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일요일  아내와 함께  부족한 병원 주방 용품 몇가지를 사러 병원에서 멀지 않은 대형 마트에 갔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아서 옆 사람의 대화 소리도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다.  옆에 있는 커플은 신혼 부부이거나 아니면 곧 결혼을 앞두고 신혼 살림을 장만하는 연인처럼 보였다. 여자는 자그마한 인버터를 들고 괜찮은지 어떤지 남자의 의견을 물어 보는 중이었다. 의견을 물어본다기보다 사실은 여자는 이미 그 인버터가 마음에 들어서 사고 싶은 상태였고  남자에게 통보를 하는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게 꼭 필요하겠어?”
남자의 대답은 부드러웠지만 여자가 기대한 답은 아니었던 듯 하다. 여자는 다소 장황하게 그 물건이 있으면 얼마나 요긴하게 쓰일지에 대하여 남자를 설득하는 중이었지만 별로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했지만 여자의 의견에 반대라는 건 분명했다. 말이란 어조나 톤 등 전달하는 방식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다. 비록 부드럽다해도 자신의 요청에 대한 거절의 답이라면 기분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유용한 조언이거나 걱정말라는 격려의 표현이라도 무뚝뚝한 톤에 높낮이도 없이 메마른 톤으로 말함으로써 산모를 필요 이상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신묘한 재주를 타고난 나로서는 부러운 톤이었다.
여자의 목소리 톤이 다소 올라 갔다.  처음에 통보를 하던 톤에서 동의를 구하는 톤으로 바뀌었다가 이제는 짜증과 원망이 섞인  톤으로 변했다. 계속 그 자리에 있기에는 눈치가 보여 나는 그 정도에서 다른 곳으로 장소를 이동했다. 구경 중에는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 제일이라지만 불은 구경보다 끄는 것이 먼저고 싸움은 구경보다는 피해 주는 것이 예의다.  
그 상황을 나와 함께 목격했던 아내는  그 커플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짧게 한마디 내뱉었다. “바보 같은 놈”
그 남자를 두고 하는 소리였지만 도둑이 제발 저리듯 나에게 하는 소리처럼 들려 살짝 뜨끔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젊은 날의 내 모습도 그 남자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사실 그 인버터는 그리 고급 제품이 아니라 불과 몇만원 밖에 되지 않았다.  그 인터버가 그 커플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혹은 유용하지 않은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사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사면 되는 것이다. 그 커플의 경제력으로 가능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살림을 맡을 여자의 입장에서 아니 살림을 하지 않더라도 상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면 구입을 하면 되는 일이다. 자신의 의견이 묵살됨으로 해서 받게 될 마음의 상처는 나중에 그 인버터 가격의 수십배의 돈을 주고도, 쇼핑에 들인 두어시간의 수십배의 시간이 지나도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 나도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야 그런 진리를 알게 되었지만 살다 보면 돈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 그것이다. 돈을 버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하물며 적지 않은 빚을 떠안고 죽기 전에 다 갚고 가는 일도 무망해 보이는 내 입장에서는 말할 자격이 별로 없기는 하지만 돈은 나중에라도 벌 수 있다. 그러나 한번 입은 마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더군다나 마음의 상처는 몸에 난 상처와 달라서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아직도 피와 진물이 흐르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겉의 상처와 다르게 약을 바르거나 꿰멜 수도 없다.  몸의 상처보다 아무는데 훨씬 더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반백년을 넘어 살아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 커플의 다툼을 보면서 그 여자의 자존심은 인버터 하나 가격보다도 더 저렴하게 보였다. 그래서 앞에선 남자의 모습이 내 눈에도 못나 보였다. 이런 일은 경제력을 가지지 못한 여자의 경우에 더 흔하게 생길만한 일이지만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생활에 허덕일 정도로 다소 부족한 경제력을 가진  남자에게도 생기는 일이다. 나처럼 아내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사고 싶은 것은 사는 독불장군 같은 남편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여자든 남자든 경제 활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 싶기는 하다. 그래서 얼마전에 아내에게 너도 이제는 경제 활동(구체적인 돈으로 댓가를 받는 것이 아닌 가사활동 말고)을 해 보면 어떻겠냐고 물어 봤다. 명목상으로는 아내도 기를 펴게 해 주고 싶다는 의미로 말했지만 솔직히는 나 혼자 벌어서는 빚도 한푼 못 갚을 것 같기도 해서였다. 물론 아내로부터 단칼에 거절당하고 구박만 받았지만. ㅠㅠ

