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 갈수록 어떤 인물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발자취를 더듬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요즘도 많은 예술인들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경우가 많은 데 과거에도 화가 중에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도 많았던 모양입니다.
벨라스케스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굵직한 행적 외에는 개인적인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는 용의 눈에 점을 찍듯 화가들이 뿌듯해하면서 작품에 남기는 서명이나 날짜조차도 기록하지 않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다작이 아니기는 했지만 자필 서명이 들어 있는 작품은 현재까지 150 점 정도 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벨라스케스는 수수께끼처럼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화가입니다.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는 금언처럼 사실 예술가에게도 개인적인 발자취는 작품의 해석과 평가에 왜곡을 초래할 수도 있어서 어떤 점에서는 그 사람의 인간적 행적을 모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평가자 입장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감상자 입장에서도 그 작품의 주인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가 없습니다.
나찌의 히틀러가 그림을 그린 미술학도 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데 그의 인간적 면모를 별개로 놓고 보면 히틀러가 그린 그림도 그다지 손색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앞으로도 히틀러의 행적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이상 그의 그림의 작품성이 아무리 높다하더라도 명작으로 대우 받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렇게 그림을 그린 화가는 가도 그림과 함께 오래도록 살아 남아서 그림의 배경과 느낌과 의미를 생생하게 전달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에 대하여는 그의 알려진 행적을 살펴 보면 오히려 예술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나오나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 주변을 기웃거릴 수 있으면 세속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의 펠리페 4세의 궁정 화가가 되어 평생 왕의 예우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궁정의 요직까지 맡아서 평온한 생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인노켄티우스Ⅹ세와의 인연으로 몇년간 이탈리아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에도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다고 합니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 기간 동안 이탈리아 상류사회에 속한 어떤 여인과 깊은 내연의 관계를 유지해서 그 여인으로부터는 사내아이까지 얻었다고 합니다.
이런 점들을 보면 그는 미술가 중 세속적으로는 가장 평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궁중 화가로써 부와 명예와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까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외형적인 행복의 조건을 많이 가진 그가 어떻게 인생의 고통을 위무해 준다고 하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지 하는 점에서 의외입니다.
그렇게 보면 꼭 인간적인 고통과 갈등이나 번민 만이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모티브가 되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벨라스케스에게는 작품 활동이 안에 쌓인 내적 갈등을 토해내는 분출구라기 보다는 펠리페 왕과 그 주변의 인물을 그리면서 기쁨을 얻는 일종의 유희였거나 아니면 생활을 위한 방편의 하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후대까지 살아 남는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뛰어난 개인적 역량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놀라운 업적은 선천적으로 물려 받은 재능 때문이거나 아니면 후천적으로 쏟아 부은 엄청난 노력의 결과물 중 하나입니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물려 받은 재능과 후천적인 노력 중 어떤 것이 인간의 성품과 향후 인생의 모습을 더 많이 좌우하는가 하는 데 대하여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오직 후천적인 학습만이 중요하다고 하는 왓슨의 행동주의와 타고난 유전적 요인에 의해 인간의 성장과 발달이 좌우된다고 하는 게젤이라는 학자의 성숙주의 이론은 지금도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예술적인 영역에서만큼은 천부적인 재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많은 예술가 들의 삶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전에 모짜르트와 살리에르를 다룬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살리에르는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모짜르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물려 받지 못한 재능에 때문에 상당히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벨라스케스는 아마도 선천적인 재능이 매우 뛰어난 화가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10 대에 뛰어난 기교를 갖춘 화가로 인정을 받으면서 18 세에는 독립된 화가로 활동하고 24 세에 궁중의 수석화가가 되어 남은 생애 동안 국왕의 전담 궁정 화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국왕은 그가 그린 초상화만을 좋아해서 그만이 국왕의 초상화를 그릴 자격이 있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그의 그림의 특징을 말하자면 그는 모든 것을 다 그리기 보다 특징적인 것을 포착하여 그림으로써 나머지 부분은 생략하는 여유를 두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모든 것을 자연 속에서 구하라"는 스승의 말을 좌우명처럼 간직한 그는 자연이 보여 주는 그대로를 묘사하려고 애썼으며 인물을 그릴 때도 특별히 가식을 가하거나 치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삶이 고단한 민중들을 그릴 때나 부유한 왕족들을 그릴 때나 차이가 없이 담담한 필치로 묘사했던 것은 그런 철학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한 그는 그림에서 선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오직 빛이 내리 쪼이는 면과 색채 만을 이용하여 유동적인 모습으로 사물의 형체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 대해 동시대의 안토니오 팔로미는 "이를 가까이서 보는 사람은 무언지 알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약간 거리를 두고 보면 기적처럼 형체가 나타난다."라고 쓰고 있다.
이 때문에 그가 나중에 태동하는 인상주의의 토대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자화상은 아래 첫번째 작품 "시녀들"의 좌측 구석에도 있지만 그것은 여러 사람들의 모습과 함께 있는 것이고 그 아래에 보이는 자화상이 그만이 단독으로 자신의 당당함을 과시하는 것 같은 작품입니다.
참고로 "시녀들"은 피카소가 44 번이나 모사했다는 그의 대표작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