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아! 이 단어를 글의 제일 앞에 두는 것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돈에 치이다 보니 저도 어쩔 수 없이 이리 되네요. ㅠㅠ)도 들지 않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있고  잠시의 여유를 베풀어주는 곳에 들렀다. 병원 근처 와이즈 파크의 서점 "리브로"다. 일주일에 한번 이상 들리는 곳이라 어지간한 책은  아이 북킹 (새로운 조어를 만들기 좋아하는 내가 만든 말로 아이 쇼핑을 흉내낸 말이다. 즉 책은 사지 않고 눈으로만 책을 대충 훑어 보는 행동을 의미한다.)을 통해 알고 있어 새로 나온 책이 있는 코너를 제일 먼저 둘러 본다. 목차라도 읽어볼만한 유혹적인 제목의 책이 없으면 발걸음을 돌려 사지도 않을 거면서 문구 코너로 향한다. 나가기 전에는 습관처럼 매월 새 책이 진열되는 잡지 코너로 간다.  
그때 갑자기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 나온다. 모르고 있었는데 서점 내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 귀에 콕 박히는 곡이 없다보니 음악의 존재를 미처 알지 못했다. 잠시 책을 내려 놓고 곡에 귀를 기울여 보는데 제목이 생각이 나질 않는다. 굉장히 익숙한 곡인데......휴대폰을 꺼내 노래가 끝나기 전에 soundhound 앱에서 검색을 해 본다. 소음이 많아 검색이 잘 될까 싶었는데 다행히 휴대폰이 곡을 찾아 알려준다. 그동안 전화 할 일도 전화 올 일도 거의 없이  그저 건물 임대료나 직원 월급을 이체하는 목적 외에는 별로 쓰이지 않아 비싼 값을 하지 못하던 차에 고가의 휴대폰이 오랜만에 돈 (아! 또 돈이다. 이 단어를 잊고 살 수는 없을까? ㅠㅠ ) 값을 했다.  

휴대폰이 찾아낸 곡은 이장희가 작곡한 "이젠 잊기로 해요"다.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곡이지만 몇년전 "쎄시봉"이라는 영화와 "응답하라 1988"에 나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곡이다. 이 곡은 여러 가수들이 불렀는데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나는 영화 "세시봉"에서 한효주 배우가 부른 곡이 제일 좋아서 그 곡을 가끔 듣는다. 그런 곡인데 제목이 생각이 안 났다니...... 하기사 매일 쓰는 휴대폰도 냉장고에 넣어 두고 한참을 찾았다거나 휴대폰 대신 집 무선 전화기를 들고 외출했다는 아내 친구의 사례도 있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자. (자기 위안 ^^).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아 곡의 가사를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내용은 익숙하다. 나야 성당을 다니지 않으니 사람없는 성당에서 무릎 꿇고 기도한 기억을 잊으려 애쓸 일도 없고 술도 먹지 않으니 술에 취해 고백한 부끄러운 기억을 잊으려 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잊으려 노력할 일조차 별로 없다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비록 당시에는 괴로웠더라도 잊으려 노력해야 할만큼의 강렬한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은 삶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는 장수 사회에서는 꼭 필요하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려워도 있어서 그리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당장의 진통을 없애기 위해 무통 마취를 원하고 제왕절개를 바라는 산모들이 나중에 지나고 나면 고통의 순간들이 아니 고통 그 자체조차도 어쩌면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아니 고통의 기억 조차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다. 두번째 출산을 위해 진통하는 산모분들께 첫째 때 겪어 보았으니 아시겠지만 진통이 강하게 온다는 것은 통증이 끝나는 순간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니 조금만 힘내서 견뎌보라고 내가 말하면 그분들이 하는 말이 있다. 첫째 출산 때 통증이 얼마나 심하고 어땠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그러고 보면 잊고 싶은 것들이 많다가 잊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아지는 순간이 젊음과 늙음의 경계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보니 나이가 들어 가는 것을 굉장히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젊게 보이기 위한 수술과 화장품이 인기라고 하던데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늙어서 얼굴에 주름이 생긴다는 것은 삶에 있어 미숙한 상태에서 원숙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젊게 보이는 시기가 조금쯤 더 오래 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만 있는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일지는 의문이다. 일년 내내 봄만 있는 곳에서 사는 사람이 더워 괴로운 여름이 있고 추워 고통스러운 겨울이 있는 사계절이 있는 곳에서 사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 간다는 것은 단순히 잊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아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기억들 중 어떤 것은 감정은 증발하고 사실만 남거나 반대로 사실은 희미해지고 감정만 떠오르기도 한다. 아이들이 처음 걸음마를 떼었던 순간이나 아빠하고 처음 불렀던 순간들은 분명 가슴 벅차게 기쁜 순간이었을텐데 그게 언제 어느 동네 살던 일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반대로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어떤 일들은 언제 어디서 그런 일을 겪었는지 또렷이 기억나지만 가슴에서 별다른 감흥이 일지는 않는다. 아마도 너무 뜨거운 불이나 차가운 얼음이 몸을 상하게 하는 것처럼 너무 격정적인 기억들이 그대로 오래 사람의 마음에 머물면 정신을 다치게 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자연의 섭리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떫고 단단한 감이  눈과 바람의 시간을 지나면서 달콤해지고 말랑말랑해져서 먹기 좋은 곶감이 되는 것과 같다고 할까. 기쁜 일이나 화나는 일, 슬픈 순간이나 즐겁던 시절도 세월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견딜만해진다. 썩지만 않도록 조심한다면 그런 변화들은 결코 나쁜 변화가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 나이가 들어가면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기억도 담담히, 젊음도 담담히 잊혀 가도록 할 일이다. 썩어서 추해지는 것도 좋지 않지만 방부제에 범벅인 채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 것도 좋은 모습은 아니다.  

