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찾아서"라는 영화를 전에 보았다.
거기에서는 주인공 윌 스미스가 행복이라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장면이 있다.
물론 토마스 제퍼슨이 기초한 미국 독립선언문에 있는 "모든 인간은 자유와 평등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라는 문장을 인용하여서이지만.
주인공은 말한다.
<행복은 어느 누구도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란 처음부터 소유의 대상이 아니며 오직 추구할 수만 있을 뿐이다.>
물론 그도 영화의 끄트머리 부분에서 <내 인생의 아주 짧은 이 순간의 이름은 행복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행복은 오직 추구할 수 있기만 하다고 한 처음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게 하지만 그가 타이틀 붙인데로 그것은 그의 인생의 아주 짧은 순간이라는 것이다.

짧은 순간이라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의 평안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지프스는 운명처럼 무거운 돌을 언덕위로 밀어 올리지만 결국 정상에서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아서 끝없이 고통스런 노동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시지프스에게 행복은 아마 바위가 정상에 머물러 더 이상 고단한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때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찰나에 지나간다.
바위는 곧 굴러 떨어지는 것처럼 행복한 순간도 있었나 싶게 지나가서  영원히 거기에 머무를 수는 없다.
그저 대부분의 시간을 혹은 인생을 끝없이 반복하는 고통 속에서 보낼 뿐이다.

이런 윤회는 불교의 중요한 사상 중 하나이다.
불가에서는 인간이 윤회의 사슬을 끊지 못하고 끊임없이 고해의 삶에 내던져지는 것은 전생에 이루지 못한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죽어 저승에 가면 극락으로 가는 길에 이승에서 겪었을 여러가지 욕망의 유혹을 담은 구덩이들을 발견한다고 한다.
그때 이승에서 이루지 못하고 아쉬웠던 것들이 있으면 가지고 싶게 되어 그 구덩이로 들어가게 되고 결국 다시 인간 세상으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그 구덩이는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미련을 버리고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고통스러운 인간 세상으로 다시 돌아 오지 않고 고통이 없는 극락에 영원히 머무는 데 그것을 해탈이라고 말한다.
이런 불가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나는 무슨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된다.
여하튼 다시 태어났으니 전생에 가지지 못하여 가지고 싶은 것을 지금은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게 무언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이승에서 가지지 못한 미련 때문에 다음 세상에서는 이쁜 여자로 태어나 보았으면 좋겠다.
불가에서는 부처에게 꽃을 많이 공양하면 이쁜 여자로 태어난다고 하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절에 가서 아름다운 꽃이나 한아름 드리면 될까?
그러나 그런 이쁜 여자로 태어나 사랑을 많이 받는다해도 아마도 가지지 못한 다른 무언가로 또 힘들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시지프스의 바위를 가지고 있다.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떠밀어 올려야 하는 무거운 바위가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부귀라는 정상을 위해 끊임없이 밀어 올려야 하는 궁핍이라는 이름의 바위가 있을 것이고 권력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멸시라는 이름의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한다.
대중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연예인에게는 고독과 외면이라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바위가 있는 것처럼 자신이 알든 모르든 누구에게나 바위가 있다.
지금 내가 밀어 올리는 이 바위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그리고 그 바위를 밀어 올리지 않아도 되는 날은 과연 오는 것일까?
때때로 바위가 너무 무거워서 밀어 올리기가 너무 힘에 부치는 날도 많다.
그러나 더 이상 바위를 밀어 올리지 않아도 된다면 그것은 불행인 것일까 아니면 행복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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