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신망 있는 중견 법의학자가 된 병리과 의사가 처음 부검의가 되고 나서 부검을 맡게 된 사건은 그 당시 운동권 학생으로 수배되었다가 물에 빠져 익사한 것으로 알려진 이 모군 사건이었습니다.
고문에 의한 타살이라는 가족과 주변 동료들의 강력한 항의와 실족사로 추정된다는 정부 기관의 팽팽한 대치 속에 언론의 조명을 받으면서도 그는 타살이 아닌 것으로 판단했고 그렇게 부검 소견서를 작성하여 사건은 그대로 종결되었습니다.

얼마전 그 법의학자가 쓴 글에서 그런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 주위의 압박과 비난도 심했고 타살이라고 믿을 만한 심증적 상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죽은 자가 말해주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소신에 따라 타살이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판단하게 된 근거로 그는 사망자의 폐에서 플랑크톤이 검출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분명한 익사의 증거로 설사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더라도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이미 죽은 후에 물에 집어 넣은 사체에서는 기도에 공기가 차서 물이 들어 가지 못하지만 익사자의 경우에는 기도로 물이 들어가 폐에서 플랑크톤이 발견된다는 것은 법의학의 기본 상식이며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말했는 데 그가 말한 것은 그대로 맞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법의학자라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대우가 매우 열악하지만 그는 소신을 가지고 이 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일로 법의학자의 길을 택했고 그 사건의 경우에 타살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도 다른 외압에 의해서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 판단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냐는 것은 또 다른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건이 종결되고 나서 십수년이 지난 지금 의문사 진상 규명 위원회가 설치되고 그 사건도 다시 도마에 오르게 되어 조사가 일부 진행되었지만 뚜렷한 결론이 내려 지지는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분석해 본 일본의 저명한 법의학자가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린 것을 보고 다시금 의료인에게 있어 소신의 문제를 되새겨 보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법의학자의 주장은 신체에 난 여러가지 멍 소견과 허벅지에 신발 밑창으로 의심되는 무언가에 의해 강하게 눌려진 흔적이 있고 사망자가 반항하기 어려운 정도로 탈진된 상태에서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견을 보여 이 사람은 타의에 의해 물 속에서 사망한 것으로 즉 타살인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습니다.
(고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물속에서 사망한 것이라면 당연히 플랑크톤이 검출이 될 것이며 플랑크톤 문제만 가지고 타살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지요.)

여하튼 같은 사건을 놓고 두 법의학자의 결론이 정 반대로 달랐는데 그렇게 달랐던 이유나 정확한 진실이 무엇인지는 저는 잘 모르고 여기서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밝히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한 사람은 단순한 익사 소견 외에 신체에 난 다른 증상을 판단에서 배제 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한 의사는 다른 사실은 배제 한 채 단순한 한 가지 현상만을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의학에서는 내 의견도 틀릴 수 있고 다른 이의 의견이 맞을 수도 있다는 것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내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에 바탕하여 보편적으로 동의가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젖몸살에 양배추를 붙였다가 심한 부작용으로 피부 이식 수술까지 하게 만든 어느 병원의 사건을 보고 말한 적이 있지만 이렇듯 산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던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던 의료 관련 분야에서는 그저 소신과 양심에 따라 판단했다고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내려진 그릇된 결론에 대해서라면 소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것보다 사회에 더 무서운 해악을 끼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의료인이 혼자 만의 좁은 세계에 갖히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하고 되돌아 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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