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의 픽션인지 팩션인지 애매하고 어줍잖은 고백록의 여파가 적지 않은 듯하여 고백록은 그만 쓸까 했는데 두가지 이유 때문에 이어서 씁니다.
하나는 연애사로만 고백록을 끝내면 연애 스토리는 제 인생의 극히 짧은 한때의 기록임에도 팔랑심=연애 대장  뭐 이렇게 이미지가 굳어질까봐  염려가 되서 그것을 바로 잡아 보려는 목적이고 또 하나는 오늘 비번이라 막히는 강변 북로를 뚫고 퇴근하여 거의 집에 도착했다가 삐리리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받았더니 병원에서 온 전화였는데 살짝 진통이 있는 경산모가 온다는 연락이었습니다.
결국  집에는 문앞에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차를 돌려 병원에 오면서 참 내가 어쩌다 산부인과 의사를 택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지난 시절이  되돌아 보아 지게 되어서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어쩌다 산부인과 의사를 직업으로 택했고 어떻게 지내왔는지 하는 것을 써 보기로 했습니다. 뭐 어느 정도 내용은 이미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53년 인생 중 거의 반 이상을 산부인과 의사가 되기 위한 과정 혹은 산부인과 의사로 살았으니 어쩌면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긴 부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는 3편--수련의 시절, 삼성의료원 시절, 개업의 시절--으로 나누어서 쓰려 합니다.
우선 첫번째로 오늘 쓸 내용은 수련의 시절입니다.
이전 고백록에서도 협박성 멘트--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고 이어질 수도 있다-를 날렸지만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팔랑심이라는 필명답게 손이 근질거려 중간에 그만 두지도 않을거면서 쓸데 없는 협박성 멘트는 그만 날렸으면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께는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어차피 인생은 내일을 알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제가  내일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혹은 심경의 변화로 인하여 인생이 그리고 글이 갑자기 중단될 수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그런 알림 혹은 경고--계속 혹은 끝-를 예고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사는 인생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그런 점 이해하여 주시기 바라며 27년 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산부인과 의국 앞 복도에는 저를 포함하여 총 11명의 지원자가 일렬로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지금보다는 훨씬 젊은 20대의 파릇파릇한 (?) 얼굴로 긴장된 자세로 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죠.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무슨 질문을 듣게 될까 궁금해 하면서 말입니다.
잠깐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드리자면 의과대학을 마치고 매달 내과 외과 등의 각종 진료 과목을 한달씩 돌아가면서 수련하는 1년간의 인턴 과정을 끝내면 이어서 4년간의 전공의 과정을 밟고 전공의 과정 후 전문의 시험에 통과하여야 정식으로 무슨무슨 과 전문의가 됩니다.
이런 제도는 독일을 포함한 유럽의 도제 수련 방식이 바탕이 된 것으로 그 제도를 일본이 들여왔는데 일본의 제도를 그대로 물려 받은 우리나라도 같은 방식으로 전문의 제도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도제 방식은  마스터라 불리는 장인이 여러명의 제자를 일대일로 직접 가르치기도 하고 어깨 너머로 마스터의 기술을 배우는 수련 방법으로 상하수직 관계가 상당히 분명한 제도입니다.
반면에 미국은 이런 전문의 제도가 없고 대학원 제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처럼 전문의(레지던트) 가  있기는 해도 좀 다른 의미이며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의과대학원에서 석사나 박사 과정(박사를 닥터라고 하는데 의사를 닥터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것의 영향입니다.)을 수료하여 그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을 받게 되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은 전문의 방식, 미국은 박사 방식으로 시스템이 좀 다르게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는 이 둘을 모두 가져와서 전문의이면서 박사를 따는 것이 관행인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좋다는 것이면 서로 맞지 않더라도 무엇이든 가져다 꿰어 붙이는 좋지 않은 습성은 좀 고쳐졌으면 좋겠습니다만.....
따라서 우리나라는 상당히 비효율적인 제도로 유지되고 있는데 내용적으로는 아무래도 일본의 도제 방식이 기본이기 때문에 대형 병원에 교수로 근무하든 개업의로 일을 하든 전문의 과정은 거의 필수로 거쳐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도 전문의 자격을 얻기 위한 전공의에 선발되기 위하여 최종 관문인 면접 시험을 받기 위해서 그 자리에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지원할 당시 서울대 산부인과 교실은 한 기수의 정원이 10명이었습니다.
