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는 일찍 돌아 가시어 뵌 적이 없고 외할머니는 20여년 전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생전의 모습이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외할머니댁에는 왜 가서 살게 되었는지 자세히는 모르는데 언젠가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생활력으로는 5식구가 먹고 살기 힘들기도 하고 무슨 일인가로 아버지와 크게 다투시고 나서 아버지는 서울에 혼자 계시게 하고 아이들만 데리고 친정으로 내려와 버리셨다고 말씀하시는 걸 얼핏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잠수를 타신 것이죠. ㅋㅋ
참고로 저는 잠수에 대하여  "잠수란 길게 타는 것도 있지만 몇시간 심지어는 몇분의 시간도 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있으면 잠수다."라고 생각하는데 그 당시 어머니는 물경 1년이나 잠수를 타셨으니 상처를 크게 받으신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ㅎㅎ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전혀 모르지만 그때 어머니의 잠수로 하여 제 짧지 않은 인생 중에 도시가 아닌 시골 생활의 경험이 잠깐이라도 있었다는 것은 다행입니다.
저의 삭막하고 차가운 성격의 모습 뒤에 그나마 약간이라도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측면이 있다면 아마 그 시절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단 어머니와 온종일 함께 있을 수 있었고 외할머니께서도 저를 끔찍히 귀여워해 주셨으니까요.
친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별로 나는 것도 없고 그저 무섭기만 한 것과 대조적이라 하겠습니다.
어쩌면 제가 어릴때 밥솥에 엎어지게 방치한 분이기도 하여 막연히 싫었던 것도 이유일 지 모릅니다.
언젠가 외할머니께서 옷을 사주셨던 기억이 나는데 흰 바탕에 가로로 까만(ㅋㅋ) 줄무니가 있는 옷의 모양과 색깔까지 생생히 기억 나는 것을 보면 옷을 선물 받고 어린 마음에 굉장히 기뻤었나 봅니다.
없는 살림에 새옷을 사입고 그런 기억이 별로 없어서 더 그랬을텐데 그뒤 살면서 이런 저런 일로 선물을 종종 받기도 하였지만 그때의 옷보다 더 기쁘게 받았던 선물은 없는 듯 합니다.
저는 지금도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며칠이고 그 옷이 거의 헤질때까지 입고는 하는데 더운 여름에 산 반팔 티를 날이 추워진 늦가을까지 매일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어느날은 반딧불이 잡으러 밤에 나갔다가 잃어버리고는 많이 상심을 했습니다.
반딧불이를 잡는 건 맨손으로 하기는 어려워서 옷을 벗어서 투망하듯이 잡았는데 그러다가 잃어버렸던 것이죠.
논두렁에 빠진 옷을 밤새 찾아 헤매면서 울었는데 다음날도 못 찾고 말아서 그 셔츠의 기억은 제게 잊지못할 상실의 기억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저는 살면서 아주 소중한 것들을 몇번 잃었었는데 물건으로 인한 상실감은 그때가 가장 컸을 것이고 이후의 상실에 대한 기억은 물건이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외가에 살면서는 서울에서 온 아이라고 해서 말투도 자기들과 다르다고 놀리고 하면서  왕따 비슷하게 지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친구들이라고 생각나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으니까요.
한번은 수업 중에 누군가 문제의 정답을 맞추었길래 제가 "똑 맞았다"고 했다가 모든 아이들이 "야 쟈가 니 똥 마자따 칸다" 하면서 웃음바다가 되서 무지하게 창피했던 기억도 있습니다.ㅠㅠ.
그래서 그 사건 포함 한두개의 에피소드 말고는 기억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요즘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하여, 마음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쌓여 있지만 기능성 MRI의 이용등으로 조금씩 밝혀지고 있습니다.
