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8월 4일이니 개원 2년째인 11월까지는 서너달 정도 남았습니다.
원래는 작년 11월쯤 병원을 그만두려 했었는데 그 무렵 갑자기 최안나 샘이 그만 둔다 만다 하다가 확장하여 재투자 하기로 하였다가 결국 그만두게 되어 병원이 어수선하고 그리고 진오비 산부인과도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는 상황이라 1년 더 힘을 쏫아 보기로 하여 지금까지 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산부인과 의사로 20여년 분만 현장만 지키면서 여러 사건 사고도 많았고 의사로서의 원칙도 때로 지키지는 못했지만 원칙을 지키고 생명을 존중하려는 철학까지는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비록 성별도 법에서 정한 32주 이전에는 알려주지 않아 항의도 많이 듣고 적응증을 벗어나서 제왕절개를 하지 않으려고 무리하게 자연분만을 고집하다보니 수술을 원하는 산모들께는 사기꾼 소리도 듣고 수술 안하는 의사로 알려지기도 하였습니다.
다니던 병원을 바꾸어 옮겨 오시려는 분들은 가급적 다니던 병원을 다니시면서 그 병원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 산부인과 의료 환경의 개선책이라고 생각하여 전원을 만류하는 바람에 오만하고 무뚝뚝한 의사로 비춰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내용은 어떻든 친절만 외치고 산모가 원하는 것이면 그것이 결국 그 사람에게 해롭든 어떻든 무엇이든 들어주고, 병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살인과 강도짓 외에는 모두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병원 경영 풍토가 구역질 나도록 싫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저와 같은 의사도 한명쯤은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서울의대 나와서 서울대병원에서 수련하고 모두 가고 싶어 하는 삼성의료원에서의 근무 경력도 가지고 있어 비록 별 것은 아니지만 나름 최고 수준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동기들이나 선배들 중 그런 백그라운드에도 불구하고 저처럼 일선 동네 의원을 개업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모두 대학병원의 교수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강남의 대형 병원에서 폼나게 근무하고 있습니다.
저는 소신도 있고 나름 실력도 갖춘 의사의 제대로 된 진료를 제가 있는 곳의 분들에게도 충실히 제공하여 의료 서비스에 관한한 돈이 많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돈이 없어도 권력이 없어도 누구나 껍데기 측면에서는 아니라도 내용면에서는 최상의 진료를 받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의사로서의 제 꿈이었습니다.
더불어 출산이라는 것이 분만하는 그 순간으로 의미없이 끝나지 않도록 산전이나 산후의 소통에 신경을 쓰고 병원이 다시 오고 싶어지는 곳까지는 아니라도 오는 것이 끔찍하게 싫은 곳이 되지 않도록 하고자 했는데 과연 얼마나 그런 목적이 달성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런 제 욕심 때문에 댓가로 치룬 것도 적지는 않습니다.
폐업하고 있는 기간이 아니고 개업하고 있는 동안 휴가를 제대로 가 보거나 한달에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쉬어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목욕탕조차 휴대폰을 비닐이나 수건에 싸서 들고 들어가야 하고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서도 언제 전화가 올지 몰라 불안합니다.
병원에 있지 않은 시간에 휴대전화가 울리면 혹시 입원한 산모나 아기가 문제가 생겼다는 전화는 아닐지 가슴이 덜컥 내려 앉기 때문에 가족이나 친척, 친구 누구도 제가 전화하기 전에는 함부로 제게 전화하지 않습니다.
부모님께는 아직도 제 앞기람조차 못하고 자나깨나 걱정만 끼치는 불효자일 뿐이고 아내에게는 빵점짜리 남편, 아이들에게는 닮고 싶지 않은 아빠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아내는 하루 빨리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있고 아이들은 앞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잘 헤쳐 나갈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완전 방목하면서 키웠습니다.
여하튼 이제 그런 실험의 기간도 불과 몇달 남지 않았고 11월까지 남은 기간 동안도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죽을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래도 안되면 저는 올 12월 말까지만 진료할 계획입니다.
무엇보다 생활이 유지가 안되서 더 하기도 어렵습니다.
물론 저와 같은 의사--비록 무뚝뚝하기 그지 없으나 의사로서 지켜야 하는 원칙은 자신의 목숨처럼 소중히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의사--가 이런 의료 토양에서 필요한지, 산부인과 의사로서 살아 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제 오랜 실험의 결과도 이제 몇달 후면 결론을 내야 합니다.
제게 중요한 4달 중 이제 4일이 지나고 있군요.
창밖은 여전히 구름이 많이 껴서 흐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