그 중 비군보라고 하여 병역의무를 마친 사람으로 8명을 뽑고 군보라고 하여 앞으로 병역의무를 져야 하는 전공의로 2명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군보는 8명으로 정원을 딱 맞추어서 지원을 하였는데 군보는 2명 모집에 저 포함 3명이 지원하게 되었으니 1:1.5의 경쟁률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때는 지금처럼  산부인과가 아주 인기과는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바닥의 인기도도 아니어서 비군보 중에서도 한명인가 두명인가 지원자가 오버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라고 밝히기는 어렵지만 비군보를 지원한 모 남자 선생님께서 다른 여자 비군보 지원자를 회유 내지는 협박하여 지원을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지원자가 초과되는 사태를 막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해의 산부인과 전공의 동기들 중에는 여자는 단 한명도 없게 되었는데 현재는 10명 전후의 인원 중 남자가 한명도 없거나 간신히 한명만 있는 상황이 대부분이니 참 세상은 모를 일입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연간 산부인과 전공의 수요 250여명의 반도 채 채우기 어려워 지원만 하면 합격할 수 있는 형편이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으니 지금의 젊은 의사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과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참 안타까운 현실인데 평생의 업으로 삼을 수련 과목을 정하면서 자기가 좋아하고 적성이 있는 과목을 선택하기보다는 직업의 편안함과 경제적 전망에 따라 지원과가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대체로 성적이 좋은 사람이 장래에 유망한 진료과목을 선택하게 되고 현재는 성형외과, 안과, 피부과가 3대 인기과입니다.
나머지 흉부외과, 산부인과, 외과는 지원자가 반이거나 아예 그 이하인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따라서 대체로는  성적도 하위권을 맴도는 사람들이 산부인과를 지원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푸대접을 받는 여성이 의과대학 졸업자 그리고 인턴 졸업자 중 성적이 저조하여 다른 과를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하고 떠밀려서 택한 의사들에게 여성으로서의 평생 건강과 출산을 맡겨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모님이 산부인과 의사라서 병원을 물려 받기 위해, 또는 개인적 선호 때문에 우수한 성적으로도 산부인과를 지원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드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 자네는 왜 산부인과를 지원하려고 한 거지?"
드디어 제 차례가 되어 여러분의 교수님들 앞에 얌전한 학생처럼 앞에 두손을 모으고 앉아서 이것저것 질문에 대답을 하였습니다.
여러 질문이 있었던 것 같은데 워낙 오래 전이라 거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면접시 나오는 질문도 쳔편일률적이라 그리 관심있게 기억에 남겨 두지도 않않습니다.
다만 그 질문만큼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미리 준비했던 것도 아니지만 막상 대답을 하고 나니 제 딴에도 잘 대답했다 싶어서 기억에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기 이미 여기저기서 많이 흘리고 다녀서 다들 눈치 채셨겠지만 당시 저는 그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아래 문장 자체가 완전히 똑같다고 오해는 마십시요.
대화에서든 서술에서든 소설적 요소가 분명히 있다는 점을 미리 고백해 둡니다.
먼저번의 고백록처럼 "어디까지가 사실이야?" 하고 묻지는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ㅋㅋ
기억의 재편도 있어서 저도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모르는 것도 있습니다.
실제 없었던 일도 있었던 것처럼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구요.
"산부인과는 임신 출산을 돕는 산과를 전공하고 싶어서 지원하였습니다.
인턴 과정 동안 여러 과를 견학하고 수련해 보았지만 다들 아픈 분들 뿐이고 또 모든 분들이 완치되셔서 기분좋게 댁으로 돌아가시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답답해 보였습니다.
저희 병원이 대학병원이다 보니 이곳이 삶의 마지막 장소가 되시는 분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분들을 치료하여 완치되도록 돕고 또 삶의 마지막이 너무 고통스럽지 않도록 하는 것도 의미가 적지 않겠지만 저는 산부인과에서 새 생명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태어난 아기를 안고 기뻐하는 가족들을 보면서 산과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아니라 건강하게 출산하는 산모를 보고 퇴원할 때도 다음에 다시 오세요하는 말을 건넬 수 있기도 해서 저는 산과를 꼭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고 면접장에서 나왔습니다.