어떤 연구자에 의하면 뇌에서 해마라고 하는 부분이 기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그 해마에 정보가 전달되어 기억이 되는 과정에서 즐거운 일은 추가로 다른 신경 회로를 더 이용하기 때문에 기억에 더 잘 남는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별 맛없이 먹었던 어느 저녁보다는 맛있게 먹은 저녁의 기억이 더 오래 남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외가에서 지낸 어린 시절에 대하여 별로 즐거운 기억이 없다보니 그 시절의 기억들이 뇌 속에 오래 남아 있지 못한 모양입니다.
앞으로 세월이 더 지나 제가 지금을 기억할 때 그 중 어떤 것들이 생명력을 유지하고 살아 남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반대로 괴롭거나 고통스러운 기억도 비교적 오래 남게 마련인데 아마 즐거운 기억이 오래 남는 것과 같은 메커니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날 외가에서 지낼 때 깻단을 지고 가다 넘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농촌은 일손이 모자랐기 때문에 아이들이라고 편히 학교만 다닐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농사일을 돕기 위해 제 덩치에 맞는 작은 지게를 만들어서 그걸 이용해 콩 무더기나 그리 무겁지 않은 작은 곡물들을 등에 지어 나르곤 했습니다.
가을 쯤인 듯 싶은데 들에서 바짝 말린 들깻단을 지고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일이 있습니다.
바짝 마른 깻단이라 넘어지면 깨가 거의 다 땅에 떨어져 못쓰게 됩니다.
제 그런 모습을 멀리서 지켜 보시던 어머니의 표정은 뚜렷이 기억나진 않지만 혼내려던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고 아마도 어린 아들에게까지 그런 지게를 지게 한 것에 대하여 안쓰러운 마음이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야 깨를 다 잃게 되어 어쩌나 하는 그런 당황스러운 마음 뿐이었지만.....
그때 깻단을 지고 가다 넘어진 후로 다시 지게는 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1년쯤 외가에서 지내다가  초등학교 4학년때쯤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먼저 태어나 살던 숭인동으로 다시 올라 왔는데 태어나서는 계속 작은집에 얹혀 살았지만  그때는 저희 집이 따로 생겼습니다.
그러나 집이라고 해 봤자 무허가 판자집으로 루핑이라고 부르는 검은 비닐 비슷한 것으로 지붕을 덮은 하꼬방이었습니다. 하꼬는 일본말로 작은 상자를 뜻하니까 하꼬방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상자곽처럼 작은 집이라는 뜻입니다.
방한칸에 거실은 없이 부엌만 있는 그런 구조였고 겨울에는 정말 자리끼가 어는 집이었지만 우리집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을 나가시고 안 계실때는 구호품으로 나온 밀가루를 물과 소금을 넣고 대충 짓이겨 지금의 난 비슷하게 솥뚜껑에다 구워서 동생들과 함께 나누어 먹고, 거의 맹물에 밀가루만 넣은 수제비지만 수제비도 만들어 먹던 정든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하도 먹어서 그런지 지금도 밀가루 음식은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ㅋㅋ
여하튼 그런 비슷한 집들이 산동네 언덕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마당도 없이  방문을 열고 나가면 그냥 골목이었으니 골목이 곧 소통의 길이자 놀이의 마당이었습니다.
몇년전 옛 추억을 떠올리려 그때 살던 동네를 가보았지만 흔적도 없이 사리지고 공원이 되어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흡사 소중한 앨범이 불타 없어진 것처럼......
그때 동네 아이들과는 한집에 사는 가족들처럼 친하게 지냈는데 어린 시절의 기억 중 가장 정상적인 패턴의 생활이라서 그때 놀던 친구들이 가끔 생각이 납니다.
머리를 항상 빡빡으로 깍아서 별명이 빡빡이던 친구, 재민이, 애련이, 그외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는 여러 친구들......
애련이라는 친구가 그 동네에서 우리와 함께 놀던 유일한 여자 아이였는데 저와 특별히 썸을 타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ㅋㅋ
내외를 하는 것이었는지 대체로 그 나이 때는 남자애들은 남자애들끼리, 여자애들은 여자애들끼리만 놀았는데,  애련이는 우리와 함께 어울려 놀러도 가고 그랬습니다.

