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눈이 너무 부셔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이 아린 느낌에 다시 감았다 실눈을 떠 보니 어렴풋이 천장의 형광등과 베이지색 커텐 그리고 무언지 모를 복잡한 기계들이 내 몸 주변에 주렁주렁 연결되어 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정신을 가다듬고 눈과 귀에 온 신경을 모아 보지만 여전히 주변은 온통 회칠한 것 같은 흰벽과 이름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기계들 뿐이다.
여기가 어디고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나는 누군지 도통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그때 무언가 작은 소리가 들려 오는데 어딘가 낯익은 음악인 듯 하다.
실로폰 소리.
아 "캐논 인버스"구나.
"자주 틀어 놓으시는 것을 보니 이 음악 정말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 제목이 캐논 변주곡이라고 말씀하셨던 그 곡이죠 ?"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보려 했지만 목에 무엇인가 두툼한 것으로 고정해 놓아서 고개가 돌려지지 않았다.
간신히 눈동자만 돌려서 옆을 보았지만 아무도 없다.
눈동자를 반대쪽으로 돌려 보았지만 여전히 흰빛 벽과 유리, 그리고 역시 이상한 기계들 뿐이다.
환청인가?
아니면 내가 눈이 닫지 않는 곳에 누군가가 있나?
"거기 누구 있어요?"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목소리가 나와지지 않는다.
아래를 비껴 쳐다보니 목에도 무언가 줄 같은 것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소리가 나지 않으니 답답했지만 도리가 없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떠 보았지만 여전히 똑같다.
흰빛 벽이 있고 잔잔히 울려 퍼지는 캐논 인버스의 실로폰 소리가 울린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 있는거지?


그가 코트에 묻은 눈을 털고 화실의 문을 열고 들어 오면서 내게 던진 말 때문에 프러시안 블루의 진한 파란색이 잔뜩 묻은 붓을 잠시 내려 놓았다.
"어서 오세요. 주말인데 어디 안 가시고 왠 일이세요 ?  밖에 날씨가 많이 춥죠 ?"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포트 스위치를 켜면서 대답을 했다.
"요즘은 주 5 일제라서 토요일도 한가합니다. 마침 다른 약속도 없고 해서 이리 왔습니다. 그런데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지금 이 곡의 실로폰 소리가 아주 맑아서 좋네요."
"네, 저도 실로폰으로 연주한 이 곡을 제일 좋아해요. 음이 맑고 투명해서 언제건 무겁고 어두운 마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 주는 것 같지 않으세요 ?"
"아 참 제가 음악에 문외한이라 여쭙는 건데 캐논이면 캐논이지 변주곡이라는 건 또 뮙니까 ?"
"변주곡이라는 것은 음.....어떤 주제가 되는 테마를 다양한 방법으로 변형한 곡들을 말하는 음악 용어라고 해요. 그림으로 치면 같은 동판화로 찍은 판화라도 색깔이나 인쇄물을 달리해서 찍어 내면 전혀 다른 느낌이 나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거예요. 아니 그것하고는 좀 다르겠지만 하여튼 그렇게 일정한 기본 주제가 있고 그 테마 리듬을 다양하게 음악적으로 변형한 것을 변주라고 말하거든요."
"채란씨는 음악에 대해서도 많이 아시는 모양이네요."
"아니예요. 전혀 몰라요. 다만 이 곡을 좋아하다 보니까 관심이 있어서 알아 본 것 뿐이예요.  원래 이 곡은 파헬벨이라는 작곡자가 작곡한 '3대의 바이올린과 바소콘티누오를 위한 캐논과 지그' 라는 원곡에서 이 캐논 부분만 떼내어서 연주한 건데 유키 구라모토나 조지 윈스톤의 변주가 유명하다고 말하지만 저는 다른 작곡자의 것은 그다지 좋아 하지 않아요."
"자꾸 들으니까 저도 이 곡이 좋아지려고 하는군요. 커피 물 다 끓었나 본데 한잔 안 주실 건가요 ?"
"아 참 커피는 항상 드시던 대로 진하고 뻑뻑하게 타 드리면 되나요 ?"
"워낙에 제가 프림과 설탕을 좀 많이 넣어서 먹죠. 저는 그게 좋습니다. 음식이든 무어든 화끈한 것이 좋습니다. 눈 내리는 날 미인과 커피 한잔이라. 행복이 따로 없군요."
"미인이요 ? 이 나이에 무슨 미인은.....그래도 싫지는 않네요. 밖에 눈이 많이 오나 봐요 ? 아까 제가 나올 때는 흐리기만 했는데"
"펑펑 쏫아 집니다. 왜 저와 함께 데이트라도 해 주시렵니까 ?"
"데이트요 ? 나중에 해 드릴께요. 오늘은 아빠 기일이라 조금 이따가 들어가서 엄마 도와 드려야 해요."
"아 그렇군요. 아버님이 10년전 이맘때 쯤 돌아 가셨다고 하셨죠 ?"
"네."
"이런 걸 묻는 것은 실례가 되지 않을지 좀 저어되기는 하지만 비교적 많지 않은 연세이신데 혹시 지병이 있으셨나요?"
대답을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휴대폰 벨이 울린다. 엄마가 전화를 한 모양이다.


