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산부인과 의료 환경의 왜곡된 모습과 부끄러운 의사의 모습을 썼지만 솔직히 저는 지금은 어느 것이 제대로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응암동에 개업하고 있을때 저보다 10년쯤 선배인 어느 선배 의사샘께서 그러더군요.
어느날인가는 비가 와서 환자도 없고 병원 임대료도 주고 직원 월급도 주어야 하는 날은 가까워 오는데 그달의 수입을 맞추지 못해 걱정하고 있다가 마침 접수에서 낙태 수술을 원해서 왔다는 어느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니 그렇게 반갑더라고.
그런 반가운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 스스로 당황했다고 합니다.
낙태를 위해서 오면 의사로서 낙태의 여러 위험에 대하여 설명드리고 가능하면 출산을 하도록 설득할 생각을 하지 않고 우선 적자를 줄일 수 있어 다행이라는 경제적 측면부터 생각하는 자신을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이제 의사 그만할 때가 되었지 싶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의사를 그만두지도 못했다구요.
그래도 그 선배는 순수한 편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낙태는 그저 몸 안의 종양 하나 떼어내는 정도로 생각하는 의사도 많으니까요. 당연히 가책 같은 것도 느끼지 않습니다.
저도 지금은 낙태 수술을 하지 않지만 응암동에 개업하고 있을때나 그 이후로도 오랜 기간 낙태 수술을 했습니다.
경제적 동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고 그것이 여성을 돕는 길이라는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있기도 하여서입니다.
가만 돌아보니 아기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임신 여성의 입장을 돕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지금은 낙태 수술은 일체 하지 않습니다.
응암동 개업하고 일년 쯤인가 지났을 때 낙태를 원해서 온 미혼 여성이 한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찰을 해 보니 계류 유산이 된 상태이더군요.
계류 유산이란 자연유산이 되었지만 아기집이 자궁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소파 수술을 해서 제거 해야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연유산이 되면 대개는 출혈이 있지만 없는 경우도 많고 임신 증상도 난소에서 나오는 호르몬 때문에 일정 기간 그대로 유지되기도 하여 산모들은 유산이 된 것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비교적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산이 된 것을 감추고 산모가 원하던 대로 낙태 수술을 하면 삼사십만원 비용을 받을 수 있고 계류 유산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의료 보험을 적용해 수술을 하면 그 1/10 밖에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계류 유산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고 그냥 일반으로 수술을 할까 하는 생각이 솔직히 들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다 속일 수 있겠지만 저 자신은 속일 수가 없었으니까요.
결국 의사가 자기 자신, 자기 안의 양심을 무서워 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무서워하지 않게 됩니다. 법이든 원칙이든....
그러나 그 이후 중간 중간 경영이 좀 어려워 폐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시절에는 의료보험을 적용하여 계류 유산 소파술을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약간 비겁하지만 일반 수가로라도 받아서 병원을 계속 운영을 하는 것이 아예 망해서 병원 운영을 못하게 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아닐까 하는.....
비단 계류 유산 소파술 뿐 아니라 그와 유사한 상황들은 의료 영역에서 그리 드물지 않습니다.
그럴때마다 유혹과 자기 합리화가 끊임없이 저를 괴롭힙니다.
물론 유혹은 이겨냈습니다.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확신이 없습니다.
제가 응암동에 개업하고 있을 때 3cm 난소 물혹이 있는 환자가 강남에 어느 병원에 갔더니 복강경으로 간단히 제거 할 수 있다고 수술을 권했다고 어떻게 해야 할 지 제게 물으러 왔더군요.
그 병원은 지금은 강남에서 대형병원을 운영하는 대학 선배가 그 전에 하던 병원으로 그 선배도 3cm 전후의 단순 물혹은 대개는 저절로 없어지는 경우가 많아 커지는 지 아닌지 한두달 정도 경과를 지켜보고 필요하면 약물 치료를 시도해 보면 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당시 복강경 수술은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꽤 수입이 되는 편이라 아마 병원 운영을 위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생각하지만 개업의 현실이 그렇다는 것은 씁쓸한 일입니다.
