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 중에는 "진주 귀걸이 소녀"를 그린 베르메르처럼 평생에 걸쳐 17 점 정도로 소수의 작품만을 남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클레처럼 굉장히 많은 수의 작품을 내놓은 화가들이 있습니다.
파울 클레는 21세에 뮌헨 미술 학교에 입학한 이래 61세로 운명할 때까지 무려 9,146점이란 엄청난 수의 작품을 생산해 냈다고 합니다.
물론 작품 활동을 한 기간이 40 년 가까이나 되는 긴 기간인 점이 이유일 수 있으나 40 세까지는 유화를 그리지 않고 소묘나 유리 채색화를 주로 그렸고 많은 작품들이 나치스에 의해 "퇴폐 예술"로 낙인 찍히고 유태인으로 쫓기면서 또한 신병으로 고생하는 말년에 남겨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꼭 기간의 길이가 작품의 수를 좌우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적 행위는 존재의 목적"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이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열정의 재료라면 그에게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갈증이 말년에 더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은 꼭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렘브란트 등 역경 가운데 빛을 발한 많은 화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기도 합니다.
젊고 활동적이며 인생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시기도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데 부적당한 것은 아니지만 말년에 인생의 쓴 맛을 충분히 느꼈을 때 후대까지 살아 남는 작품이 탄생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어쩌면 예술 작품의 본질이 그런 것에 더 가깝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은 수학적인 정리들은 대개 수학자들이 20 대 초반 이전에 발표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미술이든 음악이든 예술 작품들은 수학처럼 순간의 영감에 의하여 드러나는 것이라기 보다는 지층처럼 쌓이고 쌓인 삶의 더깨가 더 이상 안에 갖혀 있기 어려워 그 껍질을 깨고 밖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속살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다른 많은 천재 미술가들이 순간적인 영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에게 그림이란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는 대상이며 미술은 인생을 극복하는 도구로서의 예술로 바라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현대 추상미술의 대가로 불리는 그가 택한 오브제들은 새나 물고기와 같은 자연적인 것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영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천사도 많이 그렸는 데 총 50 점 정도 된다고 합니다.
물론 말년에 공피증이라는 피부 질환으로 사망하기까지 2 년 정도 기간 동안에 60% 이상을 그린 것이기는 하지만.
여하튼 그가 이런 소재들을 택하게 된 이유나 그가 상상에 의한 환상적인 그림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 그의 할머니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할머니는 동화의 내용을 그림으로 옮겨 클레에게 자주 보여주곤 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그는 그림에 눈뜨기 시작했다고 하는 데 알에서 깨어난 오리가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알고 쫓아 다니는 것처럼 어린 시절에 경험한 강렬한 인상은 한 사람의 감성적인 성향에 큰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그림의 특징으로는 이런 소재의 특이성 외에도 선과 기하학적인 도형을 사용한 것을 꼽습니다.
마티스를 화려한 색채의 마술사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를 선의 화가라고 부르는 데 그는 구체적인 형태보다 오히려 선을 통해서 보다 분명하게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라는 그의 말에 가장 적합한 표현 방식이 그에게는 아마 선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선은 우리에게 동심을 불러 일으키는 가장 쉬운 도구이기도 합니다.
아래 그림 중 첫번째 것은 세네치오라는 작품으로 세네치오는 노란색의 꽃이지만 사실 클레의 자화상입니다.
그리고 화가들의 그림을 거의 모사해 본 경험이 없는 내가 가장 처음 모사해 본 그림이기도 합니다.
그 아래 그림은 생각에 잠겨있는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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