전화벨이 울린다.
"안녕하세요. 화랑인데요 한화백님 가족이신가요?"
"녜. 딸인데요."
"그림이 한점 팔렸습니다. 그래서 어느 계좌로 입금해 드리면 되는지 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아무래도 나오시기 번거로울 듯 해서요."
궁핍한 살림에 그림이 팔렸다니 좋아할 일이지만 아빠의 그림이 팔렸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무명 화가의 그림인데다가 전시회는 단 삼 일로 종료되었는데 그림을 사간 사람이 있다니.
아빠가 갑자기 자살로 삶을 마감하시고 마뜩치 않은 것이기는 했지만 평소 아빠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여 엄마가 마련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아빠의 개인전 전시회였지만 애당초 그림을 사갈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사실 우리 가족들은 영문도 모르고 먼 지방에서 목숨을 끊은 아빠에 대해서 화가 났었기 때문에 유작전을 여는 것에 대하여도 고민이 많았었다.
가족들을 버려두고 아무 설명도 없이 무책임하게 세상을 버렸다는 사실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다.
잠시 상념에 젖어 있는데 전화기에서 다시금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아 녜. 잠시만요. 계좌번호 좀 찾아 볼께요. 그런데 혹시 그림을 사간 분이 누군지 알 수는 없을까요?"
"구매자요? 개인적인 정보라서 구매자에 대하여 알려드리지는 않고 또 대개는 대리인을 통해 구매하시는 분도 많아서 실구매자를 알기는 좀....."
말끝을 흐리는 것은 썩 내키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도대체 아빠의 그림을 구매할 만한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아 궁금증이 일었다.
"대리인이라도 좋으니까 한번 확인해 봐 주시겠어요?"
"저는 직원이라 일단 관장님께 말씀드려는 볼께요.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그런데 판매된 그림은 어떤 그림인가요?"
갑자기 판매된 그림이 무엇인지 궁금해져서 끊으려는 전화기를 붙잡고 물었다.
"팔린 그림은 20호짜리 연인상입니다."
"연인상이요?"
아빠의 그림에 그런 것이 있었던가?
사실 아빠의 소원을 들어 주기 위해 유작전을 열기는 했지만 정작 어떤 그림들이 전시되는지는 화랑의 큐레이터에게 맡겨 두어서 잘 몰랐지만 아빠가 그린 그림들은 거의 풍경이 대부분이었는데......
뭐 그런 그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화기를 내려 놓으면서 그림을 사간 사람이 누굴까 하는 의문이 점점 커졌지만 현재로서는 더 이상 알 방법은 없었다.
아빠의 죽음과 관계가 있는 사람인가?


경찰서에서 온 연락을 받고 시신을 안치해 둔 안치실로 내려가는 발걸음은 아무리 태연하려고 해도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도 이런데 엄마는 오죽할까 싶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저 잠시 멀리 여행을 떠나시는 줄 알았다.
안치실에 들어서자 다소 서늘한 냉기가 돌았는데 바깥 날씨도 10년만의 한파라니 춥기는 했지만 그와는 좀 다른 종류의 한기가 옷 속으로 스며든다.
뭐랄까 기분 나쁜 냉기 같은 것?
흰 천으로 덮인 시신은 의외로 갸날퍼 보였다.
저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이 아빠일 것 같지는 않았지만 경찰에서 알려준 생김이며 체구며 여러가지 정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빠의 것과 완전히 일치했다.
"확인해 보세요. 남편 분이 맞으시는지."
경찰관의 지시에 따라 흰 천을 걷어 올리는 엄마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빠는 평소 그리 살갑게 가족을 돌보는 것도 아니어서 어차피 엄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아빠에게 별다른 애틋한 정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식의 죽음이건, 살아 있을 때 어떤 사람이었던 주검을 앞에 두고 그것도 가족의 주검을 앞에 두고 태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잠시 멍하니 시신의 얼굴을 확인한 엄마는 곧 흰천을 덮었다.
검게 변한 얼굴은 그렇지 않아도 정이 붙지 않는 아빠에게 그나마 남아 있던 연민과 정마저도 앚아가 버렸기 때문일까?
"맞네요. 애들 아빠예요."
"맞으십니까?. 저희 서에서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고인께서는 자살하신 것으로 판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따로 부검이나 그런 것은 필요 없으니 수속을 밟아서 시신을 인수해 가시면 됩니다."
자살이라고 한다.
이유가 어디에 있건 가족 중에 자살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남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자책감을 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오죽했으면 제 목숨을 제가 끊었겠느냐 하는 동정심리가 죽은 사람에게 얹어지는 그만큼의 비난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지기 때문이다.
아빠는 가는 순간까지도 남아 있게 될 가족에게 대한 배려는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극히 사무적으로 경찰관은 아빠의 시신이 담긴 안치실 냉동고를 밀어 넣는다.
안치실의 문을 닫을 때 나는 딩동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린다.