지금 강남에서 C 병원이라는 큰 병원도 처음 병원할 때에는 아주 큰 시기의 태아에 대한 낙태 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불법과 비원칙적인 시술을 많이 해서 지금의 전문 병원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조금의 비겁함으로 병원을 키워 이제는 많은 산모와 불임 환자를 위해 기여를 하고 있으니 어쩌면 망해서 없어져서 일체의 기여를 못하는 것보다 나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야 그렇게 못하지만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인지에 대하여 저는 정말 모르겠고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응암동 병원에는 부모님께서도 자주 오셨는데 아버지는 병원 앞마당을 쓸고 어머니는 산모들의 반찬 거리를 만들어 두시는 등 일손을 도우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개업의 생활 20여년 동안 그때 잠깐이 그래도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제일 안정적인 시기였습니다.
제 인생에 행복한 시절은 없지만 누군가 제게 행복한 때를 쓰라고 하면 그나마 그때가 가장 비슷하니까 그 시절을 쓰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큰 딸 MK는 충암초등학교 다니면서 공부도 곧잘 해서 상장도 많이 받아 오고. 둘째 아들놈도 지금은 멋대가리 없지만 그때는 짱구같이 귀엽고 애교도 있었고.
결국 큰 딸은 저를 실망시키면서 미대를 가고 말았지만......
응암동에 있으면서 특히 기억 나는 것은 셋째 딸을 낳은 것과 디지탈 카메라를 처음 사던 날입니다.
셋째는 제가 꾸었던 돼지 꿈 태몽으로 복권 당첨 대신 온 것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출산하기로 한 것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제가 살면서 잘한 몇 안 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분만도 제가 운영하던 병원에서 직접 제 손으로 받았으니 이전 두 아이의 출산때 일을 핑계로 가보지도 못하였던 미안함을 조금은 덜었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번 깨진 그릇은 다시 붙일 수 없는 것처럼 한번 입은 마음의 상처는 다른 것으로 보상이 되지는 않더군요.
디지탈 카메라는 제가 워낙 그런 방면에 관심이 많았는데 어쩌면 미술 쪽으로 나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서 더 그런 것에 애착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때이기는 했는데 그 무렵 아날로그 카메라가 대세이던 시절 마침 새로이 디지탈 카메라가 등장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물론 요즘도 그렇기는 하지만 성능이 괜찮은 디지탈 카메라는 거의 천문학적 가격이어서 일반인은 감히 꿈도 꾸기 어려웠지만 보급형으로 새로 디지탈 카메라가 출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름신이 왕림하시었습니다.
마음 속으로만 그리워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새 분만을 3건인가 하고 마침 퇴원하는 산모도 두세명인가 있어서 현금 수입이 꽤 괜찮았던 날이 있었습니다.
카메라로 아기 사진도 찍어주고 나도 취미 생활로 활용하면 갑갑한 개업의 생활에 숨통이 좀 트일 것 같다는 둥 온갖 구실을 갖다 대면서 아내를 설득했습니다.
어느 토요일 진료가 끝나자 마자 부리나케 아내와 함께 용산으로 달려갔습니다.
제가 사려고 한 모델은 리코에서 나온 모델로 지금 기준으로 보면 조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당시에는 그것도 70몇만원이라는 거금을 주어야 했습니다.
돈은 제가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가 퇴원비로 받은 돈을 담았던 편지 봉투에서 돈을 꺼내 현금으로 지불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아내가 울더군요.
"아니 왜 그래?"
"이것 안 사면 안되?"
저는 신경질을 내면서 말했습니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왜 이래? 빨랑 돈 내"
"안 사면 안되?"
"안되!! 왜 이래? 쪽팔리게."
"......"
"빨리 돈 내."
"알았어..... 여기 있어"
아내는 차마 봉투에서 돈을 꺼내 가게 주인에게 직접 돈을 주지 못하고 제게 돈이 든 편지봉투를 건내고 가게를 나가서 문 밖에서 혼자 훌쩍 훌쩍 울고 있었습니다.
20년 전인데 70만원이면 여하튼 적지 않은 돈이기는 합니다.
결국 저는 원하던 카메라를 손에 넣기는 했지만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집에 돌아 왔습니다.
분을 삭이지 못하고 집에 와서 이유를 물으면서 왜 사람들 있는 곳에서 그렇게 망신스럽게 하느냐고 다시금 역정을 냈습니다.
아내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당신이 밤새 고생하면서 제대로 잠도 못자 얼굴도 초쵀한 채로 힘들게 번 돈을 너무 쉽게 내어주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나고 화가 나서 그랬다고 합니다.
그 뒤에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 카메라를 정말 약속한 대로 값어치 있게 썼는지 하는 것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카메라를 살 때 돈을 내면서 울던 아내의 그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참 철이 없는 남편이었죠. 지금도 철이 없지만.....
