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통곡
김예분 할머니는 의사의 말을 듣고 너무 서러워 그 자리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울었다.  자궁에 혹이 생겨서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을 때도 이렇게 서럽게 울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자궁을 들어내면 잠자리를 할 수 없는 줄 알았다. 남편이 그렇게 말한 것이 정말 남편도 몰라서 그렇게 말한 것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바람을 피우면서 난봉꾼으로 사는 자신을 합리화 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예분 할머니는 30년간 잠자리도 못하고 생과부로 살게 된 것이 서러운 것이 아니다. 남편의 그런 거짓말에 속아 3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30여년간을 바람피는 남편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고 기도 못펴고 지내온 세월이 억울하기 때문이었다. 지나온 세월을 돌려 받고 싶었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나 돌아가고 싶어라고 목청껏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의사의 조언
자궁 근종으로 자궁을 들어내도 성생활을 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물론 자궁 입구인 경부를 함께 적출하게 되므로 질 분비물이 다소 부족해 질 수는 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질의 길이도 조금 짧아져서 성관계시 깊게 삽입 하는 체위에서는 약간의 통증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건 모두 여성의 입장에서 그런 것이지 남성의 입장에는 자궁이 있으나 없으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질 분비물 부족도 윤할제를 사용하므로써 대부분 개선이 가능하다.  자궁을 들어 내게 된다고 해서 일상 생활이나 성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성의 상징 기관으로서 자궁이 가지는 의미가 적지 않기 때문에 가급적 자궁을 완전히 절제하는 것보다는 혹만 떼어내는 수술을 하거나 아니면 고주파나 초음파 에너지를 이용하여 혹을 녹이는 수술을 하는 선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궁의 존재 가치는 그런 정신적인 것을 제외한다면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 외에는 없다.

프로스트의 시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몸이 하나이므로 두 길을 다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에 못지 않게 아름답고
어쩌면 더 나은 듯도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밟은 흔적은 비숫했지만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는 듯해서였습니다.
그날 아침 두 길은 모두 아직
발자국에 더렵혀지지 않은 낙엽에 덮여 있었습니다.  
먼저 길은 다른 날로 미루리라 생각했습니다.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다시 돌아오기 어려우리라 알고 있었지만.
먼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 쉬며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어
나는 사람이 덜 다닌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이처럼 바꿔 놓은 것입니다" 라고

나의 이야기
인간은 미래를 내다 볼 수 없다.  인간은 두 갈래 길 중에 한 길만 선택해서 가 볼 수 있다. 한쪽 길을 선택함으로서 얻은 결과는 다른 쪽을 선택해서 얻은 결과와 비교하여 좋은지 나쁜지 알 수도 없다. 소위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도 생기지 않는다.  할머니가 자궁을 들어낼 당시 자궁과 성생활과는 관계가 없는 것을 알았다면 남편의 바람을 막고 평생 원만한 부부생활을 했을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지금과 별반 다를 것 없이 파괴된 부부 관계를 형성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요즘 유행하는 타임슬립 드라마 (과거나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시간 이동을 하는 초자연 현상)처럼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살면서 한번 정도 온다면 어떨까?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아마 위의 할머니라면 당연히 과거 수술 당시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과거의 어떤 선택으로 인해 많이 후회스러웠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돌아가는 쪽의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온다면 어디로 돌아갈지 고민이다. 가깝게는 동업을 한 시점이고 멀리는 산부인과를 선택하던 순간이나 의과 대학 지원서를 쓰던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태어나고 말고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태어나지 않는 쪽의 선택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보았다. 나의 경우 과거 선택의 순간들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 해서 프로스트의 시처럼 다른 운명의 삶을 살았을 지 아니면 거의 비슷한 궤적의 삶을 살았을지는 알 수 없다. 어찌되었든 그런 선택을 해야 한다면 유일한 재산을 모두 도박에 거는 것처럼 쉽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차라리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의 주장이고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게 도와주는 도구는 앞으로도 영원히 발명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선택  권한 뿐이다. 그러나 조금만 멀리 내다 보면 지금 선택의 순간도 미래의 어느 날인가에는 다시 돌아 와서 다른 선택을 해 보고 싶은 순간일 수 있다.  이것이 "현재를 즐겨라"라는 의미로 널리 쓰이는 카르페 디엠의 본래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내가 내리는 작고 사소한 선택 하나조차도 부디 현명한 선택이기를 바랄 뿐이다. 저녁으로 돈까스 대신 보리 비빔밥을 먹기로 한 선택이든, 어떤 사람의 짧은 말 하나를 의미있게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든  현명한 선택이기를 바란다. 작은 나비의 날개짓이 태풍의 시초인지 갈대조차 못 흔드는 바람인지는 처음에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런 선택의 순간 순간들이 모여 지금 내 인생의 모습을 만들었다. 작은 자연 선택의 결과가 모여 지금의 호모 사피엔스를 만들어 낸 것처럼.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년 암울한 시절 서시를 쓰던 윤동주의 눈 앞을 스치고 지난 것과 같은 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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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kdekdsu [2018-04-24 17:35]  satieeun [2018-03-08 19:51]  podragon [2018-03-0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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