산부인과는  임신 출산을 담당하는 산과, 자궁암이나 난소암과 그외 여러 부인과 질활을 담당하는 부인과, 난임 등을 담당하는 불임 분야등 크게 3분야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서울대 산부인과는 당시 불임 분야가 강해서 그쪽을 하고 싶어 지원하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1985년 10월에 당시의 산부인과 과장님이신 장윤석 교수님께서 국내 최초로 시험관 임신에 성공하시었기 때문에 서울대가 난임 분야에서 국내로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던 무렵이기도 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그때도 산부인과 중에는 산과가 제일 인기가 없었던 편이라서 현재 작든 크든 산과 병원을 운영하는 분들도 대부분 산과 이외의 분야를 전공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부인과나 불임 분야는 일단 응급 상황인 경우는 없으니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상당히 적었던 편이니까요.
설명이 너무 길어졌네요.
별로 재미 없는 내용이겠지만 전후 사정을 알아야 내용을 좀더 실감나게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이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당시 저와 경쟁을 하던 지원자는 저와 아주 친한 친구 한명과 저와는 전혀 친하지 않지만 성적이 훨씬 더 좋았던 친구해서 2명이었습니다.
저는 의과대학 때 중간 정도의 성적이었는데 지원자 셋 중에서도 성적으로는 중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전공의 당락은 반드시 의과 대학 성적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턴을 돌면서 얻은 담당 진료과 교수의 평가, 교우 관계,  인맥 등등 여러가지를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선발을 합니다.
아까 도제식이라 말씀드렸다시피 말하자면 앞으로 이 분야를 함께 책임지고 갈 어떤 의미에서는 가족을 뽑는 것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저와 친한 친구는 비록 저 보다는 성적이 아래였지만, 아니 아래인 것이 아니라 의과대학 시절 거의 제 노트로 공부하고 시험때만 되면 제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고 하면 적당한 그런 친구입니다.
지금도 그런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학창 시절 의과대학의 공부는 워낙 배워야 할 양이 많았기 때문에 교수님의 강의를 얼마나 잘 요점을 짚어 기록하고 차후 참고 자료를 보태어 노트 정리를 잘하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소위 공부 잘하는 친구들의 노트는 인기가 좋아서 많은 학생들이 노트 필기를 하지 않고 정리가 잘된 친구의 노트를 복사하여 공부를 하고는 했는데 그런 종류로 몇개의 버전이 돌아 다녔습니다.
제 노트도 나름 인기가 있어서 제 노트로 공부를 하고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도 꽤 있었는데 위에 말한 제 친구도 그런 사람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요즘의 저희 병원의 산모수첩에 꽂아 드리는 알록달록 표지를 보신 분은 어렴풋이 짐작하시겠지만 그런 꾸미기 좋아하는 특성이 그때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트 정리를 잘했다고 해서 다 성적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고백록이니까)  저는 정말 총 160명 정원 중 딱 중간 정도의 성적을 가까스로 유지했습니다.
오히려 제 노트로 공부한 다른 친구 중에서 저보다 성적이 좋은 친구도 많았습니다.
아마도 기억력의 차이나 노력의 차이 그런 것들이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사실 최고들이 모였다는 서울대는 그런 점에서는 큰 단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야 뭐 별로 내세울 것이 없었지만 제 의과대학 동기들 중에는 전국의 온갖 경시대회를 휩쓸면서 내로라 하는 친구들도 많았는데 첫시험을 보고 나서 중하위권의 성적표를 받고는 충격을 받아 아예 학업을 포기한 사람도 있고 그랬으니까요.
말하자면 사람으로 하여금 기가 죽게 만들고 자신감을 빼았아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더군다나 한번도 일등을 놓쳐 본 적이 없는 친구들이 상위권도 아니고 중위권 혹은 하위권에 들어가면 충격이 크겠지요.
여하튼 그렇게 제 노트로 공부한 제 친구는 저보다는 성적이 못했지만 대신 그 친구는 동기들 중 모두가 다 친구라고 할 정도로 붙임성이 좋았고 산부인과 교실에도 일찌감치 인사를 드려 두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떤 진료과를 지원하고 싶으면 인턴을 도는 초기에 이미 교수님들이나 선배 전공의들에게 미리 인사도 하고 자기가 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혀 두고는 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미리 의사를 밝혔다는 것은 이후 정식 선발에서 상당한 어드밴티지로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과 저과 다 찜할 수는 없는 일이죠. 좁은 바닥이라 그렇게 양다리 걸치면 어느 과도 할 수 없습니다.
