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프 선생님, 외래에서 난프라이빗으로 씨섹(C/S.  cesarean section. 제왕절개) 산모 한분이 입원하셨습니다."
당시 1년차 주치의인 백선생이  수석의인 제게 그날의 입원 환자에 대한 보고를 하였습니다.
대학 병원마다 조금씩 다른데 서울대 병원의 외래 진료는 보통 특진 외래로 교수님들이 보는 진료실이 있고 특진을 따로 지정하지 않으면 4년차 치프나 펠로우 (산부인과 전문의 이기는 하지만 정식으로 교수로 임용되지는 않은 의사로 전임의라고 부름)가 보는 일반 진료실이 있습니다.
이중 특진 외래를 통해 입원한 산모나 환자는 해당 교수님이 수술이나 출산을 맡지만 일반 외래로 입원한 산모나 환자는 병동을 맡고 있는 해당 수석의 팀에서 수술이나 출산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일반 외래를 통하여 입원한 환자를 특진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난프라이빗(non private)이라고 부르고 특진으로 입원한 환자는 프라이빗(private)이라고 부릅니다.
보통은 경제적으로 형편이 좀 어려운 사람들이 난프라이빗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특진 진료를 받게 되면 수술료는 말할 것도 없이 검사료나 마취료 모두에 특진료가 붙어서 입원 비용이 두배 이상으로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요즘은 많이 없어졌지만 교수님 진료일 경우 퇴원하면 촌지라고 해서 얼마간의 돈을 내고 가는 것이 관행처럼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 병원에서는 교수의 월급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라서 연구비나 촌지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인기 있는 교수는 월급의 몇배에 해당하는 촌지를 받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촌지는 교수님들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 수술을 함께 돕는 주치의와 수석의 팀에게도 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 촌지를 모아 월말에 회식 때 비용으로 쓰기도 했고 남는 돈은 수석의가 가져 갔습니다.
이런 촌지를 얼마나 많이 걷어 오는가 하는 것이 능력 있는 주치의가 되는 기준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촌지는 보통 수술이 끝나고 나서 감사의 마음으로 주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수술 전에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먼저 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체로는 수술 동의서를 받는 수술 전날에 많이 주더군요.
그러니까 수술 동의서를 받을 때 주치의가 어렵고 위험한 수술인 것처럼 무섭게 말하면서 은근히 그런 것을 내비치고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주치의때 저는 그런 얼굴 화끈 거리는 짓을 잘하지 못하여 그런 점에서 그다지 능력이 없는 주치의에 속했습니다.
오해없도록 다시 말씀드리지만 요즘은 이런 잘못된 관습은 많이 없어졌습니다.
다음 편에 말씀드리겠지만 제가 잠깐 근무했던 삼성의료원은 개원할 때부터 일체의 촌지를 받지 못하도록 전 직원에게 지침을 내려 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고 받음은 은밀하게 일어나는 것이고 또 우리나라의 문화가 그런 것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직도 얼마간은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제를 좀 벗어난 것이기는 하지만 제가 받았던 촌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촌지는 제가 내과 인턴을 돌때 어떤 말기 간경화 환자의 보호자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간경화가 심하여 사경을 헤매던 어떤 할아버지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인턴이 주로 하는 일은 혈액을 채취하거나 정맥 주사를 놓거나 혹은 관장이나 삭모를 하는 일, 검사결과지를 챙기거나 검사를 예약하는 일, 수술시는 수술 보조의등 의료 행위 중에서는 비교적 단순한 업무를 맡습니다.
간경화가 심하여 복수도 많이 차고 간성 혼수가 왔던 분으로 변비가 심하여 변비를 해결해 주어야 하는 상황으로 제가 그날 관장 업무를 지시 받았습니다.
간성 혼수 환자가 변비가 심하면 증상이 악화되기 때문에 빨리 관장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의식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핑거 에네마(finger enema)를 해야 했습니다.
