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꾸지 못하고 바뀌기만 한 것들
며칠전 낡은 노트를 펼쳤다가 2006년도에 끄적 거려 놓았던 글을 발견했다.
나는 10년후에도 건강하게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10년 후에도 내가 살아온 길이 그리 잘못된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10년 후에도 지금의 철학과 소신이 변함없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10년 후에는 마음이 여유롭고 따스한 사람이면 좋겠다.
나는 10년 후에는 책으로 둘러 쌓인 서재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10년 후에는 1년에 한달쯤은 휴식을 위해 쉴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좋겠다.

읽으면서 보니 10년전에 바랐던 것 중에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처참하게도 거의 없다. 건강하게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그나마 가장 근접한 것인데  그마저도 건강에 방점이 찍힌게 아니라 살아 있다는 사실에 방점이 있다.  10년이라는 세월이면 그리 짧지 않은 세월임에도 10년간 아무 것도 바꾸지 못했다. 이마의 주름, 떨어진 체력, 나이드는 데서 오는 완고함 등 내 의지와 관계없이 세월이 흐르면서  저절로 변하는 것들만 바뀌었다.

밤의 산책
밤이 깊어서 한시나 두시쯤.  
몇시간째 같은 자세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여 놓았더니 항용 그렇듯이 오늘도 무거운 상체를 떠 받드느라 엉덩이가 짓무를 지경이다. 불러온 배 탓에 허리가 고생인 산모들이 겪는 애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엉덩이에 자유를 주기 위해, 솔직히 말하면 좁은 공간이 주는 갑갑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꺼운 패딩에 목도리까지 중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서본다. 봄이기는 해도 어떻게 알았는지 조그만 빈틈이라도 보이면 찬 바람이 스며든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은 목도리에도 걸리지 않는 모양이다.
어릴 때 살던 동네는 길도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많았는데 이 동네는 좁은 골목도 별로 없고 일자로 죽 이어진 길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경의선 책거리를 돌아가는  골목은 좁지는 않아도 한적해서 늦은 밤이면 다니는 사람이 없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밤의 길은 낮의 길과는 많이 다르다. 바람에 구르는 검은 비닐 봉지도 낮에는 혐오의 감정을 불러오는 쓰레기지만 밤에는 왠지 귀신의 발길에 차인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려움의 감정을 불러 온다. 어디 숨었다 나오는지 알 수 없는 길고양이도 낮보다는 밤에 더 많이 눈에 띈다.  가끔 노랑댕이나 고딩이도 눈에 띄기는 하지만 밤 고양이들은 거의 다 검은 고양이 종류인 턱시도 고양이가 많다. 문득 오래전 집에서 키우다 가출한 고양이 생각이 난다.  오래되어 생김새는 잊었지만 막내 딸네미가 지은 고양이 이름이 양순이였다는 사실, 족보도 없는 흔해 빠진 길고양이 삼색이였다는 것은 잊히지 않는다.  고양이의 평균 수명이 20년이 안된다고 하니 아마 지금쯤은 죽어서 이 세상 사람 아니 이 세상 고양이가 아닐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앞으로 나에게 10년의 기간이 더 주어질지 아니면 그 이하일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10년 후 어땠으면 하는 욕심은 별로 없다. 소신이나 원칙이야 할 수 있으면 지키면서 살면 좋겠지만 지키면서 살지 못한다고 해서 무에 그리 큰 문제이겠는가? 다른 사람도 그렇겠지만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을 것이다. 마음의 여유나 경제적 여유도  크게 바라지는 않는다. 어려워 보여서 지레 포기하는 마음도 없지야 않겠지만 더 크게 바라는 것이 있어서 그런 작은 것들에 대한 미련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바라는 것은 부모님보다는 더 오래 살아야 겠다는 것, 부모님이 걱정 안 할 정도로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마이클 샌더스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은 보지 못했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돈으로 살 수는 없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도 돈이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둘의 구분이 별 의미가 없다. 연초에 부모님 댁에 새배를 드리러 갔더니 어머니께서 "올해는 좀 행복하게 살거라. 사는 동안 재미있게 살고." 라고 말씀해 주셨다. 새해 덕담을 들으면서 가슴이 잠시 먹먹했는데 과연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행복이라는 것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인지,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마음은 무기징역수
오늘 최현희님과 페탈님, 동민님께서 병원에 놀러 오셨다. 가실 때 배웅하면서 저는 그럼 감옥에 있겠으니 조심해 가시라고 했더니 웃으신다. 진료실을 흔히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한다. 한달 내내 병원에서 숙식을 모두 해결하면서 지낸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혼자 병원에서 있으면서 무료한 탓에 저멱 무렵에는 병원 근처 책방에 마실을 가기는 하지만 잠깐이고 두어달에 한번 부모님 댁에 가는 것이 제대로 된 외출의 전부이니 사실 감옥살이와 별로 다를 것도 없다. 다만 감옥의 정의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갇혀 지내는 특정 장소임에 반해서 내가 스스로 갇힌 것이라는 점만 다르다.  생각해 보면 나만 감옥에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형의 집의 노라에게는 집이 감옥이었을 것이고, 산후맘에게는 독박 육아라는 이름의 감옥이 있을 것이다. 모습은 다르지만 인간은 모두 자신만의 감옥에서 사는 무기징역수다. 삶이라는 감옥에 갇혀 지내는 죄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삶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는데  죄수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병자라고 생각하는게 더 나은 것일까? 잠시 실소가 난다. 병자, 병실, 병원이란 단어는 보통 사람에게도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겠지만 나처럼 의사에게는 특히 친숙한 단어이니 말이다. 사실 의사와  병자 혹은 환자란 행복과 불행, 빛과 어둠처럼 흔히 대척점에 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의사와 병자란  대척점이 선 것이 아니라 질병이라는 배에 타고 같은 방향을 향해 노를 저어가는 동반자다. 질병으로부터의 회복을, 건강한 순산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인 것은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환자 혹은 산모나 의사가 다를 것이 없다. 남편과 아내가 적이 아니고 같은 쪽을 바라보고 같이 인생의 행로를 걸어가는 입장인 것처럼. 그저 의사는 배움과 경험을 통해 가야할 방향을  조금은 더 지혜롭게 안내하는 역할을 가진 것 뿐이다.

