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에서 iniania 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신경과 의사의 칼럼을 퍼온 것입니다.
의사로 살면서 공공의 적으로 취급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진솔하게 표현한 글입니다.
일반인들에게 의사가 그저 적이 아닌 아픈 이들을 돕는 보람찬 직업인으로 각인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전에 환자의 진료에 있어 어려움이 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자신의 증상을 적절히 말하지 못하는 환자에게 답답함을 느꼈다는 글이었다.
내 글을 읽으신 다른 의사선생님께서 ‘진료에 있어 환자가 어떻게 답변을 해야 진료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주제로 글을 쓰셨다.
좋은 의도의 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악플이 많이 달렸다. ‘너희 의사들이나 싸가지 없이 굴지 말고 환자 말에 귀 기울여라’ 라는 리플들이었다. 덕분에 글을 쓰셨던 선생님은 크게 상처를 받고 당분간 잠적하시겠다는 글을 남겼다.
나는 한동안 사람들을 만나며 내가 의사인 것을 숨긴 적이 있었다. 왜 그랬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던 것 같다. 퍼뜩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의약분업으로 파업을 할 즈음, 나는 내가 속해있던 문학 동호회의 정기모임에 참석한 바 있다. 파업 중이라 처신을 잘 해야 했지만 휴일이었고, 파업기간임에도 그 동안 친구를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단 하루의 외출을 계획했던 것이다. 서울에 가서 동호회 친구와 형님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내가 의사인 것을 알았던 한 분이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셨고 나는 의약분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거기 있던 한 분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병원이 너무 불편하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파업을 한 우리 의사들에게 불평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었는데, 점점 내용이 과격해졌다.
“의사 새끼들, 아무리 지들이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해도 이렇게 병원을 내팽개쳐도 되는 거야? 지난번에 딸내미가 아파서 응급실에 갔더니만 아주 시장바닥이야. 난장판이더구먼.”
‘의사 새끼들’ 중의 하나였던 나는 그 말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편함을 초래한 것은 우리 탓이니 미안한 마음에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딸내미가 아파 죽겠는데 기다리래. 환자가 너무 많아서 그냥 무작정 기다리라는 거야. 뭐 그냥 기다렸다가는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어떡했는지 알아? 거기 의사놈 하나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질렀지. 이 개새끼들아. 내 딸이 잘못되면 니들이 책임질 거냐? 그리고선 갖다 집어던졌어. 크크크. 그랬더니 어쨌는지 알아? 간호사고 의사고 달려와서 봐주더라고. 시팔 새끼들, 겁은 많아가지고.”
의사인 내가 앞에 있는데도 그렇게 당당하게 욕을 해 대니, 의사가 없는 자리에서야 오죽하겠나. 그 후로도 비슷한 일이 많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의사라는 것을 감추기 시작했다. 의사라는 것만으로 욕을 먹는 것이 싫었다.
의사는 죄인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공공의 적이다. 병이 낫지 않으면 돌팔이라고 욕을 먹고, 병이 나으면 별 것 아닌 걸로 겁줬다고 욕한다. 오리지널 약을 쓰면 약값이 비싸다고 욕하고, 카피 약을 쓰면 싸구려약 썼다고 욕한다. 보호자가 면담하겠다는데 바빠서 못가면 싸가지 없다고 욕먹고, 환자가 외래에 밀려있는데 보호자 면담하러 가면 왜 진료가 늦느냐고 욕먹는다. 검사를 하면 돈 벌려고 과잉 진료했다고 욕먹고, 검사를 안 하면 왜 나는 대충 보냐고 화낸다.
예전에 잠깐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푸념을 한 적이 있다. 한국 의사들 너무 불친절하다는 것이다. 병이나 약에 대해 설명도 제대로 해주지 않는단다. 미국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그래서 나도 친절한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외래 진료시간에 환자 한 명 한 명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대기실에서 난리가 났다. 약 하나 타가려고 했는데 2시간을 기다리라니 말이 되냐는 것이다. 안되겠다 싶어 다시 전략을 바꿨다. 꼭 필요한 내용만 설명하면서 바쁘게 진료를 이어갔다. 자세히 설명을 해도 욕을 먹고, 간단히 설명을 해도 욕먹는다.
괜한 오해를 살 때도 있었다. 어머니 친구 분께서 나한테 은근슬쩍 물으셨다.
‘중환자실에서 환자 데려다 놓고 실험한다며? 그래서 면담 잘 안 시켜주는 거라며?’
공상과학영화를 많이 보신 것인지 정말 뜬금없는 오해였다. 하지만 그 표정은 너무나 진지해보였다. 또 다른 분께서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병원에서 주사기를 재활용하는 것 같다고.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 물으니, 주사기에서 바늘을 따로 떼어서 버리는 것을 봤다는 것이다. 바늘은 몸에 꽂혔던 거니까 재활용 안하고, 주사기는 나중에 바늘만 새것으로 바꿔 쓰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병원에서 주사바늘 분리수거하는 것을 보신 모양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그저 분리수거를 위한 것이니까. 깡통과 페트병을 분리수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난 그날 이후 시술을 할 때 환자 앞에서 직접 주사기와 바늘의 포장을 뜯는다. 재활용 하는 게 아니니 걱정 마시라는 일종의 배려이자 시위다.
의사에 대한 오해는 너무나 많다. 한 때는 인터넷의 잘못된 댓글들에 하나하나 답변을 해주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하지 않는다. 너무 지쳐버렸다. 욕도 한두 번 먹어야지, 매일 먹다보니 대꾸하기조차 싫어지는 것이다.
의사가 욕을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고심해본 적도 있다. 일단 오진을 절대 하지 않으면 될 터다. 검사를 하지 않고도 진찰만으로 병을 확진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면 된다. 하지만 이것은 100%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환자에게서 돈을 받지 않고 무료진료를 하면 욕을 먹지 않을까? 아니다. 무료진료는 환자유인책이라고 법의 처벌을 받게 된다. 결국, 의사가 욕을 먹지 않는 방법은 없다.
나는 그냥 죄인으로 살련다. 의사새끼라고 욕먹으며 살련다. 잘못된 것을 정정하고 환자를 위해 의료정책을 바꾸려고 노력하시는 선생님들께는 참 죄송하지만, 이젠 지쳐서 더 이상 대꾸할 힘이 없다. 그저 이런 악조건 속에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환자를 치료하며 말없이 살 뿐이다. 의료정책이 환자에게 불이익을 준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비합리적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던 색안경을 끼고 볼 테니 이젠 입을 열기조차 싫어지는 것이다.
비겁한 짓이다. 나도 안다. 이런 내가 비겁하다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나를 이렇게 비겁하게 만든 것은 누구인지도 생각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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