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인터넷 기사를 보니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청년이 정관 수술을 해달라고 비뇨기과 의사에게 부탁을 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청년은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으니 아예 영구 피임시술인 정관 수술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간단히 생각하면  원치 않는 임신으로 상대 여성이 낙태 수술을 받는 위험과 손해를 피해가기 위해 남성 스스로 그렇게 피임을 하겠다고 하면 기특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사 입장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정관을 그것도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청년의 정관을 영구히 차단하는 수술을 들어 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관 수술은 불과 십여분이면 끝날 정도로 간단한 수술이며 수술이 어렵기 때문에 비뇨기과 의사들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란 세월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인데 수술을 한 후에 청년이 찾아와서 다시 정관을 이어주는 문합 수술을 해 달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재문합 수술은 정관 수술을 한 후 경과한 시기, 남아 있는 정관의 길이, 남성의 나이 등 여러가지에 의해 좌우되지만 성공율이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만일 나중에 청년이 찾아와 그때 내가 어린 생각에 그런 요구를 했더라도 수술로 인해 초래될 결과와 재문합 수술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당신이 전문가이니 잘 설득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항변하면 달리 대답할 말이 없다.

내가 개업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니까 벌써 십여년전 일이다. 흡입 분만으로 출산한 난산 산모의 사례가 생각이 난다. 제왕절개 수술을 했어야 하는 산모를 결국 수술을 하지 못하고 흡입 분만을 시도하다가 아기가 결국 잘못된 경험이 있다. 물론 흡입 분만에 따른 위험성과 제왕절개 수술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호자에게 충분히 설명했지만 결국 설득하지 못하고 자연 분만을 시도했고 흡입 분만으로 가까스로 낳기는 했지만 아기는 결국 잘못되었다. 비록 자연 분만 시도에 따른 위험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로 인한 부작용에 대하여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각서도 받았지만 결국 나는 담당 의사로서 상당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전문가로서 비전문가인 산모와 가족을 설득하지 못한 것이 죄였다.
의사는 어디까지 환자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나?
앞으로 세월이 많이 지나면 어떨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대부분 나라에서는 생존 능력이 있는 환자의 안락사는  금지하고 있다. 들어주는 의사 입장에서는 살인죄가 된다. 낙태 수술도 비록 처벌을 받는 사례는 거의 없지만 낙태 요구를 들어 주면 낙태죄로 의사도 처벌을 받게 법에 정해져 있다.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하지 않겠다는 산모의 요구를 들어 주거나 혹은 제왕절개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수술을 하겠다는 산모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어느 범위까지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일까?  

위의 두 사례는 비교적 극단적인 경우지만 진료 현장에서 이런 갈등은 숱하게 겪는다. 다른 진료 과목에서도 흔한 일이겠지만 산부인과 의사로서 내가 직접 겪고 있는 일들만 적어 본다.
대학병원을 갈 필요가 없는 단순 질염이나 출혈 환자가 진료 의뢰서를 요구하는 것(참고로 진료 의뢰서는 본인들이 원한다고 발부해 주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의사가 판단하여 3차 병원에서의 진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발부하는 서류다)
주사제가 필요하지 않은 단순 질염에서 항생제 주사를 놓아주기를 원하는 것.
의학적인 적응증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임에도 단순히 불안한 마음에 혹은 사주가 좋은 날 출산하기 위해  제왕절개 수술을 원하는 것.
진찰이나 어떠한 검사도 없이 본인이 인터넷상에서 본 정보로 판단한 자가 진단에 따라 약의 처방만을 원하는 것 등등.

의사란 직업도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기 때문에 진료 받는 상대방의 입장과 요구를 충분히 감안하고 반영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건강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지 않는 범위여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임신 중에 갑상선 질환이든 심장 질환이든 임신부가 가진 질병 때문에 약물을 써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 약은 태아에게는 해로운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약물이 태아에게 완전히 안전이 밝혀진 약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이 된다. 이때 약의 사용 가이드 라인은 간단하다. 약의 사용으로 얻는 임신부의 이득이 약의 사용으로 인한 손해보다 클 때 약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도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다. 임신 초기에 자궁암 혹은 난소암이 발견된 사례들이 있다. 이때 어떤 사람은 아기를 포기하고 항암 치료를 받는다. 반면 어떤 사람은 암이 진행되어 결국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될 것을 알면서도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항암 치료를 받지 않는다.  초기 임신에서는 태아의 생명보다는 산모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의학적 이득이 더 큰 것으로 보고 태아를 포기하고 항암 치료를 권하도록 의학 교과서에서는 권고한다. 낙태 적용 범위가 비교적 엄격한 우리나라에서도 산모의 건강이 심각히  위협받는 상황에서의 낙태는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이처럼 애매한 상황에서는 당사자의 의견을 주로 반영할 수 밖에 없다.  환자의 요구 앞에서 의사가 들어줄 수 있는 한계의 범위는 이처럼 상황마다 다르다. 그만큼 고민이 많은 직업이다. 그래도 위안을 삼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는 점이다.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 최선을 다 했다고 해서 누군가가 대신 건강과 생명을 잃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변호사나 판검사는 자신의 판단과 노력으로 누군가 득을 본다면 누군가는 피해를 본다. 변호사나 판검사는 직업에 대한 갈등이 정말 심하지 않을까 싶다. 역시 사람은 아래를 보면서  위안을 삼을 수 밖에 없다. 물론 변호사나 판검사가 경제력이나 권력에서 의사보다 아래라는 의미는 아니다. 직업으로서의 고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이니 혹시 오해는 없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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