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저녁은 병원 주방에서 먹는다. 진통 산모가 없어 한가로운 날, 때때로 이 주위 음식점에서 혼자 외식을 한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리브로 서점이나 예스24 중고 서점, 혹은  모닝글로리 문구점에 자주 들른다. 서교동 쪽에 새로 영풍문고도 생겼고 조금 떨어져 합정동에 교보문고도 생겼지만 영풍문고는 너무 볼거리가 없고 매장도 협소하여서, 교보문고는 거리가 멀어서 자주 가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면 자주 가는 곳이 주로 서점이나 문구를 다루는 곳들이다. 서점이나 문구가 아니면서 이 근처 매장 중에 궁금한 곳은 두집 정도 있다. 한곳은 스피커나 앰프 등을 파는 음향 가게고 다른 한곳은 필라멘트 램프를  파는 곳이다. 얼마전에 음악 듣는 것이 취미인 남동생이 이곳으로 놀러 왔을 때 스피커와 앰프 가게에 들어가 보았다. 가격이 어마어마해서 역시 음악은 돈 많은 사람들의 취미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음악 쪽으로는 소질도 없고  관심도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다른 한 집인 램프 가게는 막내딸이 관심을 보인 차에 큰맘 먹고 한번 들어가 보았다. 요즘 막내 딸이 병원 입원실 하나를 차지하고 기거하기 때문에 함께 저녁 먹으러 나가는 날이 종종 있다. 오늘도 외식하고 들어 오다 우연히 램프 가게를 지나게 되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큰 맘 먹고 들어가 보기로 했다. 가게 구경하는데 무슨 큰 맘이 필요하냐고 할 지도 모르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새로운 가게에 들어 가기보다는 한번이라도 가 보았던 가게만 이용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보수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그래서 하는 말인가 보다. 어느 동물학자는 그런 성향을 실험으로 입증한 바도 있다. 원숭이 우리에 생전 처음 보는 먹이감을 던져 주고 한참을 관찰했더니 어린 암컷 원숭이가 가장 먼저 먹이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다고 한다. 그 후에 어린 수컷 원숭이가 다가가고 그 다음에 어미 원숭이가 다가가서 음식의 맛을  보았다고 한다. 아빠 원숭이는 가장 늦게 먹이에 다가가서 살펴 보고 먹었다고 하는데 먹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 대한 수용은 암컷보다 수컷이, 어린 개체보다 나이든 개체가 더 늦다고 한다. 아마도 새로운 것이 위험한 것일 경우 전체 가족이나 부족이 치명적 위협에 처할 수 있어 종족을 보호하는 책임이 가장 큰  어른 수컷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고 생물학자들은 말한다.





여하튼 그렇게 딸을 구실로 램프 가게 구경을 하려고 입구에 들어 서면서 "요 앞에 있는 램프 값 얼마인가요?" 하고 물어 보았다. 딸넴이 램프 가격이 싸면 하나 가지고 싶다고 해서였다.  그러나 주인의 답변은 전혀 예상 못한 것이었다. "입구에 써 놓았는데 인사부터 하고 들어 오시죠." 하는 것이었다. ㅠㅠ. 도로 나가기도 뻘쭘하고 해서 "안녕하세요. 들어가도 될까요? 램프가 멋있어서 그러는데 혹시 가격 좀 알 수 있을까요?" 하고 여쭈어 보았다. 주인의 말이 순간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사실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하여 예의를 갖추고 문의를 하였다. 그제서야 가게 주인이 "워낙 무례하게 구는 사람이 많아서 기본 예의를 지키자고 하는 취지로 그렇게 말씀 드린 것인데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고 대답을 한다. 그리고 보니 문 앞에 써 놓은 말이 괜한 것이 아니고 주인 입장에서는 심사숙고하여 적은 안내문이었던 모양이다.



