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천동에서 홍대 정문쪽으로 넘어가는 길은 구불구불 휘어져 있다.  이 길은 청기와 주유소가 있던 서교동 쪽 길처럼 반듯하지도 넓지도 않다.  홍대 음식점 골목에 비하여는 딴판이라 할 정도로 한산하다. 밤 10시 무렵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미술 학원 학생들과 그들을 태우고 갈 승합차들로 잠깐 북적거리기는 하지만 그 시간도 길어야 30분 남짓이다. 홍대 주변의 거리에서 옆사람의 어깨에  부딪히지 않으면서 걷는 당연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길 중의 하나다.  경의선 책거리에서  커피숍 패턴 에티오피아 쪽으로 계단을 올라  10분 정도 걸려 홍대 정문까지 가다가 스치는 사람은 추측컨데 아마 10명에서 20명 사이쯤이다.  그 열배쯤 되는 인파들에 섞여 만나는 사람들보다는 한사람 한사람의 모습이  조금은 더 높은 밀도로 눈에 들어온다.  수시간을 달려도 사람 한명 만나기 힘든 몽골 벌판에서 10m 쯤 앞에서 걸어오는 어떤  한 사람과  월드컵 경기 때의 시청 광장에서 딱 그만큼 거리에 떨어져 있는 한 사람에 대하여 같은 느낌이 들기는 어렵다.

며칠전 산보길에서 10m 정도 앞에서 울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혼자는 아니었고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중이었다.  슬퍼서 우는 행위나 기뻐서 웃는 행위는 둘다 감정의 폭발에 기반한다.  남들이 보는 곳에서 웃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은 없지만 우는 것은 공개된 자리보다는 내밀한 사적 공간에서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거리에서 한 여자가 울고 있다. 울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거리에서 흔히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개를 돌려가면서 볼 정도로 드문 풍경도 아니다. 그녀가 울고 있는 이유나 남자가 하는 해명의 타당성에 대하여  내가 알 바도 아니고 알 수도 없다.  다만  그들이 신고 있는 신발이 내 눈길을 잡고 잠시 걸음을 천천히 걷게 만들었다. 한동안 유행했다는 삼색 검은 선 아디다스 운동화다. 나는 아내와  커플 신발이든 옷이든 입어 본 적이 없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사귀고 나서 어느 정도 친밀해지면 커플 옷을 입거나 신발을 사서 신는다고 들었다.  신발에 묻은 더러워진 얼룩이 그들이 커플 신발을 맞추었을 때의 행복에 겨웠을  느낌처럼 보였다. 순면의 하얀 천에 묻은 얼룩이 더 눈에 띄는 것처럼 커플 운동화를 신은 여자의 울음이 지나가는 차 소리를 뚫고 내 귀에 울렸다.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는 고사성어도 있다시피 모르던 사람이 만나 죽고 못할 정도로 사랑하게 되거나, 사랑하던 사람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일은 만고의 진리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살면서 한두번쯤 누구나 겪는 일에 가깝다. 커플 신발을 함께 신은 사이가 아니라 다어아몬드 반지를 함께 끼고 있는 관계에서 한 사람이 지금은 울고 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여자가 신은 운동화가 처량하고 안쓰러워 보였다.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는 남자의 뺨을 쎄게 한대 때려주고 싶었다. 내 이성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도 하고 이유없는 폭력을 행사한 사람으로 경찰서에 붙들려 가고 싶지도 않아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차라리 남자가 아무말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면 인생살이의 달고 쓴 이치를 깨달아 가는 과정 쯤으로 이해하고 미운 마음이 덜 들었을 듯도 싶다. 때로는 변명의 말보다 침묵이 필요할 때가 있다. 다만 언제가 해명이나 변명이 필요할 때인지 언제가 침묵이 필요할 때인지를 알기가 어렵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휴무인 주방 여사님을 대신해 아내가 입원 산모들의 식사를 위해 병원에 오는 날이다. 어제 청계산에 갔다가 벌에 물려서 뺨이 벌겋게 부었다면서 잔뜩 부풀어 오른 뺨을 내게 보여준다. 박씨 부인이 되었다고 너스레를 떤다. 왠 박씨 부인? 박씨 부인은 나중에 이뻐지기라도 하지. 내게 호 하고 불어 달라는 의미는 아닐 터이고 아마도 이렇게 힘든 와중에 도와주러 왔으니 고마워해라라는 의미였을까?   뺨을 보여주는 아내에게 내가 한 말은 아래 세번째 말이다. 아내의 반응은 살피지는 않았다. 잘 한 말일지 아니면 침묵이 더 나았을지는 모르겠다. 아니 사실 모르지 않는다. 스스로 알고 있지만 차라리 침묵하고 있는 것이 더 나았을 숱한 순간들에서 그러지 못했다. 4가지 대답 중에서 1번이나 2번의 말을 할 수 있다면 더 좋았겠으나 어떤 사람에게는 천냥 빚을 갚는 것보다 말 한마디가 더 어렵기도 하다. 그러니 포기해야 할 것들은 빨리 포기하고 중간이라도 가려고 노력해야겠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니......

1. 많이 아프겠네. 약 사다줄까?
2. 요즘 벌이 독하다던데 조심하지 그랬니.
3. 산이고 들이고 그렇게 칠랑팔랑 나다니니 벌에 쏘이는 거 아니냐. 그러게 누가 그렇게 쏘다니랬냐?
4. 침묵

댓글

앗 이런;; 설마했는데 3번;;; 정말 때로는 침묵이....  등록시간 2018-08-09 21:37
아고 ㅎㅎㅎㅎ 3번이라니요..! ㅠㅠ음.. 그러고보면 제 남편이 혹시 종종 그렇게 말하더라도 마음속엔 원장님처럼 사랑이 가득하다고 믿어야겠네요 ^^  등록시간 2018-08-09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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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eeun [2018-08-18 23:15]  podragon [2018-08-09 12:36]  rutopia [2018-08-07 17:18]  alaia [2018-08-06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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