그 이후에도 숱하게 아내의 눈에서 눈물을 짜내었지만 기억을 되돌아 볼 때마다 그때 아내의 눈물보다 더 저를 마음 아프게 하는 눈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응암동에서 하던 산부인과를 폐업하게 만든 어느 산모의 기억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응암동에 개업하여 5년쯤인가 되었을 때 8월 한참 더운 여름이었습니다.
아내는 여름 휴가로 안면도로 아이들과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 저만 홀로 병원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혼자 병원을 운영하던 때라 저는 휴가라고는 원래 가지도 않았는데 그때도 그랬습니다.
이년전인가 첫아기를 난산으로 제가 분만을 도왔던 산모가 둘째를 임신하여 산전 관리를 위해 저희 병원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임신 4개월 무렵 시행하는 트리플 마커라고 하는 기형아 검사를 보건소에서 검사해서 결과지를 가지고 왔더군요.
제가 지금은 어느 정도 욕심도 내려 놓고 초기 산전 검사든 기형아 검사든 할 수 있는 것은 보건소에서 해 오라고 말씀드리지만 그때만 해도 그러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기형아 검사는 당시 2만원인가 3만원 정도로 그리 많은 비용이 드는 검사는 아니었고 보건소에서 해 주는 것도 대부분 산모는 몰랐지만 그 산모는 어찌 알고 보건소에서 검사를 해 왔더군요.
그리고 그런 점으로 하여 저는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습니다.
기형아 검사로 하여 얼마간의 돈을 더 벌 수 있었는데 그것을 놓쳤기 때문이라기 보다 얼마 되지도 않는 검사비 때문에 제 권고를 무시하고 보건소에서 해 왔다는 사실이 서운했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고려도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병원을 운영하려면 검사비에서 생기는 얼마간의 수입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첫아기 출산시 제가 분만을 돕지 않고 다른 병원에서 출산했다면 거의 100% 수술로 출산했을 만한 난산 산모였고 제가 어떤 철학으로 병원을 운영하는지 알 것이라고 생각한 산모였다고 생각했음에도 그렇게 한 것이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 기분 때문에 진료하면서 불편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고 의사에 대한 신뢰도 없이 그렇게 하려면 큰 병원에 가서 출산하던지 하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구체적으로 어떤 말로 산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하튼 산모는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날 저녁 때쯤 그 산모의 동생이라는 남자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기형아 검사를 보건소에 해 왔다고 원장이 뭐라 했다고 자기 동생(산모)이 병원 갔다 와서 울고 불고 난리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 같이 돈만 밝히는 놈은 의사질하면 안된다"고 말하더군요.
그렇게 전화로 언성이 높아지다가 그럼 나도 그런 소리 들으면서 의사질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그날로 병원을 폐업했습니다.
그때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저는 종종 그렇게 까칠하고 차가운 말로 산모들께 상처를 주고는 해서 몇달에 한번씩은 항의를 듣기도 하는데 그때는 좀 심하게 항의를 들었습니다.
여하튼 병원 폐업에 대하여 아내나 부모님과는 일체 상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전화로 병원 폐업했다고 말했는지 아님 휴가 갔다 와서 말해 주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남편이 생업인 병원을 폐업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내는 아마 상당히 황당했을 것 같습니다.
산모나 환자가 아주 없이 안되던 병원도 아니고 나름 그 지역에서는 평판도 괜찮아 5년씩이나 하던 병원을 산모(아니 산모의 동생)의 비난 한마디에 닫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겠지요.
아내는 "당신 그동안 너무 고생했어. 그래 좀 쉬어. 쉬었다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자" 뭐 그렇게 좋게만 말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뭐라고 싫은 소리를 했겠지만 그건 제 행동에 비추어 볼 때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막내 민혜를 낳고 아마 일년쯤 후였던 것 같은데 그렇게 문을 닫고 한 6개월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얼하면서 먹고 살까 고민했습니다.
6개월 쯤 쉬었을때 결국 난 의사 밖에 할 것이 없다는 서글픈 사실을 깨닫고 다시 개업자리를 알아 보기 위해 한살된 민혜를 아내가 안고 업고 하면서 한달 정도 서울 변두리와 일산, 인천 등으로 개업 자리를 보러 돌아다녔습니다.
결국 멀리 가지도 못하고 은평구에서 한 구역 떨어진 서대문구 홍은동에 봄산부인과를 다시 개원하게 되었습니다.
제게 의사, 산부인과 의사는 정말 끔찍한 천형이구나 생각했습니다.
TBC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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