오늘 외래로 질 가려움증 때문이라고 하며 젊은 여성이 진료를 받으러 왔다. 편의를 위해 진료 받으러 온 분을 A분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진찰을 해 보고 기본 검사인 균검사를 하여 검사를 보내고 필요하면 항생제등 약을 써 보자고 하였다.  A분은 대뜸 검사는 필요 없으니 하지 말고 그냥 처방전만 적어 달라고 한다. 그래서 검사를 보내려고 채취한 슬라이드 검체는 쓰레기 통에 버렸다. 그리고 나서 항생제는 함부로 쓰면 내성이 생기고 원인에 맞게 써야 하니까 검사를 먼저 해 보아야 한다고 말하니 그렇지 않아도 내성이 생길까 걱정이라며 항생제는 됐고 질정만 몇알 처방해 달라고 병원에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질정도 질염의 종류별로 쓰는 약이 다르며 질염의 종류와 치료가 제각각이라는 점을  종이에 이것저것 메모해 가면서 설명을 드렸다.  A분은 내 설명 도중 말을 끊으면서 자기가 바빠서  설명 들을 여유가 없으니 그냥 처방전만 써주면 안되냐고 한다. 그래서  균검사는 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따로 추가의 비용이 들지 않으며 검사 결과의 확인도 방문하지 않고 문자로 연락이 가며 연락 받은 결과를 바탕으로  이리 오시던 가까운 병원 가서든 항생제든 질정으로든 치료를 받으시면 된다고 말씀드렸다. 검사 비용이 따로 들지 않고 결과를 듣기 위해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그럼 검사를 보내 달라고 한다. 그래서 쓰레기통을 뒤져 다시 슬라이드를 꺼내서 검사를 보내기로 하였다. 아마도 검사 비용으로 많은 액수를 청구하는 상황이 될까봐 지레 안하겠다고 한 것 아닌가 싶었다. 사실 요즘 산부인과 경영이 어렵다 보니 환자의 사전 동의도 구하지 않고 많은 비용이 드는 검사를 시행하는 곳이 많다고 들었다. 약을 오남용하지 말자는 말을 한동안 강조하였는데 이제는 검사도 오남용하지 말자고 캠페인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저간의 사정 때문에 그렇게 A분이 과잉 반응을 한 것이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치료 관련하여서는 나중에 직원에게 들어 보니 요즘 여성들이 질염 증상이 있으면 인터넷에서 불법으로 질정을 사서 넣는다고 한다. 병원 오기는 귀찮기도 하고 시간도 없는데다가 질염을 가볍게 생각하고 그런 식의 대응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다만 그렇게 구입하면 일이십정에 몇만원씩 비용이 많이 드는데 질정 처방만 받으면 몇천원이면 되기 때문에 비용 절감 목적으로 검사는 하지 않고  처방전만 받을 목적으로 병원에 오는 얌체 같은 사람들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램프 가게 주인의 이야기를 듣다 말고 낮에 있었던 질염 환자 생각이 난 것은 내가 한 행동과 A분이 한 행동이 그리 다른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병원이든 램프 가게든 음식점이든 돈을 주면 내가 할 도리는 다한 것이니 내 요구대로 군말없이 해 주기를 바라지만 어쩌면 그런 행동은 상당히 무례하고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래를 위해 주고 받는 돈은 그 물건 혹은 수고에 대한 최소한의 댓가일 뿐이다. 그 최소한 외에 기본적인 인사나 예의 표시가 없다고 해서 항의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만일 그런 기본적인 예의 갖춤이 더해진다면 우리가 사는 이곳이 조금은 더 훈훈한 세상이 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들어가 램프도 구경하고 딸넴이 마음에 든다는 램프도 하나 샀다. 가게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게 입구에 간판도 없는 이유를 물어 보니 제품이 중요하지 간판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그래도 가게 이름은 있을 거 아니냐고 했더니 자기가 외국에서 배울 때 아이디가 엘이라 램프와 엘을 붙여 렘펠 디자인이라고 지었다고 하면서 구석에 처밖혀 있던 아크릴 판을 꺼내 보여 준다.



램프는 사실 기성품이며 램프를 꽂는 그릇을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어서 판매하는 것이라고 한다. 원래 전공은 공대를 나왔는데 기계적인 부분과  예술적인 부분을 더해서 이런 저런 물건을 만들어서 판매도 하고 비치하기도 한다고 알려 주었다.  주인의 이야기도 듣고 가게도 천천히 둘러 보니 아닌게 아니라 필라멘트 램프뿐 아니라 여러가지 특색있는 소품들이 많았다.  매장 사진 좀 찍어도 되겠는가 정중히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다른 분들도 관심을 가져 보시라는 의미로 우리 병원 홈피에도 올리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물론 램프 가격은 3만원대부터 5만원대 정도로 아주 저렴하다고 하기는 어렵고 전기도 요즘 유행하는 LED에 비하여는 많이 먹는다. 그러나 필라멘트 전구가 단순히 불을 밝히는 기능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고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혀 주는 감성적 측면에서 도움이 되기도 하니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만한 값어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돌아 나오면서 가게 주인장의 그런 철학이 기분 나쁘게 받아 들여지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팔리기를 바랬다. 그래서 가게도 날로 성업하면 좋겠다. 그 가게 주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까칠한 의사로서 아직도 성업에서 한참 먼 상황을 헤메이다 보니 약간 걱정이 되었다. 어느 소설가의 말대로 밥벌이는 누군들 치열하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자신의 철학이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하루 하루  먹고 사는 문제로 평생을 허덕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혹시 관심 있으신 분은 한번 들러 보시기 바란다. 대신 주인장의 공손한 응대를 기대한다면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인사를 정중하게 하는 것은 잊지 마셔야 한다. 위치는 아래 약도를 참고 하시면 되는데 가게 이름을 쓴 간판은 없지만 옆에 옛날 버스가 한대 서 있으니 찾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버스도 가게 주인장께서 가져다 놓으신 소품이다.^^




댓글

저도 프랑스 여행갔을 때 영어도 짧고 그래서 용건부터 이야기 했다가 혼난 기억이 있어요 ㅋㅋㅋ 프랑스 아줌마였는데 인사는 하고 용건을 말하라고 해서...그때는 뭐야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부끄러워지더라구요^^  등록시간 2017-11-11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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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eeun [2017-11-28 22:21]  daphne [2017-11-13 07:36]  zoomooni [2017-11-11 01:32]  화징이맘 [2017-11-10 18:58]  podragon [2017-11-09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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