학교는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숭신 초등학교에 전학하여 졸업도 거기서 하였습니다.
동묘라고 하여 삼국지의 관운장을 모신 사당 같은 것이 학교 바로 앞에 있었고 조금만 가면 청계천이 있어서 온갖 잡동사니를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였습니다.
이 글이 잡동사니 모임으로 온 것에는 처음에는 별 뜻이 없었는데 이 문장을 쓰고 보니 이 글이 이곳에 쓰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나 봅니다. ㅎㅎ
청계천의 그 잡동사니 가게들은 지금은 정리되어서 많이 없어지고 일부만 남아 있더군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는 여러가지 놀이를 하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주말에는 멀리 망우리에 있는 아기동산이라고 하는 곳에 놀러 가기도 했었는데 흡사 우리들만의 보물 창고에 놀러 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여기저기 부려진 잡동사니 무더기에는 자석이 달린 연필통도 있고 이상한 물건들이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쓰레기 하치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ㅠㅠ.
쓰레기 하치장에서 노는 아이들.
저만 특별히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작한 제 1차 경제개발 계획이 1962년에서 1966년까지였고 이후 총 6차례의 경제개발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나라의 많은 곳의 모습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거의 거지아이들처럼 산 꼴인데 그 당시 우리들 마음에는 부자니 거지니 하는 그런 개념은 없었고 산동네 아래에 있던 칠성사이다 공장 근처에 있는 집들--높은 담장을 하고 전혀 열릴 것 같지 않은 큰 대문을 가진 집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궁금증만 조금 있었을 뿐입니다.
매일 배가 고팠고, 갖고 싶은 장난감을 마음대로 가지지는 못했지만 마음만은 부자였던 시절입니다.
어쩌면 부자집 아이들보다 더 많은 놀거리가 있었고 자유가 있었고 전혀 지루하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동네 아래로 내려가면 신설동 사거리에 지금은 없어졌지만 동보극장이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 극장구경(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고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을 보러 가는 것입니다.ㅋㅋ)을 가는 것도 참 재미있는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때 기억나는 놀이 중 하나는 나무 젓가락과 고무줄을 이용하여 새총 비슷하게 만들어서는 작은 종이를 조그맣게 접어서 영화를 보기 위해 온 누나들의 맨 종아리를 맞추는 놀이(?)였습니다.
지금 저희 병원에 있는 직원들 중 가장 나이 어린 직원들과 비슷한 또래였을 누나(ㅋㅋ)들은 따끔한 종이총을 맞고 아파하면서도 함께 있는 남자친구에게 내숭을 떠느라 마음껏 아파하지도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 거리곤 했는데 우리는 그런 모습을 숨어서 보면서 즐거워 했습니다.
그랬다고 해서 제 마음 속에 사디즘적인 취향이 있어서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때는 다 그러면서 노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아직 도덕 관념이 제대로 자리 잡을만큼 성장하지도 못한 나이였으니까요.
그리고 설사 나쁜 일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하더라도 재미라는 유혹을 이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살면서 재미 혹은 쾌락과 도덕의 충돌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있었는데--이를테면 수업을 땡땡이 치고 매점에 놀러 간다든가 하는 가벼운 것부터 먼저의 고백록 연애사에 썼던 그런 일까지--어느 것이 이기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쪽에 대한 갈망이 더 큰가 하는 것에 좌우되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쾌락에 대한 갈망과 마음 속 양심의 소리를 어기는데 따른 죄책감을 겪고 싶지 않다는 갈망의 사이 어디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을 쓴 톨스토이가 궁금해 한 것과는 다르게 저는 그 둘 중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혹은 운명의 수레바퀴는 어째서 어떤 때는 이쪽으로 가고 어떤 때는 저쪽으로 가게 되는가 하는 것이 더 궁금했습니다.
그 힘이 무엇인지 안다고 해서 조절이 가능한 지는 모르겠고, 그리고 운명의 여신의 미소를 만날지 냉소를 만날지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다는 쪽의 생각이지만  그래도 그 포인트를 안다면 조금은 덜 힘든 쪽의 길로 가도록 선택하는 것이  다소 쉬울 테니까요.