보통의 관장은 관장약을 항문을 통해 넣고 일정 시간 후에 화장실에 가서 변을 보면 되는 것이지만 핑거 에네마는 그럴 수 없는 경우에 손가락을  항문으로 집어 넣어 딱딱하게 굳은 변을 일일이 손으로 파내야 하는 처치입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냄새도 고약해서 인턴들이 가장 꺼리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그 분은 제 담당이기도 해서 피할 수도 없는 일이고 시간을 다투는 일이기 때문에 한시간쯤인가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 관장을 하여 변을 다 파내고 돌아서니 할아버지의 부인인 것으로 생각되는 할머니께서 "수고하셨소. 선상님"하면서 무언가를 제게 건네더군요.
사실 그때 그런 사투리를 썼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는데 왠지 이런 부분에서는 깔끔한 표준말인 서울말보다는 그런 사투리가 어울릴 듯 합니다. ㅎㅎ
받아 보니 천원짜리 두장이었습니다.
흰 봉투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손자들에게 용돈으로 주려고 꼬불쳐 놓았던 돈이었는지 꾸깃꾸깃 구겨진 돈을 제 손에 쥐어주더군요.
저는 그저 주치의가 시킨 일을 하였을 뿐이고 그런 일에는 익숙해져서 별다른 생각도 없이 기계적으로 한 일일 뿐 아니라 하면서 무슨 대단한 봉사심을 가졌던 것도 아니고 살가운 말을 건넨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옆에서 관장하는 모습을 보신 할머니께서는 그런 지저분한 일을 하는 젊은 선생에게 미안했던가 봅니다.
완강히 거부하다가 너무 거부하면 할머니께서 민망하실 듯하여 받기는 받았는데 감사한 마음과 함께 내가 그걸 왜 받았나 하는 후회가 밀려 왔습니다.
그 이후 레지던트를 하면서 교수님을 도와 높으신 분들, 돈많은 분들의 수술과 회복에 함께 참여하면서 액수로 치면 그것의 몇십배 이상 되는 촌지도 종종 받았지만 그때의 촌지처럼 저를 당황하게 하고 기억에 남는 촌지는 없습니다.
지금도 저는 돈이든 과자든 떡이든 촌지에 대하여는 흔쾌히 스스럼없이 받아지지 않는데 그것은 촌지라는 것이 그저 감사의 마음으로 주는 성의의 표시인 경우도 분명 있지만 무언가 부탁의 마음으로, 또는 예의상 어쩔 수 없이 주어야 하는 의무감으로 주고 받았던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 제게 그런 선물을 주시는 분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며 감사한 마음 그지 없습니다.
다만 그런 과거의 기억과 또 굳이 그런 것이 필요 없이 저희는 받을 만큼 충분히 받았기 때문에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그러니까 앞으로 제게는 일체의 촌지나 선물은 가져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제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굳이 성의의 표시가 필요하면 조그만 종이 쪼가리에 글로, 혹은 홈피에 간단한 글로, 아니면 병실에서 그저 한마디 말씀만 해 주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뭐 이미 마음으로 잘 알고 있으니 굳이 그런 말이나 글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지만....

오늘은 수련의 시절 고백 끝내야 하는데 또 이야기가 옆으로 새어 버렸네요. ㅠㅠ
"그래 어떤 산모인가요?
"척추 만곡증 산모인데 예정일이 한달이나 남았지만 외래에서 조산기가 있고 하여 며칠 내로 수술해야 할 것 같다고 입원시킨 산모입니다."
"척추만곡증? 얼마나 심한가요?"
"내과에 컨설트 내 봐야겠지만 상당히 심합니다. 키도 140cm 밖에 안되고요."
"그래요? 그런 고위험 산모가 난프라이빗으로 올라왔어요? 나 참...여하튼 마취과에도 컨설트(consult. 협진 의뢰) 내요."
척추 만곡증은 흔히 꼽추라고 부르는 척추 이상을 말하는데 그런 산모들은 보통 골반이 아주 좁고 하여 자연분만은 어려워서 제왕절개로 출산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인턴 선생님은 가서 체스트(Chest--chest PA의 약자로 흉부 X 사진)와 외래에서 나간 랩(Lab--laboratory exam result의 약자로 검사 결과지) 찾아오고."
