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8일.
멀리 안양시에 사시면서 평촌 봄빛 병원에서 산전 관리 받으시던 산모분이셨는데 임신 31주 가까이 되셔서 저희 병원으로 옮기시고자 해서 오셨더군요.
그래서 그런 상황의 다른 분들께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병원을 옮기시는 것에 대하여 신중하게 생각하시도록 하면서 말렸습니다.
그렇게 멀리 진찰을 받으러 다니는 것은 산모께도 쉬운 일이 아니고 또 임신 중에는 갑작스럽게 양수가 파수되거나 출혈이 생긴다거나 하여 급하게 진찰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많아서입니다.
물론 그렇게 멀리서 다닐만큼 특별히 대단한 것이 없는 병원이다 보니 괜히 기대했다가 나중에 실망하게 될까봐 걱정되서라는게 더 중요한 이유이겠지요.
제 설득은 실패했지만 저희 병원을 계속 다니시다가 순산하시고 비교적 편히 계시다 가셨다니 다행입니다.

산전 진찰 받는 동안에 조용하고 다소곳하게 진찰을 받으셔서 특별히 언급할만한 것은 없었지만 저희 병원에서 모든 산모들께 36주 무렵에 출산 계획서를 적어 오시라고 드리는데 그것에 추가하여 무려 3장짜리 출산 계획서를 가지고 오셔서 조금 놀라기는 했습니다.{:soso__3110130392203091378_3:}
요즘에는 그리 긴 시험지 혹은 프로젝트 지시서(?)를 받아 본 기억이 없어서 말이죠. ㅎㅎ
전에 태명 바다사자인 아기의 아빠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산모가 갑이고 의사가 을이니 저로서야 을의 입장에서 충실히 숙제를 풀어야 하는 부담은 있었지만 다행히 문제(?)가 그리 어렵고 까다로운 것은 아니라 대부분 쉽게 풀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출산 계획서는 총 35개의 문항이었는데 제일 고민이었던 것은 그때 산모와 남편분께도 말씀드렸지만 부득이하게 기구를 이용하여 흡입 분만을 하게 되면 아기의 태명인 "보늬"를 불러주면서 간단하게라도 아기에게 설명해 달라는 부분이었습니다.
저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아기 태명을 부르거나 하는 것은 고사하고 출산하실 때 "축하합니다. 공주님(혹은 왕자님)입니다."하는 축하 말씀도 아직까지 드려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리 살갑지도 못하고 무뚝뚝하기 때문입니다.
힘든 산통을 겪은 산모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말 대신 마음으로 그런 것이 전달되기만을 바랄 뿐이죠. ^^
여하튼 이 분의 경우 마음과 함께 말로 직접 태명을 불러야 한다고 해서 "그건 음....그때 가봐서 할 수 있을지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라고 말은 했지만 저와 같은 무뚝뚝이들에게는 35가지 문제 중 가장 어려운 문제인것 만은 분명했습니다.
다행히 기구를 이용하지 않고 순산하시게 되어 그 숙제는 비껴가기는 했지만.....
여하튼 지나고 보니 35 항목의  문제중 과연 몇개나 제가 풀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생각으로는 한 80점은 넘었으면 싶습니다만....

그리고 또 다른 고민은 5월 24일, 임신 40주 2일 되는 날에 물처럼 흐르는 것이 있어 병원에 오셨을 때 양수 파수 반응이 양성으로 나와서 진통도 오기전에 파수가 된 경우로 판단되었던 점입니다.
흔히 양수가 파수되면 이틀 정도는 기다려 볼 수 있지만 태아의 감염 우려와 양소 과소증 문제로 보통 이틀 이상은 기다리기 어려워 유도분만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유도분만을 하게 되면 기구를 이용한 출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제왕절개를 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구를 이용한 분만시에도 태명을 불러 주어야 하는데 혹시 제왕절개라도 하게 되면 보늬야 정말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인지 어째야 하는 것인지 잠시 고민을 했었습니다. ㅎㅎ
고민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가능하면 의료적 개입을 최소한도로 하고자 한 산모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여 양수 파수가 되었지만 조금더 기다려 보기로 하여 이틀후 시행하는 유도분만을 보류하고 일단 감염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하여 항생제만 복용하도록 처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양수 파수후 3일이 지난 27일 드디어 양수가 많이 흐르기 시작하여 오후 3시 무렵 입원하시게 되었습니다.
입원하여서도 진통은 7분 간격으로 드문 드문 있는데다가 강도도 약하여 언제 출산이 될까 짐작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어서 아마도 밤 늦은 시간이 되거나 아니면 다음날로 출산이 미루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입원하신 후 산모의 병실에는 평소 충실히 체조도 하고 호흡도 한 것을 암시하듯 짐볼도 놓여 있었고 비록 진통이 매우 강하지는 않다해도 잠복기 진통도 사람에 따라서는 견디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아주 의연하게 잘 견디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진통 중인 산모가 맞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초기 진통은 잘 견디던 산모라도 본격적 진통 단계로 들어가면서 심하게 소리도 지르고 몸부림도 치고 또는 제왕절개 수술이나 무통 시술을 해달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어떨지는 두고 보아야 했습니다.
물론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것은 별 상관이 없지만 몸부림을 친다거나 혹은 정상 진행 과정임에도 단지 통증 때문에 제왕절개를 해달라고 하면 설득을 하는 게 쉽지도 않거니와 설득을 했다가 나중에 결국 수술이라도 하게 되면 보통 난감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예 단도리를 미리 해두자는 차원에서 "평소 자연주의 출산을 위해 단단히 준비도 하시고 하셨으니 잘 해내실 것이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하고 말씀을 드려 두었었지요.
드디어 밤 2시 무렵, 병실 주방에서 길주씨와 야식으로 햄버거인가 무엇인가를 먹고 있었는데 남편분께서 오셔서 배가 많이 아파한다고 해서 달려가 보았더니 마침내 자궁문이 8cm 정도까지 벌어져서 출산이 얼마 안남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낮에 말해둔 단도리 말 때문인지 아님 원래 참을성도 강하고 의지력이 강한 분이기 때문이었는지 자궁문이 완전 개대인 10cm에 거의 가까운 8cm까지 벌어질 정도면 상당히 진통이 심했을 텐데 잘 참으셨더군요.