"띵동"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
예고 때부터 나와 친하게 지내서 단짝 친구인 혜영이가 전화를 부탁하는 문자를 보낸 모양이다.
급한 소식 같아서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채란이니?"
전화기 너머에서 항상 약간은 들뜬 듯한 혜영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채란아 얼마전에 어떤 남자가 와서 이상한 부탁을 하고 갔는데 너에게 말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 연락했어."
"무슨 일인데?"
"글쎄 며칠 전에 말이야, 한 30 대 초반쯤 되었을까 어떤 남자가 소개로 왔다고 하면서 내 작업실로 찾아 와서는 미완성인 그림 한 점과 낡은 사진을 한 장 내밀면서 그림에 이 사람의 모습을 완성해 줄 수 있겠냐고 하더라고."
혜영이의 말에 의하면 그림은 한 여인을 한 남자가 팔로 다정스럽게 포옹하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완성된 작품이 아니었으며 남자의 얼굴 부분의 모습이 제대로 마무리 되지를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그려 달라고 가지고 온 사진 속에 있는 사람이 아무래도 우리 아빠를 많이 닮은 것 같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빠를 마지막 본 것이 5년이나 지난 일이라 혜영이로서도 장담은 할 수 없었지만 전에 워낙 자주 우리 집을 드나들기도 했고 또 내가 아빠의 모습을 많이 닮았기 때문에 세월이 지났어도 아마도 아빠의 얼굴을 착각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다음날 혜영이가 보여준 사진을 보고 내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빛이 많이 바랬고 아빠가 학창 시절의 젊은 시절에 찍은 것이기는 했지만 사진 속에서 한명의 여자를 가운데 두고 왼쪽에 있는 남자는 아빠의 모습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그 사진은 아빠가 돌아 가시기 전까지 우리 집 앨범에 꽂혀 있는 사진과 똑같은 것이었는 데 아빠의 사진은 많지를 않아서 내가 또렷이 기억하고 있던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진에 대해 언젠가 내가 아빠에게 물었을 때 아빠는 대학생이던 시절  친한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이라고만 말했었다.
그런 사진을 어떤 남자가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진 속의 여자는 누구지?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사진 속의 여자의 얼굴이 내 궁금증 만큼이나 커지면서 점점 내 눈 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사람이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어떤 여자가 내 얼굴을 들여다 보는 기척에 눈을 떴다.
흰색 유니폼을 보니 아마도 간호사인가 보다.
"정신이 드세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어디 불편한 데가 없냐니?
"지금 이 모습을 보고 그런 소리가 나오니?"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 목소리가 나지 않는다.
움직이려고 하고 보니 움직이지 않는 것은 목과 입뿐이 아니었다.
손이나 다리도 전혀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이런 걸 잠수병이라고 하던가?
얼핏 전에 잠수병이라고 하는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나서 어떻게 의사 소통을 해야 하나 잠시 궁리하다가 눈을 꿈뻑거려 보았다.
"괜찮으니까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간호사로 생각되는 여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괜찮기는...당신 같으면 이렇게 옴짝달싹 못하게 된 상태로 있으면 괜찮겠어?"
그때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때요? 김간호사. 의식이 돌아 왔나요?"
"예. 과장님"
"바이탈은 정상인가?"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와지다가 한 50 정도 되었을까  딱 봐도 나 의사입니다 하는 듯이 소심해 보이는 인상의 중늙은이가 흰 가운을 걸친 모습으로 내 시야에 들어왔다.
손으로 눈도 뒤집어 보고 후레시로 눈동자도 비춘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
아니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무턱대고 아가씨의 눈을 까뒤집는 건 무슨 경우야?
많이 불쾌했지만 역시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혈압은 120에 80이구요 맥박도 정상이예요. 과장님."
"그래 다행이군. 이제 고비는 좀 넘긴 거 같은데....."
사람들이 왜 병원을 가기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동안 건강한 체질이라 병원을 갈 일이 거의 없어 몰랐지만 아픈 사람의 심정을 그 누구보다 잘 헤아릴 것이라 생각하는 그들이 정작 아픈 사람의 감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혈압이 어떻고 맥박이 어떻고 체온이 어떻고 등등.
그들에게는 아마도 혈압이나 맥박만 정상이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인가 보다.
내 감정이나 내 궁금증은 그들에게는 그리 관심있는 것이 아닌 듯 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왜 내가 여기 누워있는지 아무도 설명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입은 굳게 닫혀 있을 뿐이었다.