"예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난프라이빗으로 그런 고위험 산모가 올라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아무래도 그런 고위험 산모는 경험이 많은 교수님에게 배정되는 것이 상례였는데 아마 경제적으로 많이 어렵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마취 어렵겠는데요. 선생님."
"안되겠습니까? 마취 선생님"
"피에프티(PFT--pulmonary function test로 폐기능 검사)가 20% 밖에 안되서 제네랄(general anethesia의 약자로 전신 마취)은 위험해서 할 수 없고 스파이날 (spinal anethesia--척추 마취의 약자)도 만곡증이 너무 심해서 못할 것 같아요."
"아니 그럼 어떻게 하죠? 큰 일이네..곧 진통이 올 텐데...."
"로칼(local anethesia. 국소 마취) 로 밖에 할 수 없겠습니다."
"아니 로컬로 어떻게  씨쎅을 해요?"
태아 상태가 위중하거나 산모 상태가 위급한 경우등 정 급할 때는 마취과 의사의 마취 도움 없이도 그렇게 수술하는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는 수면 마취제도 없어 정말 국소마취만으로 제왕절개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마취란 단순히 통증만 없애는 것이 아니고 태아를 복부로 꺼내기 위하여  근육이완제도 써야 하고 통증을 참는다고 해도 심하면 통증 쇽으로 기절할 수도 있고.
그리고 국소마취는 피부 밖에는 할 수 없는데 정작 통증이 심한 복벽이나 복막은 국소마취로 통증을 없앨 수도 없습니다.
"백(bag. 수술 중 산소 투여를 위한 공기 주머니)은 내가 잡아 줄테니까. 환자 팔다리 묶고 해야지."

"백선생님. 내과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우리 팀 주치의에게 내과 컨설트 결과를 물었습니다.
"예 치프 선생님. 내과에서는 이분  심폐 기능이 너무 낮아서 임신하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피임 잘하시라고 전에 이야기 했다는데 이 분이 막무가내로 임신을 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취를 하든 안하든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 내과에서는 달리 도와줄게 없다고 합니다. 정 수술해야 하면 마취하면  테이블 데쓰(table death. 수술 도중 사망하는 일)할 가능성이 있으니 마취는 피하고 수술 후에 다시 컨설트 해 달랍니다."
"이런 젠장. 어쩌란 말이야...."
욕이 튀어 나왔습니다. 아니 아마 욕이 나왔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개업하고 있으니 그런 고위험 산모는 이런 개인 병원에 오지도 않고 와도 대학병원으로 보내면 되지만 3차 병원인 서울대 병원에서는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의료 사고는 언제 어디서든 날 수 있지만 대체로 고위험 그룹에서 나는 것이 일반적이고 딱 보면 쉽지 않겠구나 하는 정도의 감은 알만한 경험이 쌓였습니다.
그런 고위험 산모나 환자를 우리들끼리는 폭탄이라고 부릅니다.
언제 터질 지 모르니 그저 다들 그런 환자가 자신의 팀으로 배정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저는 프라이빗이든 난프라이빗이든 그런 고위험 그룹 환자들이 유독 많이 걸렸습니다.
운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하는 생각은 이런 여러가지 것들이 쌓여서 생긴 것입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내과와 마취과 컨설트 결과와 환자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적어 당시 산과 분야를 책임지고 있는 Y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교수님. 이런 산모가 저희 팀으로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위험해서 프라이빗으로 돌리는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프라이빗으로 돌린다는 것은 일반인 난프라이빗 환자에서 교수 특진 환자로 돌려 교수님께서 주 집도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어차피 환자야 저희 팀이니 저도 수술에 보조자로 참여하고 수술후 회복도 책임져야 하지만 경험도 그렇고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를 감안해도 그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그런 사례들이 가끔 있기도 했습니다.   
Y 교수님은 컨설트 결과지와 환자의 상태를 보여주는 랩 결과들을 보고 아무 말도 없다가 한마디 불쑥 꺼내더군요.
"팔랑 선생, 자네가 보기에는 어떨 것 같아?"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국소마취를 해도 산모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수술을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이잖아. 스파이날은 도저히 안되겠데?"
