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도 인상파 혹은 인상주의라는 말을 많이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바르비종파니 혹은  다다이즘이나 큐비즘이니 쉬르레알리즘이니 하는 말은 기억하지 못해도 학창 시절 미술 시간에 내내 졸지 않은 사람이라면 인상파라는 미술 사조에 대하여는 귀에 그리 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모네니 마티스니 혹은 고흐나 고갱, 르노아르처럼 지금 유명한 화가로 우리가 알고 있는 화가 중 많은 화가가 인상주의를 추종한 화가들입니다.
그것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림하면 인상주의를 떠올릴만큼 사람들의 뇌리에 강렬한 그야말로 인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인상주의라는 말을 만든 모네의 해돋이 인상은 많은 그림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지금은 역사적인 그림이 되었습니다.

인상주의라는 것은 순간 순간 변화하는 빛의 흐름을 포착해내는 미술 사조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빛의 변화에 따라 가장 드라마틱하게 변화하는 게 있다면 물보다 더 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네는 여름의 반짝이는 세느 강이나 브르타뉴 해안의 파도, 베니스의 운하, 영국의 국회의사당을 지나가는 템스 강 등 물과 관련된 풍경과 빛이 내리쬐는 풍경을 많이 그렸습니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물이 아니라 물의 흐름, 빛이 아니라 빛이 변화하면서 수면이나 구름, 나무 등 자연에 남기는 궤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그가 끊임없이 찾고자 했던 것은 변화하는 것들입니다.
그는 한군데 고정되어 아무런 변화가 없는 대상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 자화상이 거의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자화상이란 이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자기 자신의 내면에 대한 관찰에 다름이 아닌데 그에게 관심이 있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외부의 자연 특히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면을 보는 자화상이든 자연을 그리는 풍경화이던 화가들이 소재로 삼는 대상은 비록 대상이 다르더라도 한가지 공통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모딜리아니에게는 여인이고 고흐에게 해바라기이고 밀레에게는 시골의 농부들로 다른 모습이지만 화가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그린다는 것입니다.
모네는 나중에는 수련을 그리면서 화가로의 말년을  보내게 되는  데 86 세로 죽기까지 마지막 30 년간은 거의 물에 뜬 수련만을 그렸다고 합니다.
모네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수련에 집착했던 이유에 대하여 혹자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시간의 움직임을 붙잡아 두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빛의 향연 속에 수시로 변하는 수련을 사랑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정확한 지적일 것입니다.
모네에게 수련이 어떤 의미였던가 하는 것은 그의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계속 관찰하다가 어느 순간 영혼으로 들어 오는 것이다. 어느날 나는 문득 연못 속에 있는 요정들을 보았다. 나는 그것을 그리기 위해 팔레트를  잡았다. 이후로 나는 수련 이외에 어떤 것도 그릴 수 없었다."
수련에 대한 그의 집착은 가히 한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의 자세와도 흡사했습니다.
어떤 것에 대한 열렬한 애정은 그림이든 음악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는 못배기게 만듭니다.
특히 말년에 사랑하던 두번째 부인 알리스와 장남 장 마저 떠나 보내고 화가에게는 생명과 같은 눈에 백내장이 생겨 고생하던 시절에 그에게 그림이란, 그리고 그 대상으로서의 수련이란 절실한 애정의 대상으로 손색이 없었을 것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 시간에 따라 다양한 빛깔로 모습을 바꾸어가면서 나타나는 모습은 그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아름다운 수련을 화폭에 옮기면서 그가 느꼈을 희열이 화폭에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보면서 후세 사람들이 비슷하게 매혹적이고 아련하고 그립기도 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시작이 그렇듯이 모네도 데뷔할  당시에는 인상파라는 비난조의 말로 비평가와 감상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했습니다.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 기존의 것에 대한 파격은 심한 반발을 불러 오게 마련입니다.