"채란씨  저랑 진실 게임 한번 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 거짓을 말하면  절대 안되는."
흡사 재미있는 놀이를 발견한 아이처럼  지석씨의 입술이 미소를 띄고 있었다.
카페의 안이 다소 어두운데다가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주는 고요함까지 합쳐서 주변에 아무도 없이 우리만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집은 이렇게 테이블 간에 간격이 널찍 널찍해서 주위 사람의 시선과 대화를 의식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강남의 비싼 땅에서 흔히 찾기 어려운 집이었다.
그런 잔잔함이 불편해서 였을까 그가 요즘 유행한다는 그런 장난을 시작하기로 한 것은.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히 내보일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장난에 얼굴 굳혀 가면서 긴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오늘은 그의 데이트를 승낙한 마당이고 이 나이에 20대의 내숭쟁이처럼 군다는 것도 낯간지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고 궁금한 것에 대하여 솔직하게 듣고 싶기도 했다.
워낙 거짓이 판치는 세상이어선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때때로는 무엇이든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인터넷 채팅을 통하여 진솔한 마음을 주고 받고 그러다 결국 깊은 관계로까지 발전하는 경우들이 많다고 하는 모양이다.
"좋아요. 대신 다섯가지 씩만 묻기로 해요."
"다섯가지 씩이나요 ? 저는 한 세가지만 생각했는데 기대 밖으로 선물을 듬뿍 주시는 군요. 좋습니다. 그럼 제가 먼저 묻겠습니다. 첫번째 질문 드립니다. 채란씨는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가 흥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의자에서 몸을 끌어 당겨 내 쪽으로 얼굴을 바싹 당겨 앉았다.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팔을 고이면서 그의 얼굴이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흔히 아무나 들어 오기 어렵다는 사적 공간을 넘어 오고 있었지만 넘어옴과 동시에 내 몸이 뱀 앞의 개구리처럼 거부 할 수 없는 무언가 힘에 의해 잠시 경직되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밤의 신비로운 마력에 의한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아마 촛불의 영상이 비친 그의 검은 눈이 주는 어떤 힘 때문었다고 하는 편이 맞는 대답일 것이다.
그다지 매력이 없지 않은 이성 앞에서는 몸의 솜털이 슬며시 일어나는 다소간의 긴장을 잠시라도 느끼게 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면서 잠시 먼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비록 60 대의 노년이지만 천장을 보면서 지난 날을 생각하는 그녀는 얼굴에서는 젊은 날의 미모가 우아함으로, 활력이 자신감으로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사람을 황폐화 시키는 병마나 긴 세월도 어떤 사람에게서는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송두리째 다 빼앗아 가지는 못하는 것이 틀림없다.
물론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힘든 병상 생활에 지쳐 얼굴이 수심으로 그늘지고 때때로 방문하는 반갑지 않은 고통으로 말하는 동안 약간씩 말을 멈추고 인상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고고한 품위를 잃지는 않았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구나. 그것이 설사 가족일지라도.
그리고 어떤 사람의 과거는 과거대로 묻어두는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만한 나이가 되니까 과거에 집착하는 네가 안쓰럽구나.
나에게도 너와 비슷한 또래의 아들이 하나 있기도 하고 또 친구의 딸이니까 굳이 존대는 하지 않으마. 이해해 줄 수 있겠지?"
"네,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운명의 사슬이 다른 방향으로 엮였다면 그녀가 내 어머니가 되었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미 네 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분이고 우리들의 이야기도 이제는 추억 속에 묻어 두어야 하는 이야기이지 않겠니 ? 무덤을 다시 파서 나오는 것 중에 아름다운 것은 없단다."
그녀의 말은 상당한 인내의 틀을 거치고 나오는 것처럼 한마디씩 천천히 하기도 했지만 저 깊은 우물 속에서 울려 나오는 것처럼 낮고 무겁게 들렸다.
말에도 가벼운 말이 있고 무거운 말이 있는 데 그녀의 말은 세월의 두터운 더께 때문인지 아니면 의사라는 직업으로 인해 밴 습성때문인지 더 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
"네가 몇 번 찾아 왔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유야 어쨋든 아픈 사람을 일부러 찾아와 주니 고맙구나. 그리고 보니 네 아버지를 많이 닮았구나."
처음에 그녀를 찾았을 때는 수술 직후라 말을 건네지 못했었다.
그 뒤에도 몇 번 방문을 했지만 환자가 면회를 거절하여 서너번을 헛걸음만 하고 말았다.
오늘은 상태가 좀 나아지시기도 했고 모종의 심경 변화가 있어서인지 모르겠으나 흔쾌히 시간을 내주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다행이다.
그런데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 할 지 모르겠다.
아빠의 친구니까 어머니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잘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냥 아주머니라고 해야 할 지.
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그의 호칭을 정해 주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무난하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아픈 분께 결례인줄 알면서도 꼭 여쭙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선생님을 이렇게 번거롭게 찾아 오게 된 거예요. 오늘은 꼭 우리 아빠에 대해서 아시는 대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궁금했지만 알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한 비밀의 열쇠를 이 여자가 쥐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입술이 나도 모르게 떨려 흡사 학예회에서 처음 발표하는 아이처럼 말이 조금씩 떨려 나왔다.
그녀는 잠시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멍한 표정이더니 힘들게 말을 꺼냈다.


"채란씨는 왜 그림 그리는 화가가 되셨습니까?"
차가 끼익 소리를 내고 다시 유턴을 하는 것처럼 사고가 급하게 유턴을 하느라고 잠시 머리 속이 멍했다.
차가 흔들리면서 널부러진 잡동사니처럼 어지러진 머리 속을 잠시 정리해야 했다.
"글쎄요.  그림 그리지 않는 화가도 있나요?"
그가 웃음 없는 얼굴로 잠시 어깨를 으쓱했다.
왠 썰렁인가 싶어 무안했다. 내가 생각해도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농담이었다.
"미안해요. 농담으로 받을 생각은 아니었어요. 어쩌다 제가 그림을 그려서 밥을 먹고 살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떤 프랑스의 소설가는 한살 때 일부터 기억을 더듬어 자전적 소설을 쓴 것도 있던데 저는 그렇게 비상한 머리는 아니예요.
그렇지만 굳이 떠올리자면 제가 기억하는 가장 최초의 기억은 하얀 도화지에 무언가를 그리던 기억이예요.
그 기억 말고도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무엇인가를 그리던 빨갛고 파란 어떤 것들 지금은 그게 물감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때는 뭔지는 모르지만  요술  같은 신비한 것들처럼 제 인상에 강하게 남아 있어요.
아빠가 흰 도화지에 긴 나무 막대기를 갔다 대기만 하면 빨갛거나 노랗거나 하여튼 여러가지 알록달록한 것들이 나왔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 것만을 보아 왔기 때문에 저는 언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거나 한 적이 없어요.
처음부터 제가 할 줄 아는 것도 무엇인가를 그리는 것이었고 당연히 내 인생은 그림을 제외하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지석씨가 하신 질문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고 단지 운명같은 힘 때문이라고 대답해 두면 될 것 같은데요?"
말하고 보니 정말 그랬다.
나는 내 인생의 기억이 있는 순간부터 그림과 함께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아마 죽는 날도 그림과 함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순간 붓을 잡고 있을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차가운 흰 시트가 덮힌 병실 침대보다는 테레핀유나 린시드 오일의 냄새가 진동할 망정 내 꿈과 낭만이 있던 화실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을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내 입술을 빤히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채란씨 입술이 참 이쁘네요."
"네?"
"밀씀을 하시는 모습을 보니 도톰한 입술이 오물거리는 생명체처럼 혼자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이 남자가 나에게 작업을 거는 건가?
아름다움이라는 황홀한 정거장으로부터는 한 10년 전 쯤 그리고 착각이라는 이름의 정거장으로부터도 한 이삼년은 이미 지나와 버린 나이였다.
그러나 아직 미련이라는 정거장에서는 떠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의 말이 그리 싫지는 않았다.
"채란씨는 궁금한 것 없으십니까? 물어 보셔야 제가 다음 질문을 하죠."
갑자기 생각지도 않던 질문을 생각해 내려니 이 나이에 주책맞게 무슨 진실 게임인가 싶었지만 내 마음 속에도 보기보다 유치한 구석이 숨어 있었나 보다.
"지석씨는 왜 의사가 되셨어요 ? 어머님 때문인가요 ? 그것도 남자가 산부인과 의사가 되는 것은 평범한 마음으로 하신 것은 아닐 것 같은데."
"저요? 글쎄 흰 가운이 좋아서라고 할까요? 멋지잖아요. 그래서 의사가 되었는데 막상 산부인과 의사는 흰가운 입을 일이 많지가 않군요."