반면 저와 친하지 않은 다른 한 친구는 성적도 저보다 좋았고 교수님 중의 한 분이 이모부였습니다.
그해 산부인과 군보 자리는 원래 한 자리 밖에 없어서 (군대에서는 산부인과 전문의가 별로 필요가 없어 경복궁 옆에 있는 지구병원과 그외 국군 수도 사령부, 여군 사령부 등등에서 필요한 인력 뿐이라 한해에 6명만 필요해서 아예 군보 자리가 없는 대학도 많습니다.) 제 친구가 미리 찜해 놓고 있던 것인데 연말 쯤 선발인원이 확정될 때 갑자기 산부인과 군보 자리가 한자리가 더 늘었습니다.
그래서 제 친구가 저와 함께 산부인과에 함께 지원하자고 유혹을 해서 제가 지원하게 된 것이었고 원래 신경과를 지원하려 했던 다른 경쟁자는 신경과에서 갑자기 산부인과로 전향을 하는 바람에 1:1.5의 경쟁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다른 친구는 자기보다 성적이 좋았던 동기의 노트를 시험을 얼마 앞두고 훔쳐서 감추어 두었던 것이 들통이 나서 동기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 하려던  신경과에서도 아까 그런 밀어내기로 쫓겨나서 갈데가 없어서 산부인과로 오게 된 것이었다고 하더군요.
판사나 검사를 정하는 연수원도 그렇다고 듣기는 했지만 평생의 진료 과목을 정하는 바탕이 되는 의과대학과 인턴 과정도 그만큼 피말리는 성적 경쟁이 있는 곳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의 그런 비열한 행동까지는 교수님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알았는지도 모르지만 저로서야 알 수 없는 일이죠.
그러니까 한사람은 미리찜, 한 사람은 교수님과 인척 관계에 제일 좋은 성적, 저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
그렇게 3명의 경쟁자가 2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수련 시절을 끝내려 했는데 글이 너무 길어져서 나머지는 나중에 써야겠습니다.
별로  재미도 없을 내용을 너무 길게 늘어 놓은 것 아닌가 싶네요.
뭐 반응이 시원 찮으면 이것으로 땡하면 되는 것이지만.
그리고 여기는 연애사처럼 야리꾸리하고 간질간질한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실망하시고 나중에 시간이 아까웠다 하시는 분 있을까 봐 미리 말씀드립니다. ㅋㅋ

TBCOTE (To be continued or The End가 귀찮아서 앞으로는 약자로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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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군마누라 [2015-06-23 15:20]  동네주민 [2014-05-30 19:01]  dyoon [2014-05-30 11:31]  bella [2014-05-30 11:03]  땅콩산모 [2014-05-30 01:15]  최현희 [2014-05-29 23:48]  
#2 최현희 등록시간 2014-05-29 23:50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언능 다음편을 올려주셔와요!

댓글

고려해 보겠습니다. ㅋㅋ  등록시간 2014-05-30 00:27
#3 이연경 등록시간 2014-05-30 00:28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왠지 저 지금 공부한거같애요 ㅋㅋㅋㅋㅋ
예준이할아버지의 이땡용쩍 시절이라~~
다음편에 본격적인 에피소드(?)가 있으리라 기대만빵 하고있답니다!! (연애대장답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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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용적 시절이라~~ 매우 적절한 비유 입니다 ^^ 연경님 같은 분이 과연 나타나셨을까나~~~~~~ ㅋㅋㅋ  등록시간 2014-05-30 20:06
아닙니다 연애대장이라 못잊는게 아니고 그얼굴을 어떻게 잊습니까 ㅋㅋ그 사진보다 백배 잘생겼었는데 ㅋㅋㅋㅋ  등록시간 2014-05-30 14:10
근데 정작 연애대장은 제가 아니라 이땡용님을 아직까지도 못 잊고 계신 연경님 아니신지...ㅎㅎ  등록시간 2014-05-30 02:32
#4 땅콩산모 등록시간 2014-05-30 01:18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이런 고백록들은 마냥 오픈하기 아깝지 않으세요? ㅎㅎ
서당이나 Vip방에... ^-^
그런데  서론만 아주길고 정작 스토리는 아직 시작이 안되었네요 ㅋㅋㅋ  

의대에 입학했다고 다들 의사가 되는건 아니었군요??

