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랑 선생님.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합시다"
L선생님이 내 팔뚝을 다급하게 나꿔채면서 말했습니다.
엘리베이터 주변에 있던 다른 의사들은 무슨 일인가 궁금한 눈치더군요.
"저 지금 바빠서 나중에 이야기 하세요."
"다 알고 왔으니까 일단 당직실로 가서 나랑 이야기 좀 해요."
같은 연차지만 학교 4년 선베인 L선생님은 사람이 점잖고 나이가 어린 후배인 제게도 깍듯이 존대말을 했습니다.
지금은 아산 병원 산부인과 과장을 하고 있는데 저희 연차 중에서 가장 인격적으로 완성된 분이었습니다.
아마 같은 연차의 동료들이 제가 사직서를 써서 과장님을 찾아가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나이로도 그렇고 제일 말이 먹힐 것 같았던 그 선생님으로 하여금 저를 설득하도록 한 모양입니다.
"........"
"잠깐만 나랑 이야기 좀 해요. 내 말 듣고도 도저히 안되겠다 싶으면 그때 과장님한테 가도 늦지 않아요."
"아니예요, 저 이제 그만할래요. 힘들어서 더는 못하겠어요."
그러나 L선생님도 쉽게 물러설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항상 점잖게 말하고 부드러웠던 L선생님이 그렇게 강한 얼굴을 한 것도 처음 본 것 같습니다.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그만 두면 선생이 지는 거예요. 어렵게 들어왔는데 이렇게 그만 두면 안된다구. 힘들면 얼마간 우리가 환자도 대신 나누어 봐주고 당직도 대신 서 줄테니까 며칠 쉬고 다시 생각해 봐요 "
지금 제가 산부인과 의사를 하고 있으니 결론은 다들 아시겠지만 그때 L선생님의 말이 논리적으로 타당했기 때문에 저를 설득하여 제가 마음을 돌린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리 설득력 있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L선생님뿐 아니라 다들 나를 걱정해 주고 마음을 돌리도록 며칠에 걸쳐서 저를 말렸습니다.
이렇게 다들 나를 걱정해 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제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학창시절도 그렇고 가족을 빼고 누군가에게 그렇게 따스하게 위로를 받고 걱정해 주는 모습을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누구를 곁에 두는 스타일이 아니라 학창 시절에도 친구가 거의 없이 혼자 지낸 시간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은 저로서는 거의 처음 겪어 보는 감정이었습니다.
물론 아내도 저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니 저를 위로도 해주고 함께 고민도 해주었겠지만 아내는 당시 그 일을 몰랐습니다.
부모님이든 아내든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런 배려와 위로를 받고 보니 나쁜 한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이런 좋은 사람들 여럿을 버린다는 것은 바보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수련을 그만 두는 것과 계속 하는 것. 양쪽 길 중 어느 길을 고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어쩌면 그때 그만두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냥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 가슴에서 도저히 덜어낼 수 없을 것 같던 분노를 녹였습니다.
제 인생의 여러 고비에서 머리로 판단하여 결정한 일과 가슴이 결정한 일을 놓고 비교해 보면 객관적으로는 머리로 결정한 일이 가슴으로 결정한 일보다 결과적으로 훨씬 제게 유리하고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머리보다 가슴이 결정권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전의 연애사도 머리가 제대로 작동하고 머리의 결정을 가슴이 묵묵히 따랐다면 그뒤 오래도록 벗어나지 못했던 고통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슴을 누르고 머리가 제 기능을 하여 한때의 가슴 저리는 기억조차 없었다면 인생이 너무 삭막할 것 같기는 합니다.
윤리적으로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삶이 덜 고통스럽기도 했겠지만 추억할 거리조차 하나 없는, 그저 두꺼운 전화번호부와 같은 삶이 과연 좋기만 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산부인과 수련을 중도 포기할 뻔 했던 위기는 그렇게 해서 넘어 갔습니다.
1년차 시절의 바쁜 일상은 괴로웠던 기억에 무한정 빠져 있게 놓아 두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과도 그렇지만 한달에 집에 들어가는 날이 몇번 되지 않았던 1년차 주치의 시절은 정말 되돌아 보아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입니다.