주변이 온통 흰빛에 밝은 공간이라서 인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참은 지난 것 같은데 아까 다녀갔던 간호사는 다시 오지 않았다.
아까? 아니 어제던가? 혹은 그 이전이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사람이 시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결국 공간의 변화나 그 주변의 상황에 대한 유추로 가능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처럼  주변에 아무 것도 아무도 없다면 시간의 흐름도 알기 어렵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렇게 혼자 있다는 것도 그리 편한 것은 아니구나 느껴진다.
그 멍청해 보이는 간호사라도 와주면 무언가 실마리라도 알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역시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먼저의 간호사는 아니지만 똑같은 모양과 똑같은 색의 옷을 입은 간호사가 들어온다.
"잠시 혈압 좀 체크해 볼께요."
먼저 겪었던 간호사보다는 낫다.
그래도 무얼 할지 알려는 주니까.
"많이 힘드시죠? 조금만 힘내세요. 많은 분들이 애쓰고 있으니까 곧 회복되실 거예요."
사람이 천차만별이듯이 이 분야도 그런가 보다.
이 사람이라면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물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술을 움직여 그리고 눈을 꿈뻑거려 내 의사를 알려주려고 애를 썼다.
"움직이시면 안되요. 목과 여기저기가 상해서 움직이시면 회복에 좋지 않아요."
그렇지 난 움직일 수가 없지.
"그런 큰 사고를 당하시고도 이렇게 살아 계시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예요. 그러니 힘 내세요."
사고?
무슨 사고?
내가 사고를 당했었나?
교통사고인가 아니면 추락 사고인가?
여하튼 무슨 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누워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나는 누구이고, 왜 사고를 당했는지, 그리고 현재 내 상태는 얼마나 망가진 것인지, 먼저 들렸던 음악 소리는 어디서 난 것인지.
궁금한 것 투성이었지만 입과 손이 기능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아참 사고 당하실 때 옆에 있던 소지품은 옆 서랍에 넣어 두었어요. 뭐 지금은 쓰실 수도 없겠지만. 그리고 여기 컵 두었으니 이젠 물 정도는 드셔도 되요."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홍차를 마셨다.
서산에 걸린 해가 그녀의 옆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실루엣이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루엣에는 주름살이나 기미와 같은 세월의 그늘이 모두 감추어지기 때문에 젊은 날의 아름다웠을 때의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를 않을 것이다.
그녀의 젊은 날은 어땠을까 ? 화려했을까 아니면 아빠처럼 쓸쓸했을까 ?
그녀가 뜨거운 홍차를 한잔 마시고 나서 다시 원래의 고고한 모습으로 돌아 오고 있었다.
"내가 그림을 네 친구, 아 네 친구인지는 몰랐지만 그 친구에게 부탁을 하게 된 것은 내가 죽기 전에 저쪽 세상으로 건너간 네 아빠에게 조그만 속죄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다음 세상에서 만나게 될 네 아빠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아서 였다.
그래서 5년이나 지났지만 그림의 가필을 부탁했던 것이란다.
그런데 그 일이 결국 가라 앉았던 감정의 찌꺼기들을 다시 흩뜨려 올라오게 만드는 것이 될까봐서 걱정이 되는구나."
"저는 알고 싶어요. 왜 아빠가 자살을 하실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선생님은 아빠와는 어떤 관계이신지, 모두 알고 싶어요. 그래서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오게 된 것이예요."
"네 아빠는 평소 우리는 두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말을 자주 했었지.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두 세계 중 한쪽에 속해서 살기 때문에 보통 인식하지 못하고 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두세계를 넘나 들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경우 두 세계의 차이 때문에 종종 혼란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 말을 했었다.
의학적으로는 정신분열증에 의한 다중 인격체가 보여주는 세상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누구의 말이 맞는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겠지."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평소의 아빠는 엄마의 말대로 온전히 우리들에게 있는 것 같지 않고 항상 반쯤 넋이 빠져 나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하는 것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인가 보다.
"네 아버지는 자살하신 것이 아니야. 이쪽 세상에서 저쪽 세상으로 건너 가신 것이지.
아마도 네 아버지는 두 세계에 걸쳐서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서도 완전하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구나.
한쪽은 이성이고 현실이라면 다른 한쪽은 감성이고 이상의 세계지.
네 아버지가 왜 완전히 저쪽 세상으로 건너가기로 결정했는지는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다만 산다는 것은 어쩌면 아주 하찮은 것들에 의해 한순간 이쪽으로 아니면 저쪽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알만한 나이가 되었구나.
어쩌면 네 아버지도 그렇지 않았을까? 우리는 모르지만 그저 사소한 어떤 것 때문에도 우리는 한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 수도 있다는 것"


