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기간 수많은 산모들의 출산을 도운 산부인과 의사로서 솔직히 출산이 쉽고 만만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소중한 생명을 잉태하고 무사히 출산해 내었다는 엄마로서의 보람과 관계없이 출산은 여성 누구에게나 힘들고 두려울 것입니다.
제가 산부인과 의사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여자로 태어난다면 과연 출산의 고통을 감내할 각오로 임신을 할 지, 그렇지 않을지 장담을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육아는 더 힘들 것입니다.
출산이야 하루나 길어야 이틀 정도 눈 딱감고 견디면 되지만 육아는 아기가 스스로 걷고 먹고 할 때까지 수년에서 십수년간을  시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고통이 없는 출산이 없고 고민이 없는 육아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가장 힘든 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웃어주는 자신의 아기를 보고 아무 감동도 없이 태연하게 있는 일 같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느 엄마인들 어느 아빠인들 가슴 벅차지 않을 수 있고 행복해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흔히 출산과 육아로 인해 많은 것을 잃는다고 합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인 우리나라에서는 여성들은 임신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로 직장을 평생 잃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설사 재취업하더라도 이전보다 더 열악한 환경으로 내몰리기 쉽습니다.
이는 분명히 문제이고 대대적인 개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예 임신 출산을 기피하는 여성들도 많아 저출산이 국가적 고민이 되었습니다.
임신 출산 대신 사회 활동, 경제 활동, 혹은 자아 실현을 위한 여러가지 일들을 택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삶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 삶과 육아하면서 지내는 삶 중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가치관이란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이니까요.

다만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는 수많은 어머니들을 지근거리에서 본 산부인과 의사로 살면서 느낀 것은 임신과 출산을 포기하고 대신 택한 그 모든 것들의 가치가 아기의 잠깐의 미소보다 결코 더 가치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경제적인 잣대에서 보았을 때, 아니면 명예라는 잣대에서 보았을 때, 또는 사회적 인정이라는 잣대에서 보았을 때  출산을 포기하고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에 비하면 아기의 미소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기의 미소는 언제 그런 순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주 짧게 지나갈 뿐 아니라 한가지 말고는 다른 아무 것도 남겨 주지 않습니다.
그 한가지는 행복감입니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보았을 때는 아기의 미소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불행하게도 이런 행복감은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예외적으로 아주 소수는 직접 겪지 않고도 비슷하게 느껴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리 예상하여 실제에 가깝게 느껴 보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겪어 본 사람들의 실감과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의 예감을 비교하자면,  장엄하게 떠오르는 일출을 정동진에서 본 것과 탁상 달력의 그림을 통해 보는 차이의 10배쯤? 또는 아득히 높은 곳에서 번지 점프를 직접 뛰는 것과 한장의 스냅 사진으로 번지 점프를 보는 차이의 100배쯤?
아니 아마도 그 훨씬 이상일 것입니다.

출산을 택한 삶이든 그렇지 않은 삶이든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른 삶을 살면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기의 미소처럼 일과 돈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당신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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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0426 [2016-03-01 00:27]  정인♥ [2016-02-29 14:36]  podragon [2016-02-29 10:15]  땅콩산모 [2016-02-29 03:18]  최현희 [2016-02-29 01:01]  
#2 또아맘 등록시간 2016-02-29 09:03 |이 글쓴이 글만 보기
대공감입니다^^ 제가 살아오며 겪은 행복감중 단연 가장 크고 깊다고 이야기할수있어요. 사회적으로 갖춰지지 않은 것들때문에 엄마들이 많이 힘들고 포기해야할 것도 많지만, 그것들보다 더 큰 가치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저역시 복직을 포기하고 아이의 미소를 온전히 내가 내 눈으로 온종일 보겠다는 욕심을 선택했고, 애키우는게 여전히 힘들지만^^, 종종, 자주 선택의 여지가 없고(여자에 비해 적고) 아이의 미소를 예쁜짓을 저에게 대부분은 전해들어야만하는 남편이 안쓰러울때가 많거든요.
그나저나 심원장님은 육아를 해보시지도 않고 어찌 이리 잘 아시는지 ㅋㅋㅋ(앗 세아이 육아에 참여도가 낮았을것이라 단정지어버렸네요ㅎㅎ워낙 바쁘시니까요 어쩔수없이^^)

댓글

육아를 해 보지 않아도 아기들을 데리고 병원에 오시는 산후맘 분들의 눈빛과 표정을 보면 알죠. 단 한명의 예외도 없이 이것이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하는 그 표정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등록시간 2016-02-29 10:47
#3 podragon 등록시간 2016-03-01 21:47 |이 글쓴이 글만 보기
항상 심원장님 글을 좋아하지만 이 글은 정말 정말 공감이 많이 되네요...공부하고 일하느라 아기 생각은 엄두도 못내고, 둘이서 행복하게 살면 되지.. 했었는데.... 막상 아기와 함께 하는 지금은 저와 남편 모두 세상에 이런 행복이 있다니.. 하면서 하루 하루를 아껴가면서 살고 있습니다.ㅎㅎ 전 사실 임신하면서 정말 원했던 직장을 포기해야 했고 (육아휴직도 가능했지만 영국에 있어서 ㅠㅠ), 이제 다시 일할 생각을 하면 조금 막막하기도 하지만, 아기의 미소를 보는 이 기쁨을 생각하면- 정말 잘된 일이고 감사하다는 마음 뿐입니다. 겪어 보지 않으면 정말 알 수 없는 행복이란 말씀에 깊이 공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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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시군요. 육아가 조금 익숙해지면 다시 일을 시작하시면 되겠네요. 우리나라가 육아와 일을 함께 병행하기 좋은 환경이 빨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등록시간 2016-03-0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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