"예 마취과에서 척추 엑스선 사진 보고 이건 스파이날 시도해 볼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완전히 퓨전(fusion 척추 뼈가 서로 융합되는 현상)이 되어 있어 콘크리트 바닥에 바늘  꽂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
"......"
"그럼 팔랑 선생이 그냥 수술해."
"예? 제가요"
"씨섹 많이 해 봤잖아"
"예. 그렇긴 한데 수술하고 나서 산모가 사망할 가능성도 많은데 전문의도 아닌 제가 했다가 의료 분쟁이 발생하면 아무래도 병원 입장에서 여러가지로 문제가 될 것 같은데요.  교수님께서 맡아 주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럼 나보고 그런 골치 아픈 것을 맡으라고 하는 거야?"
"아니 그래도 교수님이니까......."
"그럼 하버드 대학으로 보내든가!!"
"예 하버드 대학이요?"

물론 그 교수님도 차라리 그렇게라도 보냈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겠지만 너무 무책임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 수술은 제가 주 집도의가 되고 책임을 지고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 전날 수술에 따르는 위험성도 설명하고 동의서도 받아야했기 때문에 제가 직접 설명하기 위하여 병실로 들어 갔습니다.
보호자인 남편은 보니 팔이 하나 없더군요.
"위험한 수술인 것은 아시죠?"
"예 알고 있습니다."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남편이 대답하였습니다.
"이미 지난 일이라 말해봐야 소용 없는 일이지만 임신하면 위험하다고 내과에서 이미 말씀드렸던 모양인데 피임을 좀더 철저히 하지 그러셨어요?"
"아니 피임을 하지는 않았고 일부러 임신한 거예요."
산모가 그렇게 대답하더군요.
"아니 일부러요?"
"예 보셨으니까 아시겠지만 저는 몸이 이렇고 남편은 어릴 때 사고로 한 팔을 잃었어요."
"........"
"살면서 멸시도 많이 당했고 지금도 둘이 포장마차 하면서 사는게 힘들어 아기도 잘 키울지 자신은 없어요."
"그런데 왜?"
"두 사람이 이러니까 완전한 아이를 낳아서 키워보고 싶었어요. 남한테 멸시 받지 않고 당당한 모습의 아이를 낳아서 키워 보고 싶었어요."
남편은 옆에서 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아마 임신하고 수술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 잘 알아요. 그래도 그런 아이를 낳아보고 싶어요. 저는 죽어도 좋으니까. 아기는 애 아빠가 잘 키워줄거예요. 그렇지 여보?"
산모는 자신의 처지에 비하여는 상당히 밝은 성격처럼 보였고 그런 가슴 아픈 말을 하면서도 비교적 담담해 보였습니다.
"걱정마. 여보. 다 잘될 거야."
남편이 아내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저는 사인을 받은 동의서를 가지고 병실을 나왔습니다.

수술을 맡을 우리 팀을 모았습니다.
"잘 알겠지만 이 분은 심폐 기능도 정상인의 1/5 밖에 안되고 마취과에서는 마취도 못해준다고 합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치프 선생님"
"통증은 심하겠지만 산모의 의지가 강해서 아마 통증은 견디어 내실 것 같은데 문제는 심장이예요."
"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가능한 빨리 수술을 끝내서 산모의 심장에 가는 무리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예요.
절개부터 봉합까지 20분 넘으면 위험하니까 내일 준비 잘 해서 한번 해내 봅시다.
교수님들도 골치 아파 다들 피하시니까 잘되든 안되든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어요."
"예 알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수술이 시작 되었습니다.
최대 용량으로 국소 마취를 하기는 했지만 극심한 통증을 안으로 삼키는 산모의 낮은 신음 소리가 수술 내내 들렸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수술을 마무리 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여 메스(수술 칼)를 잡고 시저(수술용 가위)를 움직였습니다.
이런 경우 중간에 수술에 대한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심장마비가 올 수 있는데 제발 하늘이 도와 주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수술 시작하고 5분 쯤 지나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건강한 사내아이였습니다. 물론 척추도 이상이 없었습니다.
조산이 되서 비록 작아 보였지만 호흡과 울음은 좋아 보였습니다.
