박탈당한 것과 마찬가지다.

난임이란 것은 자연적으로 임신이 잘 되지 않는 특별한 경우이니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의 개입이 자연적인 과정에 비하여 못한 경우를 많이 본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자연적인 것을 훼손하지 않는 것을 권하는 편이다. 임신 과정은 말할 것도 없고 출산하는 과정에서도 가급적 자연적인 것을 존중하자는 입장이다. 의학적 관찰이나 개입은 꼭 필요한 범위로 제한해서 사용하는 것을 권하는 편이다. 무분별한 남용은 당연히 정상적인 순산에 해로우며 그렇다고 아무런 관찰이나 개입도 없이 방치하는 것도 답은 아니다.  그 적절한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의사의 철학과 지식, 그리고 경험이다. 철학이란 목적지를 정하는 것이고 지식이란 목적지에 이르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며 경험이란 그 수단을 얼마나 잘 사용하는지 하는 기술이다. 세 가지가 모두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철학이다.  조금 서툴고 느리더라도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다. 설사 너무 느려서 원하던 목적지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원하는 목적지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원하는 곳을 바라보고 가다 쓰러진 사람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시험관 시술 임신이라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관계를 하지 않고는 임신할 수 없다. 물론 성관계를 했다고 해서 반드시 임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임신할 가능성은 항상 가지고 있다. 출산은 임신을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임신을 하면 유산이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출산까지 연결이 된다. 그러므로 임신을 하는 순간 여성은 출산하도록 운명 지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임신과 운명은 상당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나는 그런 운명을 가진 여성들을 돕는 의사다.  그 운명을 잘 완수해 낼 수 있도록 돕는 안내자다.  

[사족]
원래 #01편은 서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임신 40주에 맞추어 40개의 글을 쓰는 것이 처음 계획이었고 서문은 별도로 해야 하기 때문에 40개의 글에 맞추기 위해 서문의 순서에 있던 글 대신 이글을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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