벽제 화장터에서는 매일 같이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온다고 했다.
태어나는 아이가 많은 만큼 죽는 사람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화장장에서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 한명씩 한명씩 한때 숨이 쉬고 웃고 울던 몸뚱아리들이 한줌의 재로 변해서 조그만 유골 항아리에 담겼다.
원래는 완전히 태워서 없어지게 될 수도 있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미련의 빌미로 한줌 남짓의 유골을 남겨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걸 납골당에 넣는 사람도 있고 평소 즐겨 찾던 곳에 묻기도 하고 또는 어떤 이들은 산이나 강에 유골 가루를 뿌리기도 한다.
유골함을 들고 나오는 어머니의 얼굴 표정은 홀가분한 것인지 서운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는데 아마도 어쩌면 그 둘다 였을지 모르겠다.
모르겠는 것은 엄마의 감정 뿐이 아니었다.
왜 아빠가 자살을 택한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경찰에서 말해 준 것은 시신이 발견된 장소와 독극물로 돌아가셨다는 것 뿐이었고 그것으로는 자살의 동기를 알 수는 없었다.
여하튼 아빠의 죽음으로 해서 뿐 아니라 엄마는 허전해 하셨고 나는 당황스러웠고 혼란스러웠다.
살아 생전에는 오히려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하던 사람이 막상 죽어서는 더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은 아이러니했다.
아빠의 죽음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아빠에 대하여 그리고 그런 아빠와 함께 살았던 지난 삶에 대하여 전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저 조금 무뚝뚝한 사람이고 가정과 자식에 대하여 무관심한 남편이고 아버지로만 생각했었다.
그렇게 마음대로 생각하고 맞추어 놓았던 퍼즐이 한꺼번이 섞여 버린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우리가 함께 살았던 아빠라는 이름의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던 것이지?