수술에 집중하느라 보지는 못했지만 산모는 아마도 기쁨으로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근육도 단단하고 쉽지 않은 수술이었지만 제가 지금까지 했던 제왕절개 중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끝냈습니다.
다행히 20분도 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늘이 도왔는지 수술 중과 수술 직후 산모는 의식과 호흡 등에 이상이 없었습니다.
수술 가운과 글러브를 벗으면서 다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정말 너무 이쁜 아기의 모습을 자세히 봤습니다.
며칠간 산모의 회복도 별 문제가 없어 보여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수술후 며칠이 지났을 즈음 산모가 호흡이 좀 힘들다고 하고 몸도 붓기 시작했습니다.
내과에 컨설트를 낸 결과 심부전증이 초래된 소견이라고 판단이 내려 졌습니다.
비록 수술도 빠르게 끝냈고 출혈도 많지 않았지만 급작스러운 출산과 수술에  결국 산모의 심장이 견디지 못한 모양이었습니다.
산모는 내과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며칠에 걸쳐 여러가지 치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계에 이른 산모의 심장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최후의 방법으로 심부전증을 교정하는 심장 처치가 필요했지만 제왕절개도 무리인데 심장 수술을 마취도 하지 않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중환자실로 찾아간 제게 산모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고마워요. 전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요. 선생님 잘못 아니예요.  정말 감사드려요. 내가 이렇게 건강한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전 너무 기뻐요."
산모는 몸에 여러가지 복잡한 장비들을 달고 있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더 이상의 수술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마음의 준비를 끝낸 산모에게 "괜찮아질것이니 너무 걱정마세요" 하는 입에 발린 위로도 건네지 못했습니다.
왜 내가 의사를 했나 하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 산모는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그 산모는 경희대 병원에서 침을 이용한 마취를 하여 심장 수술을 했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보존적 치료만 하다 말았다고 들은 것도 같은데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수술한 지 대략 한달 쯤 지나서 산모가 결국 운명하셨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습니다,
의사가 되면 반드시 보게 되는 두가지--생명과 죽음--를 그때처럼 절절하게 본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숱한 죽음을 보았고 이후에도 자주는 아니지만 산모나 아기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의사는 특히 산부인과 의사는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보아야 하는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저주 받은 직업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모든 의사는 자신을  위해서든 그리고 환자 본인과 환자 가족을 위해서든 어떻게 하면 천국에 오래 머물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디른 모든 의사와 마찬가지로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비록 드물다 해도 때때로 죽음을, 지옥의 모습을 봐야 한다는 것을......
그때  의사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 산모의 말 때문에 지금까지 의사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산모는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제 머리속에서만 그런 환청이 들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괜찮아요 선생님. 너무 자책하지 마시고 앞으로도 계속  좋은 의사 되셔서  저 같이 어려운 사람 많이 도와주세요."
그때 환하게 웃던 산모의 모습과 그 와중에도 저를 격려하려 했던 말을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감정이 북받쳐 오릅니다.

지금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이미 정해진 운명의 굴레에서 신도 아닌 의사가 과연 무엇을 하고, 무엇을 바꿀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신이 있다면 신께 그렇게 묻고 싶은 적이 종종 있는데 그때도 그랬습니다.
그때 그 아기는 지금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지요?
벌써 이십여년 전이니 늠름한 청년이  되어 있을 겁니다.

TBC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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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땅콩산모 등록시간 2014-06-01 14:32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읽다 가슴이 뭉클해지네요 ^^;;
소설 '아르헨티나 할머니'에서도 출산 후 심부전으로 유명을 달리한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흔하진 않지만 종종 있을 수 있는 일이군요 ㅠㅠ

그 환자분은 아기를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며 고통스럽지만은 않은 안식을 얻으신 것 같습니다..
