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좀 울적하고 외로울 때는 가끔 의과대학의 예과때 잠시 활동했던 미술반 동아리의 한 선배 생각이 납니다.
사실 선배라고는 하지만 내가 이제 예과에 막 들어간 1학년일 때 그 선배는 간호과 2학년이었으니 나이는 엇비슷했을 것입니다.

당시 미술반은 학생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어 예과 1학년은 나 혼자 뿐이고 다들 선배들뿐이라 나는 방과 후에 동아리 방에서 혼자 외톨이로 그림을 그리다 오곤 했습니다.
무뚝뚝하고 말도 별로 없고 인상도 그리 좋지 않은 후배에게 선배들이 그리 살갑게 대하지는 않아서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간호과 선배가 가끔 생각나는 것은 유일하게 내게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내게 사탕도 건네주고 주말이면 싸온 김밥 도시락도 함께 먹자고 하고 간혹 야외 스케치라도 가는 날이면 꼭 같이 가자고 내 팔목을 끌곤 해서 숫기가 없었던 나는 조금 당황하고 얼굴이 화끈 거리기도 했지만 그리 싫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선배가 내게 별 다른 감정이 있어서는 아니었을 것이고 혼자 있는 1학년 후배를 동정하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사건도 없고 마음을 주고 받은 것도 없지만 워낙 살가운 정을 느끼면서 살아 보지 못한 인생이라서인지 당시에는 혼자 마음에 터무니없게도 이 선배가 나를 좋아하나 하는 착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얼굴이 상당히 희었다는 것 밖에는 지금은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언제부터인가는 미술반에 갈때마다 오늘도 그 선배가 있을까 하고 약간은 설레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그 선배가 가끔 생각나는 것은 내게 여러모로 마음을 더 많이 써 주었던 유일한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아마도 내 착각일 가능성이 높지만, 착각이 깨어지기 전에 못 보게 되었으니 혼자서 착각할 수 있는 덤도 얻었습니다.
나는 그 때를 제외하고는 여지껏 살아 오면서 동성이고 이성이고 불문하고 내가 상대에게 더 마음을 주고 먼저 다가 갔었던 기억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준 만큼 받지 못해 서운해 하고 마음의 상처를 받은 채 돌아서야 해서 괴로운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우울하고 외로울 때는 흡사 첫사랑을 기억하듯 그 선배를 기억합니다.
미술반 동아리 방의 테레핀 냄새가 자욱한 곳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던 외로운  나날들 사이에 희미하지만 조금은 분홍빛 색깔이 묻은 날들이 서너개쯤 떠오릅니다.

사랑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고 그저 마음이 좀 따스했던 어느 선배가 후배를 아꼈던 마음일 뿐이겠지만 그런 따스한 마음이 지금와서 내게 조그마한 위로라도 되는 것은 다행입니다.
한번 지나간 날은 다시 오지 않고 그 선배를 우연히라도 만날 일이 없겠지만, 아니 만나더라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스치고 지나가겠지만 혹시라도 만나게 된다면 말해주고 싶습니다.
외롭고 쓸쓸하고 추웠던 시절에 나를 따스하게 대해 주어 고마웠다고, 그리고 살면서 조금 외롭고 힘든 요즘 같은 날에 약간이라도 위로를 삼을 수 있는 추억을 가지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말입니다.

짧은 동아리 활동이라 남긴 작품도 거의 없지만 의대 서화전에 출품했던 바이올린 그림이 남아 있었다면 그때를 기억하기 더 좋았을텐데 남아있지를 않아 아쉽네요.
대신 당시 제가 그린 그림과 느낌이 비슷한 그림을 웹에서 한점 찾아 올려 봅니다.
MICHAEL NAPLES라는 화가의 "Violin Detail"이라는 작품입니다.

#2 심상덕 등록시간 2013-09-25 18:04 |이 글쓴이 글만 보기
동네주민 2013-09-25 18:02
그래도 추억할게 있다는건 좋은거죠 ^^
저는 디자인계열이라 테레핀 냄새는 고등학교 미술학원 시절 이후  ...

저도 간혹 테레핀 냄새가 나면 그때 생각이 납니다.
그리 좋은 냄새 같지는 않은데 이젠 그 냄새도 그립군요.
그리고 미술반 동아리는 1학년때까지만 하고 그만두었습니다.
왜 그만 두었는지 하는 이유도 있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 이 모임방에다 쓰겠습니다.
뭐 별로 대단한 에피소드는 아니지만.

얼굴 하얀 그 선배는 그 뒤 한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만나도 못 알아 볼 것 같기는 합니다만.
제 인상이 특이하고 제가 얼마전까지 낙태 문제로 간혹 방송에 얼굴을 비쳐서 상대방들은 저를 알아 보기 어렵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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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eeun [2018-05-16 03:09]  
#3 hanalakoo 등록시간 2018-05-14 08:39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예전 글 읽고 있는데 어머 역시나 원장님 그림도 그리셨군요~ 예술가 맞네요!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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