시간은 꽤 많이 흐른 것 같다.
그러나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기 누워 있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고 여전히 흰 옷 입은 사람들만 왔다 가는 외에 아무도 없었다.그저 그동안 차리리 기억 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이러저러한 기억의 조각들이 머리 속에서 어지럽게 흩어져 나부끼고 있을 뿐이었다.
어제 그랬던 것처럼 밖에는 여전히 겨울비가 내리고 있거나 아니면 메마르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거리를 휘저을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소복한 흰 눈이 내려 쌓일 지도 모르지만 나는 흰빛이 도는 침대에 누워 있다.
기억은 온전치 않지만 우울한 느낌과 허전한 느낌 같은 감정들은 온전히 회복되었다.
체중을 감량할 때도 원하는 뱃살이 아니라 얼굴이나 가슴이 먼저 빠진다더니 머리 속도 그런 모양이다.
다만 다행히 달라진 유일한 것이 있다면 한쪽 팔이나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 정도였지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수십가지 중에 그저 하나였다.
살아 있으면서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먹는 것과 싸는 것, 그리고 눈커풀을 움직이고 팔 하나 움직일 수 있는 것, 그리고 생각을 할 수 있는 것 뿐이라면 그것으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시 할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많다면 결과가 많이 다를까?
발가락을 움직일 수가 있게 되었다고 해서, 허리를 구부려 일어나거나 앉을 수 있게 되었다면 세상이 더 살만한 곳이 될 수 있을까?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손 하나 발하나가 더 얹어진다고 해서 우울한 이 기분을 떨칠 수도,  그가 다시 돌아올 것 같지도, 그래서 내 삶의 모습이 화창한 봄날의 들판처럼 아름답고 화려할 것 같지도 않다.
움직일 수 있는 한쪽 팔을 뻗어 서랍을 열었다.
한쪽 팔로 서랍을 열고 물건을 꺼내는 것은 쉽지는 않았지만 핸드백 속에 들어 있던 물건 하나가 간절히 필요했다.
찾고자 한 것은 립스틱이었는데 원체 핸드백 속에 물건들이 많지 않아서 꺼내기는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을 내려는 소설가가 펜을 들듯 립스틱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핸드백 속에는 두개의 립스틱이 들어 있었는데 하나는 피빛 빨간색이었고 하나는 죽음처럼 잿빛이 도는 자주색 립스틱이었다.
말하자면 한쪽은 To be continued 였고 한쪽은 The end 였다.
어느 립스틱이 내 손에 잡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것이든 나는 그것을 기꺼이 바를 생각이다.
설핏 웃음이 나오려 한다.
병원에 그것도 아마도 중환자실 같은 병실에 누워 립스틱을 바르는 여자라니.....
잠시후 내 손에 잡혀 나온 립스틱의 뚜껑을 한손으로 천천히 열었다.
아무 것도 아닌 불과 5cm 남짓의 립스틱이 내 삶의 길을 이쪽으로 혹은 저쪽으로 바꾸도록 내맡겨 둔다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것 같아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나는 그 중 하나를 골라서 천천히 입술에 발랐다.
운명이란 내가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내가 결정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사랑한 적 있냐구요? 많아요. 연애 많이 해보았어요. 남자 친구도 있었고 그 중에는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낀 친구도 있었어요.
그러나 정확하게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친구들 말 들어 보면 다 달라서 내가 한게 사랑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제가 누군가를 사랑한게 맞다면 미대 2학년때 복학한 선배한테 느낀 감정이 가장 비슷한 걸 거예요. 물론 나중에 제가 보기 좋게 차였지만요.
제게 자기가 너무 모자란 사람이라든가 뭐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아요. 남자들이 하는 그런 말은 싫다는 의미라면서요? 그때 많이 괴로웠어요.
그러니까 사랑한 것 맞는 거죠 ? 그런데 지금은 그 사람 얼굴도 이름도 기억이 나지를 않아요.
오히려 기억이 나는 것은 저를 죽자고 쫓아 다니던 애가 있었는데 지금도 가끔 그 생각이 나요.
어느날 제가 그림 그리는 화실에 찾아와서는 붓을 씻은 더러운 물이 담긴 붓통을 들어 그 물을 벌컥벌컥 들이 마시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그런 그애가 참 무서웠는데 지금은 조금 그리운 생각도 드네요. 얼마나 좋아했으면 그랬을까 싶어서요. 그 사람은 분명히 저를 사랑한게 맞겠지요?
그 사람하고 사귀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연애하고 자고 그리고 결혼도 하게 되었을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 다섯번째 질문은 자연스럽게 대답하실 수 있겠군요. 다시 예전의 원하는 어떤 시기로든 돌아 갈 수 있다면 어디로 돌아가서 무엇을 꼭 해보고 싶으십니까 ? 그 분과의 인연을  한번 이어 보시고 싶으신가요?"
"글쎄요. 다시 돌아 가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막상 갈 수 있다고 해도 돌아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원하는 순간으로 가서 원하는 데로 한다면 내내  행복할까요?
만일 그렇게 해도 행복하지 않다면요? 원하는 것을 다 가졌는 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때는 무엇을 기대하고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겁이 나요.
모든 것을 내 맘대로 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된다면 행복하기 보다는 괴로울 것 같아요.
전지전능한 힘을 감당할 만큼 이성이나 의지나 지혜가 완벽하지 않은 내가 그런 힘만 휘두를 수 있다면 많은 사람을 아프게 할 수 밖에 없을 거고 그러면 결국 나도 마음이 편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따라서 내가 가진 만큼의 능력만큼 이룰 수 있고 모든 것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다행인지도 모르겠어요.
하느님은 아마 자신이 가진 전지 전능한 힘을 사용하는데서 오는 부담이 굉장히 클 거예요. 내 손끝 하나의 움직임으로 그리고 내 딛는 한 발자욱으로도 한 사람이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겁나겠어요?
언젠가 개미가 사방을 둘러 싸고 있는 꿈을 꾼 적이 있었어요. 앞으로 한발자욱만 내딛여도 수도 없이 많은 개미들이 죽을 것 같아서 도저히 발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점점 개미가 내 몸으로 올라와 전신에 달라 붙어서 뜯어 먹는 꿈이 었어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고통스러웠어요. "
그는 이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내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와인의 술기운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이제 지석씨는 카드를 다 쓰셨으니까 제가 질문을 해야 할 차례네요."
"아니 채란씨는 아까 패스하지 않으셨습니까 ?"
"아니요 물어 보고 싶은 게 생겼어요. 그리고 아까 물어 본 것 대답해 주신다고 했지 않았든가요 ?"
"지석씨가 제게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은 어떤 것이지요? 제 마지막 질문은 그거예요."


오늘 그와 헤어졌다.
산다는 것을 쇠똥구리의 쇠똥처럼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평생 짊어 지고 가는 짐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그 짐을 함께 지고 가자던 사람과 헤어졌다.
만나서 얼굴을 보고 말하고 먹고 안고 하는 날들의 길이는 헤어지는 순간의 길이와는 아무런 비례 관계가 없는 모양이다.
수년을 만났지만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나누고 얼굴을 돌려 그의 등과 내 등이 마주 보는 데는 불과 몇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만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은 운명이고 필연이라고들 의미 부여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어쩌면  우연히 만났다가 필연적으로 헤어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니 사실은 헤어지는 것 조차도 우연히 벌어지는 일에 더 가까울 듯도 싶다.
그와 헤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헤어져야 할만한 절박한 이유도 찾을 수가 없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도저히 어찌할 수 없고 대단하고 그럴싸한 것이었으면 받아들이기가 더 쉬웠을까?
도대체  우리가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 정말 모르겠다. 왜 만났는지 정말 모르겠는 것처럼.....
아마도 아빠의 사랑도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빠가 돌아가신 것도  어쩌면 무슨 큰 이유가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멋지게 사랑하고 많이 아껴주고, 아이도 많이 낳고 정말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술에 취한 것 같지도 않은데 땅이 울렁거리듯 흔들거린다.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의 불빛이 어지럽게 흩어지면서 경적을 울리며 내 좌우를 지나쳐 간다."야 죽으려고 환장했어?" 하는 말 같기도 하고 아니면 "살려고 환장했어?"하는 말 같기도 하다.
뭐 둘다 별반 다를 것도 없는 말이지만.
그가 헤어지면서 자신의 어머니가 병상에 계실 때 종종 하셨다는 말씀이라며 한 말이 문득 생각난다.
"산다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들에 의해서 이쪽으로 혹은 저쪽으로 크게 바뀔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까 모든 것에 너무 미련도, 너무 의미를 둘 필요도 없다"라는  말.
내게 위로라고 해 주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하기 위해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몇년전 언젠가도 한번 들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드는 말인데........데자뷰인가?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인 듯도 싶다.
아주 작고 하찮은 것들로 하여 삶의 궤적이 크게 달라질 수도 있겠다.
한 방울의 물이 대양을 넘치게 한다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말도 어감은 다르지만 같은 의미겠지.
99도의 물에 그저 1도가 더해지기만 해도 물은 액체의 모습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기체의 모습으로 바뀐다.
반대로 1도의 물에서 그저 1도만 빼도 액체에서 고체로 바뀌기도 하고.
물이 죽고 기체가 태어나거나 고체가 태어 난다고 할까?
그때 갑자기 눈 앞이 아주 밝은 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나는 아주 조금 오른 쪽으로 간 것 뿐인데......
눈을 감았다.
#2 심상덕 등록시간 2013-09-11 00:29 |이 글쓴이 글만 보기
먼저의 졸작 "마지막 선물"은 내용이 좀 길었죠?
이번에는 전에 구상해 두고 조금 써두었다가 내팽개쳐 둔  글을 생각난 김에 그리고 오늘 시간도 좀 여유가 있어  짧은 글로  마무리 지어 올립니다.
몇시간 동안 속필로 쓴 것이라 내용이 엉성하고 빠진 부분이 많지만 사실 삶이 그런 것처럼 그런 것을 일부러 의도한 바도 있습니다.