"이젠 잊기로 해요" 노래가 끝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귀에 닿아 가슴을 울릴지 모르지만 나는 모르는 노래가 나온다. 서점의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쓰던 이글도 마무리 하고 가야 할 시간이다. 책은 사지 않고 공간만 축내는 진상으로 서점 직원들에게 보이기는 싫으니 깔고 앉은 사다리 의자에서 일어난다. 잊는 것은 세월이 해주니 쉬운데 들어 올리는 엉덩이는 오늘도 무겁기 짝이 없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러니 이젠 들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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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삶을 강렬하게 살았다는 증거라는... 새로운 시각! 배워갑니다. 저는 너무 강렬히 살았나봅니다. 밤에 이불킥 자주 하는데... ㅎㅎㅎ  등록시간 2019-04-16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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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alakoo [2019-04-16 21:48]  씽씽 [2019-03-24 22:58]  이연경 [2019-03-20 17:57]  최현희 [2019-03-10 00:15]  navi3561 [2019-03-09 20:39]  happybud19 [2019-03-06 14:48]  podragon [2019-02-26 18:54]  달콤짱짱 [2019-02-23 02:06]  
#2 happybud19 등록시간 2019-03-06 14:55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주로 잠을 못자고 육아를 하다 한숨 돌릴때 쉼터처럼 진오비 홈피를 찾게 됩니다. 원더위크라고 한다는데 =영아급성장기에 필요한걸 다 제공해줘도(그런것같은) 이유없는 울음을 느닷없이 터뜨리는거래요ㅠ 알면서도..속이상해서  내가 뭘잘못했나..부터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수술한 당일의 고통은..저는 아직도 떠오르는데.. 그래서 제가 집착이 강하고 정신이 좀 허약한가 ;;돌아보게도되네요.  마침 미세먼지가 걷히고 반갑게도 하늘이 밝아지고 있어요^^

그리고 리브로 아이북킹(!)은 한때 제 취미였습니다. ㅋㅋ 원장님 글을 읽으니 그때가 생각나 (심정도 비슷합니다;;) 즐거운 미소가 지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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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물 서점! 좋죠~^^ 동네에도 몇군데 있더라고요 그리고 최근 경의선 숲길 책거리에 다녀와서 아이북킹 모처럼 잘하고 나를 위한 선물로 책도 한권 사왔습니다. 넘 힐링되고 좋았어요.  등록시간 2019-05-11 17:49
리브로처럼 앉을 공간도 음악도 없지만 홍대역 짐프리 같은 독립출판물 서점도 아이북킹(!) 장소로 추천드려요! ㅎㅎ  등록시간 2019-05-09 12:00
육아 때문에 여유있는 독서도 쉽지 않겠네요. 이제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 싶게 아이도 크고 여유도 생길 것입니다. 건투하시길.....  등록시간 2019-03-07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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