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밤늦도록 공부하다 좀이 쑤시고 지겨울 때는 집에서 멀지 않은 중랑천 둑방길을 걸었다. 그 길은 지금은 단장되어 벤취도 있고 가로수도 있는 깔끔한 산책로가 되었지만  40년 전 내가 걷던 그 때는 둑길의 양 옆으로 루핑 지붕을 한 허름한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이 살림집이고 중간 중간 음식을 파는 집도 있고 이발소도 있고 구멍 가게도 있어 요즘 식으로 말하면 주상 복합 거리였다. 둑방길은 원래도 그리 넓지 않은데  양 옆으로 집들이 늘어서다 보니 사람이 걷는 공간은 비좁았다. 집집마다 제대로 된 화장실이 따로 없이 집에서 나오는 하수와 오수는 중랑천으로 그대로 쏫아 냈기 때문에 둑방길은 악취가 많이 나는 편이었다. 우리 집에서부터 둑방길이 끝나는 곳까지는 그리 멀지 않아서 보통 왕복 한시간에서 한시간 반 정도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가끔 무료한 밤이면 병원 근처의 경의선 책거리를 걷는다. 이 길은 짧아서 왕복 30 분이 채 안 걸린다. 길도 넓고 단장도 잘되어 있어 학창 시절에 걷던 중랑천 둑길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책거리 길은 차도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고 나무는 별로 없지만 공기도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다. 오래전 걷던 중랑천 둑방길에 진하게 배어 있던 구릿구릿한 냄새도 물론 없다. 그러나 지금 걷는 책거리 길에는 이상하게도 학창 시절에 걸었던 중랑천 둑방길이 주는 위안과 평안이 없다. 콩물에 간수를 넣으면 덩어리가 엉겨 두부가 되듯이 한두시간의 중랑천 길 걷기는 마음 속의 고민과 갈등 혹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엉기게 하여 마음 저 깊은 곳으로 가라 앉혀 주는 효과가 있었다. 책거리 길이 깨끗하고 조용한 길이기 때문에 그런 위안을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아마도 둑방길에 사는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 살아가는 현장의 절절한 모습이 그때 그곳애는 있었고 지금 이곳에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걸어볼만한 중랑천 둑방길도 없고 어릴 때 뛰놀던 골목길도 없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찾아갈 고향도 따로 없지만 그나마 태어나고 자란 골목길도 달동네 정화 사업으로 사라져 지금은 공원이 되었다.  

세월이 간다는 것은 얼굴에 주름이 잡히고 뱃살이 나오고 기력과 의욕이 떨어지는 것인줄만 알았더니 내 주변의 것들이 사라지거나 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13년 전에 왔을 때 비하여 이곳도 많이 변했다. 나이가 들어 나도 꼰대가 되어 가는 탓인지 변하는 것들은 대체로 마음에 드는 쪽이기보다는 안 드는 쪽의 것이 많다. 지금보다는 13년전의 동교동 거리가 더 정이 가고 마음에 들었는데 지금은 너무 번잡스럽고 시끄럽고 더럽다. 어쩌다 보니 능력이 모자라  1년 365일 24시간을 주구장창 병원에서 죽치고 지내게 된 탓에 보고 걷고 느끼게 되는 곳이 이곳 뿐인데 이런 변화가 앞으로 더 심해질 것 같아서 걱정이다. 거리고 사람이고 가능하면 오래도록 비슷한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 마음 같지가 않다. 10년 전 아내가 말이 좋아 안검 하수 수술이지 소위 말하는 쌍꺼풀 수술을 할 때는 그나마 내게 사전에 통보라도 해 주더니 얼마전 눈썹 문신 시술은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떡하니 하고 나타났다. 내가 보기에는 눈꺼풀이고 눈썹이고 원래의 모습이 더 나았는데....난 쌍꺼풀도 없고 눈썹도 갈매기가 아닌 여자와 결혼했는데 왜 바꾸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제 자기 얼굴을 주로 봐주는 사람은 내가 아니고 친구거나 동창이거나 하다 못해 거리를 걷는 이름 모르는 사람이어서일까?
의학기술이 더 발달해서 영화에 나오듯 쉽게 페이스오프가 되는 세상이 올까봐 겁난다. 어느날 갑자기 목소리는 익숙하지만 처음 보는 얼굴의 중년 여자가 찾아와 여보하고 부를까 봐서 말이다.  바꾸어서 좋은 것들도 있고 바꾸든 안 바꾸든 별 차이 없는 것도 있고 바꾸지 않아야 좋은 것들이 있다. 그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오래전 걷던 길도 그대로였으면 좋겠고, 아내의 얼굴도 자연이 주는 서서한 변화 말고는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내 얼굴이 아니니 내 마음대로 이래라 저래라 못하고 내가 독점하는 길이 아니니 제발 뒤집어 파헤치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고 주장하지도 못한다. 마음에 안 드는 변화들이 오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것은 어떤 능력으로 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고 살고 싶어 돈을 번다는 사람처럼 그것도 돈이 있으면 해결이 되는 일일까?

가수 박인희가 부른 노래를 오랜만에 들어 본다. "세월이 가면"이라는 곡인데 1976년도에 나온 곡이다. 내가 고등학생때이고 이 곡을 들으시는 분들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인 분들이 많을테니 아마도 아시는 분들이 별로 없을 듯 싶다.


sewol.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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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p15 [2019-10-15 18:45]  satieeun [2018-04-27 13:07]  daphne [2018-04-21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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