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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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분만실을 폐쇄하며

2013-03-18 14:44| 글쓴이: 심상덕| 댓글: 0


(지금은 다시 분만을 시작했지만 몇년 전 분만실을 폐쇄하면서 느낀 소감을 써서 기고했던 글입니다.)

[기고] 분만실을 폐쇄하며 / 심상덕

4년간의 힘든 산부인과 전문의 수련과정을 마치고 일선 현장에서 산부인과 전문의로서 진료를 한 지 벌써 20년째다. 그 기간의 거의 대부분을 임부와 산모를 진찰하고 분만 현장을 지켜 수많은 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을 함께했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현재 운영하고 있는 병원에서 분만을 접고 일반 산부인과 진료만 하기로 결정했다. 몇 해 전 <한겨레>에 ‘나는 분만 의사로 남고 싶다’는 글을 싣기도 했지만 결국 내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분만할 임부가 줄어들어서다.

분만실을 유지하려면 밤근무가 가능한 직원도 있어야 하고 적정한 공간을 확보해야 할 뿐 아니라 24시간 분만과 수술이 가능한 상태로 산부인과 의사와 마취과 의사가 대기상태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유지비가 든다.

분만은 의료사고 위험이 높은 분야 중 하나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의료분쟁으로 인한 손실금은 차치하고라도 최소한 경영상 적자를 보지 않을 수준은 넘어야 하는데, 현재 일부 대형병원 말고는 이런 기본 수준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분만병원은 갈수록 줄어 올해는 전국에서 1000곳도 안 된다고 한다. 물론 원가의 60%에도 못 미치는 저수가나 의료전달체계 붕괴 등 의료체계의 잘못을 논외로 친다면 수요 감소로 인한 경영상 어려움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병원도 경영을 잘못하면 망할 수 있고 분만도 수요 공급의 원칙에 맞지 않으면 포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의료는 일반 경제 영역과 달라서 대신할 수 있는 제품이 없으며 자유로운 시장경제 체제로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통제로 좌지우지되는 시스템이다. 쌀이 모자라면 빵을 먹을 수도 있고 닭고기가 품귀이면 돼지고기를 먹으면 된다. 그러나 분만을 담당하는 산부인과 의사의 역할은 누가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가정 분만이나 조산사 양성이 대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는 퇴보일 뿐이다.

여하튼 이미 많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분만 현장을 떠나고 있고 새로 배출되는 의사들도 분만을 담당하지 않으려고 한다. 따라서 임신부들은 출산하기 위해 먼거리의 병원을 찾아 번거롭고 힘들게 수고를 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일반 경제 현장에서는 한곳의 업장이 없어지면 다른 곳이 또 생겨나지만 분만 관련 병원들은 없어진 채로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소수의 대형화된 분만병원만 남게 되는 것이다.

소수의 대형 분만전문병원을 찾아 3시간 대기하고 3분 진료하는 현상이 아무 문제 없는 것이고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분들에게 부른 배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여기저기를 죄인인 것처럼 헤매고 다니는 임부들의 이야기를 단 한번이라도 들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런 처참한 현상을 방치하고 있는 정부가 저출산 문제를 목청 높여 호소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나는 이제 출산하는 산모를 보면서 느꼈던 가슴 벅찬 감동과 분만의사로서의 숭고한 보람을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인류가 없어지지 않는 한 세상의 모든 임부들은 출산을 하면서 뜨거운 눈물과 새로운 희망과 감격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임부들이 그런 소중한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지치지 않도록 국가와 사회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심상덕 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 모임 (진오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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