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부인과 의사로 살면서 힘들어 피하고 싶었던 것들이 많다. 신생아나 산모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야 말할 것도 없고 한밤에 입원하여 밤새 진통하는 산모를 지켜 보면서 한숨도 자지 못하고 출산을 돕는 것도 사실 피하고 싶은 일이다.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잠을 안자고 깨어 있는 것은 생물학적 본성에 반하는 일이다.  진료를 하다보면 의사는 로봇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가끔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의사도 사람이라 잠을 못자면 졸립고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기운이 없다. 그런 것은 사명감이나 보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명감이 있고 보람이 있다해도 힘든 건 힘든 것이다. 삶이란 피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고 해서 피하면서 살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젠 그냥 견딘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업무의 고단함과 예측 불가능하게 닥치는 위험성을 떠 안아야 한다는 사실은 출산을 돕는 산부인과 의사의 숙명이다. 그러므로 나처럼 잠도 많고 겁도 많은 사람에게 출산을 돕는 일은 처음부터 신중하게 생각했어야 하는 일이다. 물론 출산을 돕는 일이 항상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무사히 출산을 끝내고 땀을 닦을 때의 보람과 희열도 적지 않다. 모든 출산이 밤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쓴 익모초를 섞은 설탕물이나 단 설탕을 섞은 익모초 물이나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아직 "임신과 출산—두려움에서 기쁨으로" 글도 1/3 정도 밖에 못 썼으면서 새로이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무얼까?
글을 써서 즉 책을 내서 먹고 살 수 있으면 하는 가당치도 않은 오랜 바램이 있어서다. 그리고 이것저것 벌리다 보면 하나쯤 얻어 걸리지 않을까 싶어서다.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온다는 말도 있으니까. ㅎㅎ
좋다. 그런데 제목이 왜 "재미없는 산부인과 의사 이야기”인가?
전에 "재미있는 의학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십여편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중간에 그만 두고 말아서 책으로 펴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봐도 재미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의학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것저것 내용을 짜깁기 해서 쓰다 보니 꾸준히 글을 이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전까지도 다른 사람은 쓸 수 없고 나만 쓸 수 있는 글, 재미가 있으면서 정보도 주는 글, 쉬운 문장이면서도 고급진 글, 잠깐 눈길을 끄는 책이 아니라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책, 그런 책을 내보고 싶었다. 이제와 깨달은 사실은 그런 책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는 그런 책을 써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100권의 책도 더 넘게 쓰고 남을 온갖 종류의 펜과 각종 브랜드의 노트를 수도 없이 사는 동안 한두권쯤의 책을 출간했을 것이다. 물론 낙태와 낙태라는 책을 내기는 했지만 그건 제대로 된 책이라기 보다 낙태 운동을 마무리하면서 낸 일종의 백서에 가까우니까. 그래서 내 수준에 맞는 책을 하나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 용어 범벅인 책,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많이 아는 체하는 책, 재미도 없으면서 정보도 많지 않은 책, 오랫동안 사랑 받지 않아도 되는 책, 어줍잖은 교훈을 남발하면서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책, 그런 책이라면 나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재미있게 쓰려면 힘들지만 재미없게 쓰는 것은 쉬울 것 같다. 그래서 재미없는 산부인과 의사 이야기이다. 물론 재미없는 이야기도 재미있게 읽어줄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 않을까 하는 가당치도 않은 기대에 기대어 본다.

책을 낼  계획을 세우면서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서문을 쓰는 일이다. 저자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알기로 서문은 보통 글을 다 쓰고 마무리 즈음에 글을 쓰게 된 동기나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할 사람을 생각해서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나처럼 서문부터 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먼저 마신다"라는 속담이 있다.  떡을 먹을 때 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소화 작용이 뛰어난 김치 국물을 미리 마시던  풍습에서 유래한 속담이라고 알려져 있다. 무슨 일이든 섯불리 앞서 가면 안된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내가 서문을 제일 먼저 쓰는 것은 김칫국이 가진 장점 때문이다. 설사 떡을 못 먹게 되더라도 김치국 자체만으로도 몸에 나쁠 것이 없다. 그리고 김칫국을 먹었으니 혹시 떡을 먹게 되는 경우 미리 준비한 것이니 나쁠 것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칫국을 먹었기 때문에 떡을 먹고자 하는 노력을 더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미리 서문을 써둠으로써 처음 글을 쓰기 어려워서 머뭇거리게 되는 것을 줄이고 글쓰기에 쉽게 빠져들게 될 수 있다. 서문을 써 둠으로써 글을 마무리 해야 한다는 공개적인 약속을 하는 효과도 있다. 그런 약속에도 불구하고 마무리 짓지 못한 글도 수도 없이 많기는 하지만. ㅠㅠ.

자 이제 김칫국은 마셨으니 떡을 먹을 차례다. 어찌 되었든 체할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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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을 맛있게 먹을수 있는 기쁨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글로 만난 원장님의 이야기는 재미 있어요.^^  등록시간 2017-03-06 01:19
글을 통해 심원장님이 참 따뜻한 분이라는 것을 느낄수 있었어요. "임신과 출산-두려움에서 기쁨으로" 시간이 지나 두려움의 감정이 기쁨의 감정으로 변하게 되는 것처럼 숙명으로 그냥 견디었던 시간들이 지나  등록시간 2017-03-06 01:14
글을 통해 심원장님이 참 따뜻한 분이라는 것을 느낄수 있었어요. "임신과 출산-두려움에서 기쁨으로" 시간이 지나 두려움의 감정이 기쁨의 감정으로 변하게 되는 것처럼 숙명으로 그냥 견디었던 시간들이 지나  등록시간 2017-03-0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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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p15 [2019-10-15 19:42]  emk317 [2017-09-06 14:21]  urius1004 [2017-02-26 05:41]  xingxing [2017-02-23 17:11]  무지개 [2017-02-03 06:48]  zoomooni [2017-01-25 09:08]  podragon [2017-01-25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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