전에는 "캔버스 변주곡"이라는 제목으로 쓸까 했는데 너무 고상해 보여서 그냥 평범하게 "미완성 퍼즐"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읽으시고 남자 주인공의 나머지 질문은 무엇이었는지 여자는 일부러 사고를 자초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한 사고를 당한 것인지, 결말은 무언지 등 내용 관련으로는  물어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모르니까요. ㅋㅋ
물론 읽고 난 후 소감을 올려 주시는 것은 대환영입니다.

빠진 퍼즐 조각은 그냥 읽으시는 분들이 알아서 맞추어서 끼우시면 되고 순서도 알아서 맞추시면 됩니다.
읽고 나니 변 보고 밑 안 닦은 것처럼 찝찝하시죠? 결말도 없고. ㅎㅎ
제가 지금까지 살아본 경험으로는 산다는 게 그런 것 같더군요.
제가 좋아하는 수학과는 다르게 엉성하고 의미도 잘 모르겠고 결말도 없고.
다만 굳이 글을 쓴 의미를 부여하자면 "존재의 하찮음" 혹은 "사랑이라는 것의 가벼움" 정도 될 것 같습니다.
더불어 이곳을 찾아 주시는 분들이 얼마간이라도 시간 때우시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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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경 [2013-09-11 22:30]  
#3 이연경 등록시간 2013-09-11 22:30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조지윈스턴.....제가 중학교때인가 Thanks giving 이곡을 엄청좋아했거든요 핸드폰 알람으로까지 해놓고 매일 들을만큼 ㅋㅋ 근데 친구들은 그거듣고 잠이깨냐고 ㅋㅋㅋ 절 이상하게 보곤했지요 ㅋㅋ 그런데 깜짝놀라는소리에 잠을깨는것보다 조용한음악에 서서히 깨는게 좋을것같아서 옛날부터 이런 조용한 음악을 알람으로 해놓고있어요 ㅋㅋㅋ 정말 오랫동안 잊고있었던노래...오늘은 줄줄이 들어봐야겠어요 ㅋㅋ 옆에서 예준이가 자고있는데  음악을 틀어놔서 숙면에 방해되는지 모르겠네요 ㅎㅎ 아 정말오랜만에 이글덕분에 잊고있던 노래를 만났네요^^

댓글

제 소설이 감히 재미있기까지 바라지는 않고 그저 시간 때우는데 있어서라도 의미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옛 추억이 생각나서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신다니 다행이네요. ^^  등록시간 2013-09-13 15:28
맨위에 몇줄읽고는 이렇게 노래삼천포에 빠져서 허우적대고있습니다 ㅋㅋㅋ  등록시간 2013-09-11 22:32
#4 동민 등록시간 2013-09-17 12:27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왠지 작가 ㅎㅎ 님 내면의 다양한 모습을 여러 등장인물로 나누어 이야기를 만드신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네요. ^^
잘 읽었습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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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소설 제목으로 하셨던 변주곡이나 퍼즐에서 오는 느낌도 왠지 이와 비슷한듯 해서요 ^^ 누구나 다중이의 모습은 있잖아요 ㅋㅋ  등록시간 2013-09-17 13:19
아 그렇게 보셨습니까? 그럼 저는 아빠 남주인공, 여주인공, 아빠의 연인 모두를 포함한 다중인격인 거네요. ㅎㅎ 여튼 판단은 독자의 마음이죠. ^^. 읽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등록시간 2013-09-17 12:49
5# 땅콩산모 등록시간 2013-09-17 12:39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엇..제 댓글도 지금보니 사라졌네요 ㅎㅎ  
시원하게 날려버리셨군요 ^^

댓글

글쎄 말입니다. 댓글을 정성껏 적어 주셨던 것 같은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번거롭겠지만 다시 올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등록시간 2013-09-17 12:50
6# 땅콩산모 등록시간 2013-09-17 18:39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자주색이 아닌 새빨간 립스틱이길 소망해 봅니다^^

댓글

"립스틱 싸인" 이라는 의학 용어가 있는데 환자가 수술 후 얼굴에 화장을 하고 립스틱도 바르기 시작한다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소설 속 채란이 회복되는 쪽으로 가는지 아님 반대쪽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ㅋㅋ  등록시간 2013-09-17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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