물론 그때 어린 시절에는 그런 복잡한 것에 대하여 전혀 궁금하지는 않았었고 그냥 대개의 경우 재미있는 쪽의 길로 선택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그저 아무 생각없이 "재미가 이끄는 삶"을 살았기 때문일까요?
어릴때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다보면 다른 아이들은 다 놔두고 꼭 제게만 양복 말쑥하게 입으신 어떤 남자분이 와서 제 손을 꼭 잡고 무릎을 꿇고는 "주여 이 어린 양을 구원하여 주시고..." 그런 류의 말을 하시더군요.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사시는 전도사 분이었습니다. ㅋㅋ
아마 제 생김새가 가장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처럼 보였나 봅니다.
저는 아이들과 재미있게 술레잡기도 하면서 잘 놀고 있었는데....ㅠㅠ
저는 영문은 알수 없지만 어떤 아저씨가 손을 잡고 무언가 기도를 하니 그저 잡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 아저씨의 전도는 실패하였습니다.
전 아직도 비신론자(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무신론과는 좀 다르게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비신론자이기는 하지만 가끔 크리스마스때는 친구들과 함께 교회에 가서 빵을 얻어 먹고는 했으니 교회 혹은 신의 신세를 전혀 지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ㅎㅎ

그리고 여러분들께서 궁금해 하실 것 같아 기억을 더듬어 보는데 제가 어릴 때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것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성적을 어떻게 매기는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에는 각 과목을 수우미양가로 평가 했습니다.
저는 체육과 음악에서 양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국어, 산수, 자연, 미술 (지금은 과목 이름이 달라졌지요?) 같은 것에서 수, 그리고 나머지에서는 우 또는 미 정도 받았던 것 같은데 성적에는 관심없이 먹고 살기 바쁜 부모님과 놀기 바쁜 어린 시절을 보낸 덕분에 아주 우수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그렇게 특출나게 잘한 것은 아니다 보니 무슨 우수상이나 최우수상 같은 것을 받은 기억도 없습니다.
상 중에 제일 많이 받은 것은 개근상이지만(ㅋㅋ) 그나마도 전학을 다니고 하다보니 다 받지는 못하였고 6년 초등시절 동안 3번인가 4번쯤 받았던 것 같습니다.
개근상을 빼면 받은 상이라고는 당시 쌀이 부족해서 혼식을 강조하던 때라 혼식 장려와 관련한 글짓기 대회때 받은 상뿐입니다.  그 대회에서 받은 상은 최고상은 아니었고 입선 아니면 아마 장려상 정도였을텐데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태어나서부터 초등학교 시절까지 성장기를 어설프게 마무리 하면서 혹시 아시는 분도 있을지 몰라 추억에 잠겨 보시라고 제가 어린 시절에 하고 놀았던 놀이들에 대하여 간략히 적어 봅니다.
1. 고무줄 따먹기--모래 무더기 속에 노란 링 고무줄을 숨겨 놓고 한사람씩 순번대로 젓가락으로 한번 긁어내어 많이 가져가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
2. 젓가락 안 쓰러 트리기--모래 흙을 쌓고 가운데에 젓가락을 세워서 한번씩 긁어내어 젖가락을 쓰러 트리는 사람이 지는 놀이.
3. 망까기--납작한 돌을 저 멀리 세워 두고 자신의 돌을 던져 맞추어 쓰러 트리는 놀이.
4. 술레잡기--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하는 누구나 다 아는 국민 놀이.
5. 네모 딱지치기--요즘 무한 도전에 나오는 그런 것.
6. 동그란 딱지치기--각종 그림이 그려져 있는 동그란 딱지를 튀겨서 따먹거나 숨겨 놓은 것 중에 더 높은 곳에 걸리면 배팅한 만큼  받는 놀이.
7. 쌈치기--으치니(이찌니)라고도 하는데 구슬이나 동전을 주먹 안에 숨겨서 상대방이  주먹 안에 쥔 물건의 갯수가 3으로 나눈 것에서 얼마가 남는지 맞추는 놀이로 일본말로 이찌는 일,니는 이, 상이 삼입니다.
8.묵찌빠--우리말로는 가위 바위 보라고 지금도 종종 하는 놀이인데 그때도 많이 했으며 그 단어의 의미는 모르겠습니다.
9. 구슬치기--땅에 홈을 파고 동그란 유리 구슬을 넣어 두고 멀리서 구슬을 던져 맞추어 튀어 나온 것은 따먹는 놀이, 또는 구멍 안에 구슬을 밀어 넣으면 이기는 놀이등 다양한 종류가 있음.
10. 도깨비풀 따먹기--끈적끈적하게 생긴 종이 찰흙 같이 생긴 것을 책상 바닥에 눌려 붙인 후 상대의 도깨비풀로 붙여서 떨어지면 이기는 놀이. 둘로 찢으면 거미줄 같은 것이 나온다고 하여 도깨비풀이라고 불렀음.
11. 연필 따먹기--바둑의 알까기처럼 책상위에 연필을 올려 놓고 자신의 연필을 손가락으로 쳐서 상대방의 연필이 맞아 금 밖으로 나가면  따먹는 놀이.
12. 껌딱지 따먹기--왔다껌, 치클민트껌, 셀레민트 껌등 껌의 종류에 따라 껌을 싼 종이의 값이 다르고 그것을 지폐처럼 환산하는데 놀이라기 보다 교환 수단.
13. 콜라 뚜겅 치기--콜라등 병뚜겅을 망치로 납작하게 편 것을 딱지치기 하듯 쳐서 따먹는 놀이.
14. 연필심 부러 트리기--서로의 연필심끼리 교차하여 힘을 주어 상대의 연필심이 먼저 부러지면  상대의 연필을 얻게 되는 놀이.