나는 지금은 내가 지불할 수 있는 돈이 있다면 그게 마이너스 통장에서 돈을 꺼내 쓰는 상황이라도 아내의 물건 구입이나 비용 지불에 일체의 토를 달지 않는다. 별로 쓰잘데기 없어 보이는  공인 중개사 학원 등록은 왜 했는지 묻지 않는다.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공인 중개사 자격증을 활용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중국어 회화 학원을 왜 다니는지 묻지 않는다. 2년씩 다녔지만 길거리에서 서툰 한국어로 길을 묻는 중국 사람과 중국 말 한마디 나누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언젠가 음식점에서 옆자리에 중국에서 여행온 사람들이 있길래 "중국 어디서 왔나 중국말로 한번 물어 봐. 솜씨도 발휘할 겸."하고 아내에게 건냈다가 들은 대답은 "궁금하면 니가 물어봐" 였다. 1주일에 한번씩 가는 섹소폰 수업에 얼마나 비용이 드는지도 묻지 않는다. 몇년이나 되어도 여전히 연주하는 곡은 립스틱 짙게 바르고 뿐이고 그나마도 삑사리 투성이지만. 불과 며칠전만 해도 멀쩡해 보이는 그릇들을 찬장에서 꺼내 다 내다 버리고 병원 살림에 필요하다고 새 그릇을 한 보따리 다시 살 때도 그럴 거면 왜 며칠 전에 그릇을 다 버렸냐고 투덜대지 않는다. (참고로 내 젊을 때 별명은 투덜이였음. ㅠㅠ) 아마도 나는 모르고 아내만 아는 이유가 있을테니까. 전문 산악인들이나 간다는 히말라야 베이스 캠프 등반은 왜 가는지, 가는데 얼마가 드는지도 묻지 않는다는 아니고 사실 물어 보았다가 면박만 당했다. "니가 쥐꼬리만한 생활비 말고 히말라야 여행 가라고 돈 준 적 없지? 없으면 얼마가 드는지,  어디서 났는지 묻지 마" 아내의 대답은 항상 그렇지만 군더더기가 없다. 여하튼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아내가 한 결정이라면 다 필요해서 한 일일테니까 내가 해 줄 수 있으면 지원해 주려고 한다.  내가 줄 수 없는 것--믿음직한 가장 혹은 살가운 남편,  말이 통하는 즐거운 동반자 등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별 것 아닌 작은 돈으로 마음의 위안과 생활의 활력을 얻게 해줄 수 있다면 다행이다. 다만 내 통장이 빈 껍데기이며 내가 가진 자산의 대부분은 자본이 아니라 빚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아내도 이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외에는 내가 사라고 해도 잘  사지 않는다.  백화점에 가서 누워 있는 옷 말고 서 있는 옷을 사고 싶다는 아내의 오래 전의 희망 사항이 기억나서 어쩌다 함께 백화점에 가는 일이 있을 때 아내의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사라고 해도 사는 적이 없다.  빚이 늘어 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마음에 드는 옷도 편히 사게 해 주지 못하니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참 그 여자는 과연 인버터를 샀을지 궁금하다.  혹시 아직 결혼 전인 커플이라면 결혼 준비라는 험난한 여정을 무사히 통과할지 어떨지도 궁금하다. 몇푼 안가는 인버터 하나지만 1점에 10원이라 판돈이 수백 내지 수천원에 불과한 화투판에서 똥껍데기 한장을 쌍피로 치느냐 아니냐 가지고 형제 간에 칼부림이 났다는 뉴스가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 것이 인간 세상이니 말이다. 이름도 모르는 여자지만 부디 기쁜 마음으로 인버터를 구입해서 잠시라도 행복한 기분으로 쇼핑을 마쳤기를 바란다. 앞으로 살면서 둘 간의 갈등과 다툼은 물리도록 겪어야 할테니 그것을 미리 가불해서 느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생의 의미란 오지 않은 내일에 있지 않으며 오직 오늘 이 순간에 있다는 사실을 일찍 알수록 주방의 것이든 마음 속의 것이든 유리 그릇이 깨지는 수가 적을 것이다.

댓글

저도 아가씨때 서있는 옷 위주로 샀었는데 ㅋㅋㅋ 누워있는 옷만 사신다는 사모님의 센스도 만만찮으세용♡♡ ㅎㅎㅎ 올만에 아이들 재우고 심원장 글보며 낄낄 웃고 갑니당^^  등록시간 2018-03-31 00:54
이 글을 남편에게 보여줍니다. ㅎㅎㅎ  등록시간 2018-03-27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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