얼마나 다른 것일까
모두 감옥에 살기는 하지만 묶여 있는 족쇄의 길이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과감하게 직장을 그만두고 전세값을 빼서 부부가 함께 해외 여행을 가는 사람도 있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아 위험천만한 벼랑길을 달리면서 그 낙으로 사람도 있지만 그저 조금 긴 족쇄를 찬 것 뿐이다. 모두 삶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매일 먹어야 하고 먹은 만큼 배출해 내야 하고, 매 순간 숨을 쉬고 하루의 1 /3 이나 1/4의 시간은 반드시 잠을 자야 한다. 매순간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 먹는 것이야 그렇다쳐도 숨쉬는 것이 즐겁고 쉬고 싶어서 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우리의 인간의 의지의 영역으로 두었다면 아마 인간이 지금까지 살아 남아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호흡 뿐만 아니라 심장의 박동과 체온의 유지등 생명과 관련된 중요 기능들은 간뇌가 담당하는 기능으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생명과 관계된 중요한 것들을 제외하고 나서 우리 인간이 스스로 자유 의지로 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일들이 과연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궁금하다. 우리가 고민고민하면서 결정하고 실행하는 모든 것들이 감옥에 사는 무기징역수가 하루 30분간 허용되었다고 하는 운동에서 운동장을 오른쪽으로 한바퀴 도는 것과 왼쪽으로 한바퀴 도는 것 혹은 한바퀴 대신 두바퀴 도는 것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버지니아 울프의 "어느 작가의 일기"
그런데 인생은 아주 견실한 것일까, 아니면 매우 덧없는 것일까?
이 두 가지 모순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이 두 모순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서 있는 세계의 깊은 곳까지 다다른다.
다른 한편으로 이 두 모순은 일시적인 것이고, 곧 달아가 버릴 투명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파도 위의 구름처럼 지나가 버릴 것이다. 비록 우리들은 변하고,
차례로 잇달아 그처럼 빠르게, 빠르게 날아가더라도,
우리네 인간은 연속적이고 계속적이어서 우리는 스스로를 통해 빛을 발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빛이란 무엇인가?
나는 인생의 무상함에 너무 깊은 인상을 받아서, 종종 안녕이라는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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