댓글

"제곧내"는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은어로 "제목이 곧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즉 제 글에서 내용은 별게 없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ㅎㅎ  등록시간 2014-05-30 10:17
제 곧 내려가게 생겼다! 제 인생 내리막이다! 이건가요??  등록시간 2014-05-30 02:33
제곧내요? 무슨 뜻인가요??^^  등록시간 2014-05-30 02:32
사전 설명이 있어야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 있어서요. 근데 혹시 제곧내라는 은어 아시는지.....ㅋㅋ  등록시간 2014-05-30 02:31
5# bella 등록시간 2014-05-30 11:08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언제나 후속편이 궁금하게 쓰시는 글솜씨세요^^  2편 기대할께요 !
그래도 연예사 만큼 두근거리며 읽지 않아서 약간은  안심이네요. 제가 조마조마한 글이나 영화를 잘 못봐서요{:4_102:}
정작 그러면서 다보지만요{:4_93:}  (제가 쫌 심장이 약한가봐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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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정 ... 스토아 학파셨네요. ㅋㅋㅋ 자꾸자꾸 나오는 양파같은 심장님의 또다른 연예사... 저도 기대됩니다요 ㅋㅋ @.@  등록시간 2014-05-30 11:35
삼성의료원에선 또 무슨.... 뭐가 또 크게 한 건 나오겠군요^-^ 기대됩니다 ㅋㅋㅋ  등록시간 2014-05-30 11:26
연애사가 아니고 직업사이니 달콤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정 원하시는 분들이 있으면 다음 "삼성의료원 시절" 글을 쓰게 되면 살짝 맛보기로 보여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ㅋㅋ  등록시간 2014-05-30 11:17
6# dyoon 등록시간 2014-05-30 11:41 |이 글쓴이 글만 보기
닥터스 소설을 고딩때인가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납니다. 보다 말은 그레이 아나토미나, 성형외과 얘기를 다루었다는 닙턱도 끌려서 몇번 봤던 기억도 나구요. 그레이 아나토미는 나름 잼었는데 계속 챙겨 볼 시간이 없었고 ㅠㅠ, 닙턱은 처음에는 신선해서 확 끌렸는데, 몇번 보다보니 저는 재미가 없더군요. 어쨌거나, 뒤질랜드~란 말을 유행시켰던 뉴하트나 등등의 의학  소설이나 드라마를 나름 좋아하는 지라..심장님의 이번 글이 저는 더 좋고 기대가 되네요..무엇보다도 글을 읽고 나서 후폭풍을 걱정안해도 된다는 안도감이 큽니다..ㅋㅋㅋㅋ 설마 여기에 충격 고백 이런거 있는거 아니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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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 쥬라식 파크가 동민님 초딩때였군요...전 영어시험 지문에 주라식파크가 나와서 짜증났었던 기억이....ㅋㅋㅋㅋㅋ  등록시간 2014-05-31 12:08
닥터스... 하니 갑자기 초딩때 봤던 쥬라식 파크 소설 뒷편에 닥터스 광고 나와있던게 기억이.... 초딩이 읽긴 그렇지만 뭔가 재밌어 보였는데 ㅋㅋ 저도 그레이 아나토미, ER 좀 재밌게 보고.... 하지만 제일 좋아하는건 닥터 하우스~~~~ 박사님!  등록시간 2014-05-30 19:00
미리 약을 써 놓아야 독자를 확보할 수 있을 듯 하여 살짝 밝혀 두자면 연애사와는 다른 종류지만 지루하지 않을 정도의 충격적 내용이 조금은 있을 겁니다. ㅋㅋ  등록시간 2014-05-30 11:45
7# 동민 등록시간 2014-05-30 20:04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어떡해 ...... 직업사가 순간 '작업사'로 보였어요. 연애사의 여파가 너무 큰가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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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연애도 작업이고 파인 아트도 작업이고 진료와 분만도 작업의 일종이니... 뭐 직업사나 작업사나 별반 다를 것은 없겠네요. 어감은 상당히 다르지만....  등록시간 2014-05-30 20:34
8# 박군마누라 등록시간 2015-06-23 15:21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아..뭔가 심장님의 회고록을 읽는 기분이 드는데요~ㅋㅋ 근데 너무 재미있네요!! 그다음편도 바로 이어서 읽어야징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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