지금 젊은 분들은 잘 모르는 놀이가 많겠지만 당시의 이런 놀이들은 지금 아이들의 컴퓨터 게임과는 질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훨씬 더 고차원적이면서 머리를 써야 하는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 활동적이라 좋은 놀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
지금 아이들이 하는 컴퓨터 게임처럼 그 당시의 게임도 비록 컴퓨터를 이용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게임이 경쟁 게임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든 성인이든 상대방을 이기는 것에 대한 욕망은 세대불변, 시대불변하고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물론 어릴때야 게임에서 져봐야 그저 딱지나 구슬을 잃을 뿐이지만, 그때 느끼는 허탈감과 패배감은 어른들이 주식하다 몽땅 날렸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야 주식 투자를 일체 해 본 적이 없어 정말 느낌이 비슷한지는 모르지만 주위에서 들어보면 거의 비슷한 느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게임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게임도 기본 자본이 있어야 하며 기본 자본이 많으면 그만큼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게임을 잘 했다고 해서 나중에 어른들의 게임에서도 승률이 높은 것은 전혀 아닙니다.
저는 어릴 때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등에서 온갖 궁리를 짜내고 연습하여 결국 동네의 모든 아이들의 딱지나 구슬을 따버리곤 했지만 지금은 돈벌기이든 실제 게임이든 그리 게임을 잘하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구슬이나 딱지를 몽땅 따버리면 저는 더 이상 구슬이나 딱지치기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변소(옛날에는 화장실이라 하지 않고 변소라고 불렀습니다.)에 다 버려 버리고는 잊었습니다.
저에게는 구슬이나 딱지는 의미가 없고 그저 그 게임에서 이겼다는 성취감만 필요했을 뿐이니까요.
친구들이 개평을 달라고 하는 것도 무시하고 다 버렸는데 왜 그랬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도박판에서 화투를 없애버리는 심정과 같은 것이었을까요? ㅎㅎ
다른 아이들도 다소간 그렇겠지만 어릴 때는 그렇게 경쟁심도 많고 다른 아이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가진 것이 없는 아이들일수록 그런 경쟁에 몰두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 오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서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그 달동네에서도 저희 집이 제일 가난한 축에 들었으니까요.
지금도 저는 그렇게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오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이 돈이 아니고 다른 이의 마음이거나 다른 이의 인정을 받는 것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는 것이 다르기는 하지만......ㅎㅎ.