부디 천국에 가시고, 아빠와 아들 두 가족에게도 행운이 있었길 기도해보네요^^

다소 엉뚱한 말이긴 하지만.. 원장님은 그 소년이 어떻게 자랐을 지 궁금하시고.. 전 88년도  올림픽 때의 '굴렁쇠 소년'이 어찌 자랐을까 항상 궁금하답니다 ㅎㅎ
전 그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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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의학이 발달해서 그런 경우가 많지 않지만 출산을 전후하여 산모가 사망하는 경우는 과거에는 그리 드물지 않았습니다. 옛 능에 가보면 젊은 나이의 왕비가 출산하다가 사망한 경우의 기록이 많습니다. 2세를 낳는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지만 대신 그만한 의미가 있는 일이기도 한 것이죠.  등록시간 2014-06-01 15:41
#3 김지선 등록시간 2014-06-01 16:09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서훤이에게 수유하며 정독하였네욥^^;흠..그산모분은 참 안타깝네요;;엄마의 마음이란게 뱃속 내아이만 괜찮다면 본인이 어떻게되도상관없게되는건 다 똑같은거같네요..
부모처럼 몸이어딘가 불편하지않은 건강한 자녀를 얼마나만나보고싶었으면 본인이 잘못될것을 알면서도 임신을했는지..안쓰럽군요..그 아이는 분명 아버지께 효도하며 건장한 청년이 되어있을것같네요ㅎㅎ매번읽을때 마다느끼지만 원장님 글솜씨가 뭔가 집중시키게하는 매력이있네요ㅎㅎ다음편도 기대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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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모의 마음이 비슷하겠지요. 자식만큼은 완벽하게. 그리고 그런 완벽한 모습의 아기를 키워 보고 싶은 욕심. 인류를 존속시켜 주는 힘이기도 하죠. 졸필임에도 정독하시면서 보셨다니 감사합니다.  등록시간 2014-06-01 16:36
#4 양선영 등록시간 2014-06-01 22:46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오늘은 슬프네요.. 연애사 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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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끓어 오르는 감정을 잘 주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맡았던 산모 중 처음으로 생명을 건질 수 있도록 도와 드리지 못한 경우여서 더 가슴에 남습니다. 그저 명복을 빌 뿐입니다.  등록시간 2014-06-01 23:25
5# 이연경 등록시간 2014-06-02 00:09 |이 글쓴이 글만 보기
그 산모분 정말 대단하시네요.. 어떻게 그 고통을 참아내셨는지... 아기가 나오는 진통보다 더했을지도 모르는 감조차 안오는 극심한고통을 그렇게 참아낼만큼 얼마나 서러운 인생을 살아오셨을지.. 마음이 짠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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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면서의 서러움이 너무 커서 수술에 따르는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상상하기도 어려운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등록시간 2014-06-02 10:00
6# 수진맘 등록시간 2014-06-02 08:42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읽기는 어제 읽었는데..답글은 이제야 남기네요. 육아와 회사생활로 정신없이 현실적으로 사는 요즘..오랜만에 가슴먹먹해지는 글을 읽으니 좋네요 원장님. 저녁준비하면서 수진이가 안아달라고 엄마한테 울며불며 매달려도 저녁준비에만 신경썼던 제가 참 부끄러워지네요(사실 김씨께서 협조를 안하여 열이 받을때로 받은 상태였어요....=_=;;) 세월호 사건이 터진후  한 잠수부의 인터뷰가 생각나네요. "익사시체는 생각보다 흉하고 끔찍한데..그래도 그런 시체를 끌어안고 우는 사람은 남편도 아빠도 아닌 엄마뿐이라고.." 좋은글 담에도 기대합니당^^

댓글

시체를 끌어안고 우는사람은 엄마뿐이라는말이 울컥하네요... 정말 엄마는 그럴수있을것같아요. 엄마니까  등록시간 2014-06-02 12:52
수일 이상 지난 익사체의 모습은 정말 끔찍합니다. 무한한 사랑을 가진 엄마외에는 그 누구도 똑바로 쳐다 보기 조차 힘들 겁니다. 사랑의 힘이란 그렇게 대단한 것이죠. 위 글의 엄마처럼.....  등록시간 2014-06-02 10:01
7# 박군마누라 등록시간 2015-06-23 15:57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아..진심..대박..드라마보다 훨씬 재미있고 생동감 넘치네요..그때 그 아이는 분명히 잘 살고 멋진 청년이 되어있을거예요~!! 의사질이 힘드시겠지만 앞으로도 의사질 잘 부탁드려요 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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