몸과 마음이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항간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아들이 의사인 것은 싫고 사위가 의사인 것은 좋다구요.
의사로서의 삶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아들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어머니로서 싫지만 그런 사위를 만나 딸이 편하게 살면 장모로서는 좋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아내가 말해 주더군요. ㅋㅋ
저는 처가에도 의사로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도 못했고 아내에게도 의사 아내로서의 편안한 삶을 주지 못했으니까요.
아내는 제가 의사와 관련한 일반적 통념에서 벗어난 것이 두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 하나가 위의 말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환자를 가족같이"라고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아내는 제가 환자를 가족같이 대하면 환자 다 떨어질 것이라고 하더군요. ㅋㅋ
그리고 제발 부탁이니 "가족을 환자같이" 대우해 달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1월부터 시작된 주치의 생활이 5개월쯤 지나서 몸과 마음이 많이 피폐해졌을 무렵 동인천 길병원으로 파견 나가는 스케쥴이 있었습니다.
일선 현장의 경험을 좀더 충실히 쌓을 수 있도록 보통은 2년차나 3년차때 외부 병원에 파견 나가는 스케줄이 많았던 편이지만 1년차나 혹은 4년차때 파견 나가는 병원도 있었습니다.
파견 나간 기간 동안에 아내가 첫째 딸인 MK를 출산했습니다.
동인천이라 서울 집까지는 너무 멀었기 때문에 집에는 한달에 두어번 주말에만 가고 평일에는 언제 올지 모르는 산모 때문에 병원내 당직실에서 지냈습니다.
6월말 쯤이었는데 그때도 지금처럼 날이 무척 더웠습니다.
아마 요일은 목요일이거나 아니면 금요일이었을텐데 한달 동안 함께 고생해 준 직원들에 대한 감사도 겸하여 산부인과 병동의 직원들 몇명과 회식 삼아 용현동의 물텀벙이 집으로 회식을 갔습니다.
물텅벙이는 표준말로는 아구찜인데 그쪽 동네에서는 그렇게 부르더군요.
한참 맛있게 먹고 있는데 휴대폰의 벨이 울렸습니다.
진통 산모가 입원했다는 전화인가 싶어 빨리 들어가야 겠구나 생각하고 전화를 받았더니 아내가 진통이 와서 다니던 병원으로 간다고 하는 전화였습니다.
진통 간격을 물어 보니 아직 규칙적으로 강한 것은 아니라 아마 가진통이거나 초기 진통 단계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당신 올 수 있어?"
"음...글쎄 상황 좀 보고...도착해서 다시 전화해."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아직 가진통 단계일수도 있고 평일은 제가 당직을 하면서 병원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서울로 가 보기는 솔직히 어려웠습니다.
물론 병원의 과장님께 연락을 드려 대신 병원을 보아 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새까만 학교 후배로 파견 나간 전공의 주제에 과장님께 전화하여 사정을 말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습니다.
원래도 남에게 신세지거나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을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저로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제게 가족은 1순위가 아니기도 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이런 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데 여하튼 저는 그랬습니다.
며칠전에도 아내의 생일이었지만 제가 당직인 날이었기 때문에 함께 저녁을 먹지도 케잌을 사가지도 않았습니다
1년마다 한번씩 매번 오는 생일 때문에 당직을 바꾸어 가면서 집에 가는 쪽의 선택을 저는 하지 않습니다.
병원의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굳이 그렇게 한다는 것은 저의 평소 철학에 부합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때도 주말인 내일이나 모래면 어차피 서울에 가니까 그때까지 출산하지 않아 주기만을 바라면서 먹던 음식을 계속 먹었습니다.
다시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야. 당직 선생님이 그러는데 나 조금 있으면 아기 낳을 것 같데. 지금 어디야?"
아내가 저를 자기야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연애할 때는 형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MK 아빠라고 부르는데 그때는 아이도 없었으니 저를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당한 용어가 없어 그 말을 빌려 왔습니다.