원래 사람은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과 갈증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자란 사람일수록 돈에 집착하게 되며, 어릴때 부모의 따스한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람들이 커서도 애정 결핍과 정서 장애를 겪고 상대에 대한 집착에 빠지기 쉽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 반대의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돈이든 혹은 부모나 다른 사람의 관심과 사랑이든 원래부터 가지고 있지 못한 것들,  내것이 아닌 것들을 가지려고 해 봐야 소용없다고 하는 포기의 마음.
원래 내 팔자에는 없던 것들이니 아쉬워할 필요없다는 그런 생각.
많이 가지고 있다가 잃으면 상실감이 크겠지만 원래 거의 없이 살아서 없으면 없는대로 그런가 보다 하는 마음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아마 지금 제가 돈에 집착하지 않고 아내나 아이들의 관심과 사랑에 초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아마 자신이 못 가진 것, 혹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증과 고통을 이겨 나가기 위한 방어 기제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상실감 내지는 결핍감 때문에 매일을 괴로움 속에서 보내야 할 테니까요.
심리학에는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것이 있는데 말하자면 일종의 "학습된 포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없으므로 해서 더 갈증을 느낄 수도 있고 반대로 포기하고 초연하게 지낼 수도 있고 하다는 것.
삶에는 같은 사안을 놓고도 그렇게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살면서 종종 깨닫고는 합니다.

지금 떠올려보니 예전 앨범에서 저와 부모님이 함께 찍은 사진은 딱 한장이 남아 있는데 제가 세살인가 네살때쯤 부모님의 사이에서 제가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서 찍은 사진입니다.
언제 찾게 되면 이곳에 올려드리겠지만 그나마도 어머니께서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쯤이든가 아버지와 대판 싸우시고 나서 가위로 아버지가 있는 부분을 잘라 버려서 따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ㅎㅎ
그뒤 테이프로 붙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붙이더라도 자른 자욱은 그대로 남을 수 밖에 없겠지요.
그만큼 가족간의 화목함은 저와는 먼 딴 세상의 이야기처럼 자랐는데 저도 아이들을 낳고 나서 아버지 만큼은 아니지만 아이들을 그렇게 살갑게 대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와서 보면 많이 후회가 됩니다.
아이들과 좀더 시간을 많이 보내고 좀더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 주고 안아 주고 할 걸 그랬습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다 커 버려서 제 관심과 애정은 굳이 필요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런 관심은 부담스러워 하는 나이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초등학교 6학년을 졸업하면서  그렇게 재미와 가난의 기묘한 짬뽕이던 제 어린 시절은 지나갔습니다.

[참고]
학습된 무기력

행동주의 심리학자 셀르그만은 세가지 환경의 개들을 가지고 한가지 실험을 하였다.
아무런 학습을 하지 않은 개, 전기 충격이 가해지면 스스로 스위치를 눌러 고통을 피할 수 있도록 학습한 개, 그리고 피할 아무런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전기 충격을 주어 고통을 감내하도록 학습시킨 개등 모두 3그룹의 개들을 풀어서 나지막한 칸막이로 나누어진 우리에 넣고 다시 전기 충격을 가했다.
그랬더니 고통 회피 학습을 한 개와 아무런 학습을 하지 않은 개들은 칸막이를 넘어 자극을 피하였지만 고통 순응 학습을 한 개들만은 끙끙거리면서 불쾌한 자극을 고스란히 감내했다.
이런 현상은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데, 학습된 무기력이 몸에 배면 그 개체는 당연히 요구해야 할 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부당한 대우를 감내한다.