모네가 활동하는 당시에 미술계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세밀하게 그리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사조가 주류를 이루어 오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해돋이 인상이라는 작품으로 출품된 그의 대표작에 대하여 당시 유명한 화가가 "애들의 색종이도 이보다는 나을거요"라고 말했다고 할 정도로 조롱을 받은 것은 당연한 반응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진기가 발명되어 자연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로서의 그림의 가치가 점점 떨어지려 하던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모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로 인하여 오히려 그림이 새로이 설자리를 얻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사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기능에만 그림의 목적이 있었다면 멀지 않은 시기에 그림은 그 가치를 사진에 빼앗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소니의 워크맨이 MP3에 그 기능을 넘겨주고 사라진 것처럼 세상의 많은 것들에는 그 나름대로의 시효같은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자연의 단순한 묘사로서의 그림의 생명력도 사진기의 등장으로 막 그 수명을 다하려던 찰나에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표현 형식을 찾으므로써 그 생명력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해도 지나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붓글씨가 더 이상 의사 전달의 수단으로는 남아 있지 않고 서예라고 하는 새로운 예술의 장르를 찾아 살아 남을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여하튼 모네는 초창기에는 화가로서 인정을 못받고 멸시를 받았지만 그래도 고흐나 다른 많은 화가들과는 다르게 다행히 그의 생전에 자신의 그림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의 나이 32 세때 그의 그림은 지금 돈으로 6 만원에 불과한 가격이었지만 1912 년 그의 나이 72 세 때 베니스의 운하를 그린 그림 14 점으로 10억원 정도의 돈을 받고 그림을 팔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나중에 그의 사후 뉴욕 소더비 경매장에서 이 그림 중 하나인 베네스의 대운하 한점만으로도 157 억원에 경매로 팔린 것을 생각하면 그것도 싼 편이었지만.
여하튼 화가 뿐 아니라 어떤 부류에 종사하든 경제적인 점에서든 명성이라는 점에 있어서든 죽기전에 제대로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화가인 들라크루아가 자신의 일기에서 "너무 일찍 태어나는 천재는 불행하다. 아름다움은 발견되지만 단 한번 특별히 정해진 역사적 순간에만 발견될 뿐이다."라고 술회한 것을 보더라도 다른 이들의 평가가 얼마나 인간을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만드는 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평가를 생전에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인상주의 화가들이 남긴 업적은 결국 언젠가는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네를 포한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만을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연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을 살펴보려면 불가피하게 빛이 쏫아지는 야외로 나가 자연의 여러 모습을 관찰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예전에 실내에서 정물화나 인물화를 그리던 때에 사용하던 물감을 담는 큰 깡통은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렵을 전후하여 현재의 튜브형 물감과 야외용 이젤이 개발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간편한 회화 도구들은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다가가기 쉽게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그림에 대하여 수요자와 공급자층이 넓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상주의는 이렇게 바라 보는 방식과 도구에 있어서의 변화로 그림이라는 예술 영역을 어렵고 높기만 한 곳에서 대중들에게 좀더 역동적이고 친근한 위치로 끌어 내려 오는 데 기여를 했습니다.
적당한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빵으로 비유하자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림을 비싸고 고급이지만 대신 딱딱하고 맛없는 빵에서 부드럽게 씹는 맛이 살아 있고 쉽게 집어 볼  수 있는 갓 구워낸 빵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견디기 힘든 고통을 위무하는 예술가들의 가치에 추가하여 인상주의 화가들의 가치가 하나 더 있다면 바로 이렇게 대중 속으로 그림을 가져온 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자화상 중 맨 아래 것은 그의 나이 77세때 그린 것이라고 하는 데 그 시기는 그가 백내장으로 불편한 시력으로 홀로 은둔한채 수련 연작에 몰두하던 시기입니다.





#2 땅콩산모 등록시간 2014-05-10 17:10 |이 글쓴이 글만 보기
당시에 백내장 수술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요..안타깝네요;;;

댓글

그랬다면 수련을 그린 그림의 갯수가 더 많아졌겠죠? ㅎㅎ 물론 맨 아래와 같은 그림도 없었을테고..ㅎㅎ  등록시간 2014-05-10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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