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Eleven 인 책으로 역시 내가 좋아하는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을 읽었다.
아마 이 작가의 글 중 국내에 알려진 것 중 내가 가장 나중에 읽은 책일 것이다.
나는 어지간해서는 책을 단숨에 잘 읽지 못하고 시간이 상당히 걸려 읽는 편인데 더군다나 스토리가 빈약한 그의 소설들 치고는 그래도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읽은 책에 속한다.
그림은 아는만큼 보인다고 한다.
그런 의미로 시나 소설도 경험한 만큼 느낀다.
따라서 아무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시나 소설을 느끼게 한다는 것은 헬렌 켈러에게 아름다운 무지개를 느끼게 하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
한번이라도 무지개를 본 사람에게는 비가 온 뒤 하늘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이라는 간단한 말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 아름다움을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소설가가 소설을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스토리 텔링의 기술이다.
일생에 한번도 겪어 보기 힘든 희귀한 에피소드라는 재료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 주면서 독자로 하여금 몰입하게 하는 기술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한 사람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름의 방식에 따라 기술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어느 창녀의 일상과 일기의 형식으로 드러낸 마음 속 행로에 대하여 기술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다.
왜냐하면 대개의 독자로 하여금 창녀로써 글 속으로 몰입을 하게 만들기도 힘들 뿐 아니라 한 인간의 이야기로써 보더라도 공감이나 흥미를 이끌어 내기에는 너무도 진부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울로 코엘료는 "옛날 옛적에 마리아라는 창녀가 있었다"라고 하는 문장으로 어느 창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실은 창녀의 이야기가 아니며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는 창녀의 모습을 하고 있던 어느 여자의 처녀성 회복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런 고통과 쾌락의 이중주 혹은 창녀에서 처녀로 회복되는 소설의 구조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독자의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가 겁없이 독자들 앞에 이 책을 내놓은 것일 것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다음에 인용이 필요하거나 기억해 둘 만한 중요한 페이지에는 태그를 붙인다.
보통 길지 않은 책인 경우 수십군데의 밑줄과 10 개 내지 20 개 전후의 태그가 사용된다.
내가 이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11 분"에서 사용한 태그는 정확히 44 개다.
그리고 그런 태그의 갯수는 글 첫머리에서 말했다시피 지난 경험에서 말미암은 바가 적지 않다.
따라서 이 책을 이전에 감동없이 읽은 사람이 있다면 가슴이 절절하게 아픈 경험을 한 후에 다시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해드린다.
내가 쓴 먼저의 독후감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우리가 어느 작가의 것이든 책을 읽으면서 얻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스토리의 전개를 볼 것이고 어떤 사람은 작가가 행간에 숨겨둔 다른 의미를 찾아보려 할 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중간 중간에 드러나는 멋있는 문장에 매료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리아가 테렌스라는 사디스트에게 "내게 뭘 한거죠 ?"라고 물었을 때 테렌스가 마리아에게 해 주는 말처럼 "내가 해 주었으면 하고 당신이 바란 것." 그대로 나는 소설에서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싶은 것을 느낀다.
소설에서는 주인공 마리아와 랄프와 테렌스라는 두명의 남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사랑, 상상 속의 욕망, 벽난로, 와인의 기억을 주는 사람이며 다른 한 사람은 애무, 육체적인 고통, 채찍, 보드카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물론 창녀로서 전혀 오르가슴을 느낄 수 없는 그녀에게 두 사람 모두 신과의 합일을 느낄 정도의 강렬한 오르가슴을 느끼게 해준다.
결국 마리아가 선택하는 것은 그녀의 처녀성을 회복 시켜준 랄프이지만.
아니 마리아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실 랄프가 그녀를 선택한 것이라고 해야겠다. 왜냐하면 글의 마지막에서 영화처럼 낭만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것은 그이니까.
사실 나는 처음에 창녀의 이야기라고 하여 아름다운 한 여자가 어떻게 처참하게 그녀의 처녀성을 상실하는가 하는 것이 내용이라고 생각했고 저자가 그 과정을 얼마나 그럴싸하게 포장할 지 궁금했었다.
물론 그런 내용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으며 글의 주된 포커스가 아니었다.
어떤 과정 또는 방법으로 그녀의 처녀성이 회복되는지 하는 것을 알아 내는 것은 내가 여기서 간단히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책을 읽는 독자들의 몫이다. 또한 그 과정이 이 책이 던져주는 중요한 교훈이기도 하다.
그리고 교훈은 어렵게 얻어야 그만큼 오래 기억이 나고 값어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이 내 평소의 생각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곳에 옮기지는 않는다. (내 평소의 생각: 돌에는 한번 새기기는 어렵지만 한번 새기면 잘 안지워진다.)