TBCOTE.

이 글에 좋아요를 표시한 회원

brugges [2020-01-02 21:44]  봄봄이 [2014-06-19 23:38]  
#2 ennead 등록시간 2014-06-20 04:18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어릴때 서울서 전학온 친구는 통과의례식으로 거쳐야하는 관문이 있었는데 쉬는시간에 친구들에게 삥 둘러싸여 "야 니 서울말 함 해봐봐"였어요ㅋㅋ 사투리가 아닌 티비에서나 듣던 서울말을 쓰는게 신기해서 그랬던건지는~ 심원장님과 전 20살 넘게 차이나는데 했던 놀이는 왜 몇개 빼고 별반 차이가 없을까요?.......

댓글

그 놀이들은 대체로 좀 없이 사는 애들이 하고 논 놀인데 저와 비슷한 환경이었나 보군요. 근데 앤니드님때도 그런 놀이들이 있었나봐요? 잘 모르실 줄 알았는데...여튼 공유하는 것들이 있다니 반갑네요.  등록시간 2014-06-20 07:28
#3 이연경 등록시간 2014-06-20 14:32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역시 공부는 시킨다고 되는게 아닌가봅니다 ㅎㅎ
저도 어렸을때 무늣 표준전과 동아전과 이런거 사서 풀~~~면~~~~~~모하나~~~~~~~~~~
맨뒤에 답이있는걸~~~~~ㅋㅋㅋ

맨날 답보고 배껴서 성적표는 저보고 양가집 규수라 칭찬해주곤 했지요

어렸을땐 걍 뛰어노는게 최고인듯해요
저도 애기때 동생이랑 서로 신라면 스프를 쫌씩먹고 맵다고 마당을 삥둘러 뛰어갔다 다시 들어오는
이상한짓을 게임이랍시고 ㅋㅋㅋ 재미있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방에게 물총쏘기, 학교에서 분필 가져와서 담벼락에 낙서하기 등등
나름 재미있게 놀았네요...

즐거웠지만 다시 돌아가고싶진 않은 옛날기억이네요~ 옛날기억이니까 즐거운거겠죠? ㅎㅎ

댓글

저 여중여고여대 나왔습니다 ㅋㅋ 원래 여중여고가 더 살벌하게 맞습니다 ㅋㅋ 궁둥이정도는 면적이 넓어서 좀 따끔하고 만다는 장점이있지요 ㅋㅋ  등록시간 2014-06-20 17:01
아니 공부를 얼마나 안했으면 (차마 못했으면 이라고는 못 쓰겠군요. 삐져서 잠수 탄다 하실까봐.ㅋㅋ) 궁둥이에 맴매를 다 맞나요? 살짝 안 했을 경우는 꿀밤 정도 한대 맞고 말지 않나요? 충격입니다.  등록시간 2014-06-20 16:21
중학교때는 그 개구리 쌩으로 주시는 생물쌤의 까만 절연테이프 휘휘감은 몽둥이로 손바닥을 맞은기억, 고등학교때는 영어쌤에게 팔뚝만한 박달나무주걱으로 칠판에 기대어 궁둥이를 맞은기억 등등이 있네요 ㅋㅋ 뭐 꼭 맴매를 맞아서 돌아가기 싫은건 아니고 지금이 좋아요 저는~~~~ ㅋㅋ  등록시간 2014-06-20 15:51
연경님이 양가집 규수라니 의외입니다. 그니까 걍 날라리였다는 이야기 아니예요? 근데 왜 돌아가고 싶지 않을까요? 혹시 선생님한테 맨날 종아리 맞아서??ㅋㅋ  등록시간 2014-06-20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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