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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에서의 안전성과 편안함, 혹은 이성과 감성에 관한 이야기

2013-01-26 11:34| 글쓴이: 심상덕| 댓글: 0

직원이 말해 주어서 저희 병원에서 출산하신 분이 인터넷에 올리신 출산 후기를 보았습니다.
너무 좋게 써 주셔서 얼굴이 조금 후끈 거리는군요.
과다한 촉진제의 사용, 제왕절개나 흡입기 사용을 줄이려고 노력한다거나 관장과 삭모의 자제 등, 가급적 자연적인 출산을 선호하려 한다는 것은 맞는데 그외 몇가지 부분은 저에 대하여 조금 미화된 듯하여 쑥스럽군요.
좋게 보아 주시고 홍보까지 해 주시니 저희로써야 감사한 일이지만......

여하튼 그 글을 보면서 또는 유사한 그런 글들을 보면서 산부인과 의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에게는 무엇이 가장 부족할까 하는 점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산부인과 의사에게는 두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머리(냉정한 이성)와 가슴(따스한 배려)입니다.
분만이라는 것은 자연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때로 상당한 위험도 동반되는 일이기 때문에 분만을 돕는 의사로서는 항상 긴장해야 하고 수시로 변하는 상황에서 전문가로서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현명한 판단과 조치를 취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분만이란 집에서도 혹은 의사의 도움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임에도 굳이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병원에서 분만을 하게 된 이유도 그런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는 저희 병원의 모든 가족들이나 저나 그리 부족한 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경험이 쌓여갈수록 머리만이 아니라 가슴도 상당히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고 있습니다.
따스한 배려와 포근한 격려가 힘든 진통과 출산의 순간에 산모에게 얼마나 크게 도움이 되는지 말입니다.
다만 제가 천성이 무뚝뚝하다보니 그런 것을 잘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사실 위험하지 않은 경우의 분만에서 분만 현장에 함께 하는 의사의 역할이란 그런 공감자로서의 역할 (제가 전에 쓴 글의 표현대로라면 닥터 심파티쿠스로서의 역할)이 거의 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앞으로도 노력은 하겠지만 그런 점에서는 저는 많이 떨어지는 의사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할 수 밖에 없을 듯 싶습니다.
특히 저와 함께 근무하는 다른 두분 원장님과 비교해 보면 제가 그런 점에서 얼마나 모자라는 지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에 말한 것과 같은 글을 보면 그리 살갑게 산모나 가족들을 대해 주는 천성이 아님에도 그렇게 보아 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과 함께 어색함을 동시에 느끼나 봅니다.

어쨋든 머리와 가슴 모두 중요한 것이고 그 둘을 다 겸비해야 하지만 때로는 그 둘이 서로 상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산모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차갑게 이성적으로만 대해야 할 때도 있고 그 반대도 있을 것입니다.
어제 오신 산모분이 그런 경우 같습니다.
중증 내과적 질환을 가지고 계신데다가 상당한 노산이라 안전성을 우선 고려해야 하는 경우라 의학적 견지에서 대학병원에서의 진찰과 분만이 필수적이라는 말을 사무적으로 (즉 차갑게 이성적으로) 말씀드렸는데 멀리 경기도에서 자연주의 출산을 위해 일부러 긴 시간 물어 물어 찾아오신 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 의학적 견지에서의 위험성만 도드라지게 말씀 드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찾아오시게 된 사정과 그 심정을 이해하고 제가 도울 수 있는 한도에서 돕고 또 격려도 해 드리고 해야 하는데 (따스한 배려와 격려)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분만이라는 것은 안전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그 산모의 경우는 다소간의 불편함과 미흡함이 있다하더라도 본인과 아기의 건강을 위하여 안전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경우라고 판단해서 그렇게 조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산부인과 의사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분만 현장에 있었는데 그동안  감사하고 기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제가 분만을 돕던 아기가 매우 위중한 상태가 되거나 심지어 사망한 일, 심지어 산모가 사망하게 되거나 혹은 그 둘이 동시에 일어나는 안타까운 경험도 많지는 않지는 없지 않습니다.
그런 기억이 종종 떠올라 분만에 임할때마다 불안한 마음과 걱정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단 한번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고위험 그룹이라고 생각되는 경우에 그런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위험 그룹에 속하는 분들은 안전을 우선 생각하여 시설과 인력 그리고 장비가 갖추어진 곳에서 분만을 했다면 피해갈 수도 있을만한 경우들이라는 것이었죠.
물론 대학과 대형병원처럼 인력과 장비가 갖추어진 상태라고 해서 비극적 사고를 다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여하튼 분만에 관하여 정의하자면 산모의 입장에서는 안전성과 편안함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는 것과 같고 의사에게는 차가운 이성과 따스한 가슴 두가지가 동원되어야 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느 한쪽이 너무 처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요즈음 자연적인 출산 과정에 대한 존중은 필요한 일이고 제 개인적 소신이기도 하지만 산모나 가족분들이 현재와 같은 의료적 처치가 거의 없던 조선 시대에는 모두 가정에서 자연적 과정으로 출산했지만 산모나 아기의 사망율이 매우 높았다는 점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즉 분만이라는 것은 조금 특수한 의료 서비스이기는 하지만 모든 의료적 처치나 치료란 다소간의 불편함을 동반하는 일이며 현재의 여러 의료적 처치가 모성사망율이나 신생아 유병율을 낮추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일례로 회음부 절개도 가능하면 줄이고자 하는 것이 저도 그렇지만 많은 의사들의 바램이지만 아프리카 일부 국가의 사례를 참고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 나라들에서는 의료진의 도움이 없이 출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회음부 절개를 하지 않고 출산을 하는데 상당히 많은 산모들이 분만 중의 항문 파열로 인한 질항문 누공으로 고생하고 있어 외국의 자원봉사 의사들이 아주 많은 수의 질항문 누공 수술에 매달리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의료에서 많은 부분은 나름의 필요와 타당성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남용되거나 의료진의 편의를 위해 사용되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 뿐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저를 포함한 국내의 의사들은 많은 반성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왜곡과 편견, 과장이 없는 올바른 의료 정보의 전달도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모든 산모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출산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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