11 분이라는 책이 던져주는 또 다른 교훈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내가 많이 사랑한 이 여자에게 축복을." 이라고 말하는 화가 랄프(개인적으로는 그녀가 선택하는 것이 음악가인 테렌스가 아니고 화가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와 마리아는 단 11 분이라도 한 남자와 한 여자에게 영원이라는 것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것, 바로 그것이다.
이 역시 내가 좋아하는 교훈으로 영원이라는 것은 결코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참고로 제목 11 분은 성교의 평균 지속 시간이라고 저자가 생각하고 있는 시간의 길이이며 다른 저자의 주장으로는 더 짧은 7 분이라고 한다.
이번에도 먼저와 같은 방식의 리스트를 제공하면서 글을 끝내고자 하며 이외에도 기억해 두고 싶은 페이지가 많이 있지만 지면의 분량 때문에 생략한다.
다만 마리아가 처녀성을 회복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사기 전날의 일기는 내용이 길어 이곳에 옮기지는 못하지만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해 드린다.
사랑의 소유 방식을 멋진 날개를 가진 아름다운 새에 빗대어 한 이야기이다.
1. 그녀는 또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랑은 상대의 존재보다는 부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와 함께 있을 때 보다 혼자 있을 때 사랑은 증폭되었다.
2. 어떤 작가는 시간은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지혜 역시 그렇다고, 한 존재를 변하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사랑 뿐이라고 썼다. 바보 같은 소리! 그 작가는 동전의 한면 밖에 보지 못했다.
물론 사랑은 한 인간의 삶을 눈깜작할 사이에 180 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하지만 동전의 다른 이면, 또 다른 감정 역시 인간 존재로 하여금 그가 가고자 했던 방향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절망이다. 그렇다 사랑은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망은 훨씬 신속하게 그 일을 해치운다.
3. 인간은 갈증은 일주일을, 허기는 이주일을 참을 수 있고 집없이 몇년을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외로움은 참아 낼 수 없다. 그것은 최악의 고문, 최악의 고통이다.
4. 나는 사랑했던 남자들을 잃었을 때 상처를 받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오늘, 나는 확신한다. 어느 누구도 타인을 소유할 수 없으므로 누가 누구를 잃을 수는 없다는 것을.
진정한 자유를 경험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소유하지 않은 채 가지는 것.
5. 그 돌은 정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전격적인 만남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도 있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정열은 예기치 못한 것이 가져다 주는 흥분, 열렬히 행위하고픈 욕망, 꿈을 실현시킬 수 있으리라는 확신 속에도 있다. 정열은 삶을 인도하는 신호들을 보낸다. 그 신호들을 해독하느냐 마느냐는 나 자신에게 달렸다.
6. 열정에 사로 잡힌 사람들은 평화롭게 먹고 자고, 일할 수 없다. 열정은 과거에 속하는 것들을 모두 파괴해 버린다. 사람들이 열정을 두려워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자신의 세계가 와해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여 위협을 통제하고, 이미 먼지로 변해버린 구조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낡아 버린 것의 기술자들이다.
7. "나에겐 당신이 필요하오. 마리아, 당신이 날 믿지 못한다 해도, 내가 이말로 당신을 유혹하려 한다고 생각해도, 당신에게 빛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예요. ' 왜 하필이면 나죠 ? 내게 뭐 그리 특별한 게 있죠 ?' 라고 묻지 말아요. 내가 나 자신에게 설명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당신에겐 전혀 특별한 것이 없으니까. 그러나 어쨌건 난 당신 외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요. 삶의 비의란 바로 이런 것일 거요"
8.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산다. 욕망이 그의 보물이다. 그것이 상대방을 멀어지게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사랑하는 사람을 다가오게 만든다. 욕망은 내 영혼이 선택한, 너무나 강렬해서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전염될 수 있는 마음의 동요이다.
9. "당신은 어제 고통을 느꼈고, 그것이 당신을 쾌락으로 이끈다는 것을 깨달았소. 당신은 오늘 다시 아픔을 느꼈고 평화를 찾았소. 그래서 내가 당부하는 거예요. 아픔은 쉽사리 중독되는 강력한 마약이니 그것에 습관을 들이지 말라고. 그것은 우리의 일상 속에, 감추어진 고통 속에, 우리의 체념 속에, 그리고 우리가 흔히 사랑 탓으로 돌리는 탓에 우리 꿈의 와해 속에 있어요. 아픔은 본 모습을 드러 낼 때는 무섭지만, 희생과 체념으로 또는 비겁함으로 치장을 하면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이오."
10. 세상의 모든 언어에는 똑 같은 속담이 존재합니다.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도 느끼지 못한다는 속담이죠. 그런데 전 전혀 그렇지가 않다고 감히 단정합니다. 우리가 억누르려고 잊어 버리려고 하는 감정들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마음에는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