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남대문 시장에 들렀다. 아내는 침구나 그릇 파는 곳으로 가고 나는 문구류가 다양하게 구비된 알파 문고에서 시간을 떼운다. 각자 자기의 관심사가 있는 곳에서 즐겁게 쇼핑을 하다가 구경을 다 마치면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한다.  일리 커피를 전문으로 파는 집이 알파 문고 근처에 있어 거기서 만나기로 장소는  정해 두지만 시간은 따로 정하지 않는다. 실컷 구경을 하고 나서  지겨울만해지면  커피숍으로 가면 된다. 예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언제까지 만나기로 하고 약속 시간에 늦게 오면 기분이 상하고 화도 난다. 목욕탕에 함께 갔다가 한시간 후에 입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나는 30분 일찍 나오고 아내는 30분 늦게 나오는 바람에 거의 한시간이나 기다리게 되어 화를 냈던 기억도 오래전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만날 시간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늦었다고 화를 낼 일도 지루해하면서 시계를 들여다 볼 일도 없다. 당분이 조금만 모자라거나 반대로 조금이라도 많으면 맛이 없는 쥬스와 달리 보리차는 조금 묽거나 조금 진해도 마시기에 무리가 없다. 말하자면 그런 경지쯤 된 것이라고 하면 되겠다. 좋아진 것인지 나빠진 것인지 의미는 부여하지 않는다.

닭이 물 마시듯 커피를 깨작 거리다 허기가 질 무렵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온 김에 저녁을 떼우고 갈 요량으로  아내가 근처의 맛집을 검색해 본다. 참 좋은 세상이다. 손바닥 만한 물건이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보다 방대한 정보를 내가 원할 때 언제든 펼쳐 보여 준다.  아내가 검색해서 고른 곳은 전주집이라는 소박한 이름의 곰탕집이다. 실내 분위기도 이름처럼  소박했으나  메뉴는 전혀 소박하지 않았다. 설렁탕이나 내장 곰탕이야 일반 식당과 다를 것이 없지만 도가니탕, 꼬리 토막탕의 값은 서민이 한끼 식사 값으로 지불하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음식은 먹이이며 먹이란 그저 허기를 채우고 몸뚱아리를 움직이는데 적절한 열량을 제공해 주면 그뿐이라는 철학을 가진 내게 식도락은 관심사가 아니다. 하여 그저 설렁탕 두그릇이면 영양도 값도 적당할 듯 싶었다. 그러나  날도 날이거니와 모처럼 보양식 생각이 나서인지 아내는 주인이 추천해준 꼬리 토막탕을 먹고 싶어 하는 눈치다. 아니 눈치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그거 먹자고 한다. 자주 들여다 보고 식사를 챙겨 주지 못하는 남편에게 보양식을  먹이고 싶어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예전 같으면 설렁탕의 몇배나 되는 도가니탕이나 꼬리 토막탕 같은 것은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청을 못 이기는 척하고 내장 곰탕 한그릇과 꼬리 토막탕 한 그릇을 시켜서 나누어 먹기로 했다. 꼬리 토막탕이라는 음식은 처음 먹어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미식가도 아니요 식탐도 없는 나로서는 아마도 마지막으로 먹어보는 음식일 가능성이 높다.  언제 다시 이 집에 다시 오겠는가 싶어 좀 비싸기는 했지만 시켰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면 값이 좀 나가더라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만년필은 삼천원짜리 프레피 만년필부터 수백만원짜리 몽블랑 만년필까지 종류와 가격이 다양하다. 비싼 만년필을  선택할 지 아닐지 하는 것은 가장 크게는 구매자의 경제력에 달려 있다. 비슷한 경제력이라면 앞으로 만년필을 살 기회가 많은 사람보다는 평생의 마지막 만년필을 결정하는 사람의 경우에 구매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물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또 사고 또 사고 하면서 허투루 쓴 돈도 적지는 않다. 생각해 보면 물건 뿐 아니라 오늘 하루도 마지막 날이었다. 어제나 내일은 생긴 모양이나 흐르는 방식은 비슷하지만 오늘과는 전혀 다른 날이다. 유일한 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야 함에도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에 대하여는 관대하고 시간이 공기나 물처럼 무한한 것으로 착각한다. 공기나 물이 무한한 것이 아니듯 시간도 무한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다하면 생이 끝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착각의 날들 속에서 유일한 10살 어느 하루의 꽃은 말없이 피었다 졌고  30살 어느 겨울의 눈송이는 아무 감흥도 주지 못한 채 녹아 버렸다. 50살 여름날의 더운 땀방울도 그날 만의 것이지만 무엇 때문에 그리 흥건한 땀을 흘렸는지 기억도 못한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제목의  드라마처럼 생 뿐 아니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는 유명한 경구는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스토스가 2600년 전에 한 말이다. 2600년 전부터  인간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그 모든 처음이면서 마지막인 것들을 처음처럼도 마지막처럼도 보내지 못했다. 앞으로 얼마쯤의 처음과 어떤 마지막 것들이 내게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그 모든 것들이  손가락 사이의 물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보다 손가락 마디의 굳은살처럼 견고하게 내 삶의 일기장에 선명하게 남아 있으면 좋겠다. 물론 손에 굳은살이 박힐 때처럼 치열한 수고가 먼저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단 며칠전 먹은 꼬리 토막탕 집의 기억은 물처럼 흘러 사라지기를 바란다. 맛이 너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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