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미리 말해 둘게 있어.
내가 먹을 음식에 버터는 들어가지 않겠지 ?
식탁에 꽃은 없어야 하고, 식사는 정확히 일곱시 반에 시작되야 하네.
식사할 때 고양이를 곁에 두지 않는다고 했던가 ? 난 개를 데려 오는 것도 싫다네.
손님 중에 여자들이 끼어 있다면 향수를 뿌리지 말라고 미리 주의를 주게. 구운 빵에서 나는 좋은 냄새가 향수와 섞이면 얼마나 참기 어려운지 자네도 알거야.
아 조명은 아주 어두웠으면 하네. 자네도 알겠지만 내 눈은 썩 좋지 않거든."
드가는 아주 괴퍅한 화가로 알려져 있는데 저녁 식사에 초대한 친구에게 했다는 위의 말만 보아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에드가 드가는 프랑스 파리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3 살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받기 위해 19세에 법대에 들어갔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21 세때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인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하지만 두 학기를 채 끝내지 못하고 그만두고 맙니다.
30 대부터는 모네처럼 눈이 나빠지기 시작하여 생애 말년에는 거의 실명에 이르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맹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하면서 나중에는 조각 작품의 제작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말년에 그는 파리의 샹제리제 거리를 걸으며 전에 살던 허물어진 집 주위를 걸어 다니면서 쓸쓸한 시절을 보냅니다. 그리고 83 세에 길고 고요한 생을 마감합니다.
드가는 대표적 인상파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몇가지 점에서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는 구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 것과는 다르게 그는 거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야외에서의 태양 빛의 순간 순간의 변화를 좇는 이들을 아주 무시하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는 야외에서의 풍경 대신 많은 인물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린 인물은 초상화처럼 멈추어 있는 인물이 아니라 흡사 사진기를 이용해 찍은 스냅 사진처럼 어떤 한 순간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가 수많은 파스텔화를 남긴 것은 아마 파스텔이 가진 부드러운 색감도 이유겠지만 그런 순간의 움직임을 속도감 있게 표현하기 위해서 파스텔이 가장 적절한 재료이기 때문이어서 일 것입니다.
또한 그 당시 흔히 쓰이지 않는 구도 이를테면 위를 올려다 보는 구도라든가 인물의 일부가 잘리는 구도 등을 과감하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그림이 그의 괴퍅한 성격과 더불어 세인들에게 그를 상당히 특이한 화가로 보이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무희나 목욕하는 여인 등 많은 여인의 모습을 그렸지만 그 자신은 여인과 꽃과 아이를 싫어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들은 페미니스트 평론가들의 질타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가 그린 그림 속의 여성들이 직업 여성이라는 점도 있고 또 하나는 그의 그림들이 무시 내지는 냉소라는 묘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린 여인들이 주로 창녀나 무희 등 사회의 다소 어두운 구석에 있는 여인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 시기의 파리에서는 물이 귀해 사람들이 목욕을 많이 하지 못했지만 창녀들에게는 하루 한번의 목욕이 의무였다고 하니까 그가 그린 목욕하는 여인들은 거의 직업 여성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생 독신으로 산 드가에게 대해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여자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드가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지 여자를 아주 사랑한 화가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랑한다의 반대가 미워하는 것이 아니며 증오도 사랑의 한 모습이라는 말이 있듯이 언뜻 보기에 그가 여자를 무시하고 증오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여자에게 다가가고 싶었으나 제대로 되지 않는 강한 자의식 때문이었을 뿐입니다.
정말 여자를 사랑하지 않으면 도저히 그와 같은 많은 그림들을 남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사랑하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든 다른 이유 때문으로든 바라 보는 것조차가 고통일 테니까요.
다만 그가 남자든 여자든 인물에게서 본 것은 황홀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산다는 것의 덧없음 혹은 평범함이었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불러 일으켰을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르노아르의 무희는 화려한 예술가로서의 무희라면 드가의 무희는 가난한 노동자로서의 무희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담고자 했던 것은 무희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살아 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새로울 것 없이 나태한 그저 그런 일상의 모습입니다.
그의 그림은 인물의 표정을 섬세하게 묘사하지 않고 일부러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렸지만 그럼에도 쓸쓸하고 왠지 처량해 보이는 것은 그가 사용한 파스텔화의 색조 때문 만이 아니라 그가 가진 생을 관조하는 방식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모딜리아니처럼 여인의 모습을 많이 그렸던 다른 화가들이 여인들과의 스캔들로 시끄러웠던 것과 다르게 그는 조엘이라고 하는 하녀의 시중을 받으면서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홀로 사랑하는 여인도 없이 살가운 가족도 없이 80 여년의 긴 인생을 살면서 그는 산다는 것의 권태스러움을 절절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가 목욕하는 여인처럼 열쇠 구멍으로 몰래 들여다 본다는 의미에서 핍홀 그림이라고 하는 그림을 다수 남기게 된 것도 그런 삶의 권태를 이기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는 프로페셔널리스트라고 하는 전문가의 모습에 걸맞게 자기의 직업과 자기의 작품에 있어서 한치의 소홀함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한가지 일을 열번이고 백번이고 반복해서라도 작품 속에서 들어가는 대상들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애썼으며 그가 그린 어느 것 하나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영감이 떠오를 때는 자기 그림을 과감히 파괴하기도 했는데 어느 미국인 수집가가 그의 그림을 아주 비싸게 사고자 했으나 그는 자기의 그림이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만으로 그림 속 인물을 물감으로 지워 버리거나 조각을 뭉개 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도 거역하기 어려운 돈의 유혹 혹은 편한 삶의 유혹을 떨쳐 버리면서 그는 "누가 나한테 금을 양동이로 가져다 준다 해도 내 작품을 파괴하고 재창조하는 즐거움과 맞바꾸지 않을 걸세."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점이 외로운 삶을 살았지만 드가의 삶이 초라하지 않은 이유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