분만실에 가시고 나서도 힘주기나 호흡도 잘 하시어 드디어 밤 3시 29분에 건강한 남자 아기를 순산했습니다.
자궁문이 다 벌어져 힘주기 시작해서 출산까지는 한시간이 조금 덜 걸렸는데 초산모들이 흔히 겪는 보통의 만출 시간보다는 약간 적게 걸린 것이었습니다.
힘주기 단계에서 조금 힘들어 하시고 해서 힘 잘 주시라고 힘 주는 요령을 말씀드렸었는데 산모께서 쓰신 후기에 보니 마스크에 가려지고 해서 잘 못들으셨던 모양입니다.
여하튼 그런 조언도 듣지 못한 상태에서 순산하신 것을 보면 역시 출산에서는 산모가 거의 대부분 역할을 하고 옆에서 위무하고 마사지하는 등의 일부 역할을 남편이 하고 의사는 정말이지 아기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ㅎㅎ
참, 회음부 파열이 조금 거칠게 되어 봉합에 시간이 다소 걸렸는데 그 부분에서도 의사의 역할이 조금은 남아 있기는 하군요. ㅋㅋ    

출산 하신 후 입원해 계신 이틀동안 어느 분인들 그렇지 않겠습니까만은 아기를 특별히 귀여워하고 뿌듯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산모가 스스로 해내었다는 자긍심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아기를 대하는 태도나 출산에 대한 느낌이 많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평소 제가  출산을 돕는 의사의 입장에서 가진 생각--출산이라는 과정에서 의사가 이렇게 돕든 저렇게 돕든 다를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틀렸다는 것도 다시한번 깨달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저희도 별로 다를 것은 없지만 현재의 우리나라 대부분 산부인과의 출산 환경이 좀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산모가 역할을 하고 남편이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많이 미흡한 것 같다는 판단이 듭니다.

이제는 외유내강의 산모분과 믿음직한 남편분이 귀여운 아기와 함께 같은 장소이지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보일 세상으로 나아 가시는 일만 남았군요.
멋지고 행복한 여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순산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P.S
아래 사진은 퇴원하시기 전 병실에서 3가족이 함께 찍은 가족 사진으로 산모수첩에 올렸던 것을 색만 조금 바꾼 것입니다.
허락없이 올렸는데 양해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2 이순영 등록시간 2013-06-06 16:41 |이 글쓴이 글만 보기
보늬어머님이나 원장님이나.. 참 두분모두 글을 너무 잘 쓰십니당..ㅎㅎㅎㅎㅎ
양수 파수로 자연출산이 힘들어질 수도 있었지만..
다행이... 제 때 자연분만 하실 수 있으셔서 다행이에요~~
저도 나름 멀리서 다닌다고 생각했지만.. 안양이시면 정말 멀리서 오셨네요~~
그만큼 심원장님의 소문이... ㅎㅎㅎㅎ ;P
보늬의 출산후기... 너무 잘 보았습니다.. ^^
마지막 흑백사진은... 왠지 아름다움이 묻어나네용~~ ^0^
#3 보늬맘 등록시간 2013-06-08 22:20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원장님께서 글 올리시자마자 핸드폰으로 확인을 했었는데 겨를이 없어서 이제서야 댓글을 남기네요 ^^a
이렇게 자세히 남겨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나중에 보늬가 커서 제가 쓴 출산후기와 원장님께서 남기신 글을 함께 보여주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
저번에 정기검진 때 촬영해 간 원장님 인터뷰(?) 영상과 사진은 조만간 올리도록 할게요~ㅋㅋ

처음에 병원을 옮기겠다고 찾아뵈었을때는 솔직히 살짝 얼어있었답니다 ^^;;
설명은 정말 차분하고 꼼꼼하게 2시간이 다 되도록 해주셨는데 나중에 궁금한 점이나 질문사항 있냐고 물어보셨을때는 왠지 모를 포스(?)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ㅋ
궁금한 부분도 이미 다 설명해주신 점도 있었지만요~
하지만 계속 정기검진을 다니면서 원장님의 깊은 속정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ㅋㄷ
그래서 역시나 좀 멀더라도 병원을 옮기기로 결정한 건 너무너무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저번에 정기검진 갔을 때도 너무 편안하게 대해주셔서 검진이 끝났는데도 한참 머물러 있다 왔네요 ^^;;
평일 낮시간이라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주말이었으면 그렇게 오래있을 엄두도 못 냈을텐데 말이죠 ㅋ

이제 한달 뒤에 또 검진받으러 가는데요~ 그때도 반갑게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출산후기 남겨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추신: 아! 그리고 출산계획서 그렇게 길게 작성해가는게 좀 무리인가 싶다는 생각도 했었는데요 ㅋ
         그래도 나중에 후회하는 거 보다는 나을거 같아서 좀 꼼꼼하게(?) 작성해서 가져갔었답니다 ㅋ
         그런데 더 놀랬던 것은 항목을 다 일일히 확인하시면서 답변을 해주셨다는 점이예요~~  
         그렇게 해주신 점에 대해서 더 감동받았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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