"그래? 어떻게 하지? 나 못 갈것 같은데."
"지금........어딘데?"
"응. 아까 수술이 늦게 끝나서 저녁을 못 먹어서 지금 직원들하고 저녁 먹고 있어."
"그럼 할 수 없지 뭐.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일 봐."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사방에서 돌 날아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군요.ㅠㅠ
뭐 저런 남편이 다 있나 싶을 겁니다.
아내가 종종 "당신은 의사로서는 100점인지 모르지만 남편과 아빠로서는 0점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이 일뿐 아니라 이후로도 이와 비슷한 일을 수도 없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내가 오해하고 서운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이쁘고 젊은 직원들과 회식하느라 못 간 것은 아닙니다.
회식이 아니라 당직실에서 하릴 없이 뒹굴었다 해도 병원을 비워두고 혹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고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식사 동안에 이제라도 부탁하고 가볼까 잠깐 고민하기는 했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고 아내는 그 몇시간후 출산을 했습니다.
남편을 산부인과 의사 (아직 산부인과 의사는 아니고 산부인과 전공의)로 두었으면서도 정작 우리의 아기를 출산할 때는 아무런 위로도 격려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조금 미안하더군요. 당시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보니 아내는 조금이 아니고 아주 많이 서운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종종 그때의 일을 이야기할때면 울먹거리고는 했습니다. 요즘에야 울먹거림 대신 분노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ㅠㅠ
첫 아기 낳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직원들과 밥 먹으러 가서 안 올 수 있냐고 말이지요.
그런 서운함에 대하여 저는 마땅히 할 말은 없습니다.
돌이켜 보았을 때 그러지 말걸 하고 제가 후회하는 몇가지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저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자 하여 그랬다고 너그러이 이해하고 가슴에 너무 큰 상처로 남겨 두지를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내도 그런 저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머리로는 이해하는 것 같은데 가슴에서 용서가 안되는 모양입니다.
진오비 산부인과 개원하고 제가 출산을 도운 분 중에서 딱 두분이 출산시 남편이 옆에 없었습니다.
한분은 방송 관련 일을 하시는 분으로 미룰 수 없는 촬영이 있어서 못 오셨고 다른 한분은 외국에 있어서 갑자기 올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방송 때문에 출산 시 못 오셨다가 다음날 오신 남편 분은 제게 엄청 혼났죠. ㅋㅋ.
그 분이 제 이 이야기를 알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할 것 같습니다.
출산시 남편이 반드시 곁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굳이 분만실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산모나 남편이 요청하는 경우에도 제가 설득하여 분만할 때 곁에서 손도 잡고 하면서 함께 있으라고 하는 것은 이런 제 경험에서 비롯된 점도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도 그렇지만 때를 놓치면 나중에 되돌려서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 별명은 무뚝뚝대마왕입니다.
위의 에피소드는 제 무뚝뚝함의 근본 이유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일단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쓴 것입니다.
무뚝뚝하다고 하면 흔히 생각하기는 무성의하거나 불친절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저는 친절하다고 할 정도는 분명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친절하게 응대하는 적은 없으며 필요한 설명을 무성의하게 하는 편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마도 무뚝뚝한 모습으로 보이게 만드는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오만입니다.
좋은 말로 하면 자긍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만과 자긍심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서울대 출신들이 종종 가진 학벌에 대한 자긍심, 거기다가 위의 예에서 보여준 것처럼 병원 일은 가족까지 내팽치면서 희생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하는 긍지. 저와 동기들은 다 서울대병원, 아산병원, 삼성의료원등에 있지만 저도 그들보다 실력이든 정성에서든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 누구보다 원칙과 양심을 지키고 있다고 하는 자부심 등등이 뭉뚱그려져 저는 산부인과 의사에 관한한 내가 국내 최고의 의사다 하는 착각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ㅎㅎ
이런 오만한 생각이 마음 근본에 깔려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무뚝뚝한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진찰하게 되는 분들에게 대하여 저는 "당신은 나와 같은 의사를 만났으니 복받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실력에, 이런 배경에, 가족까지 희생할 정도의 정성을 쏫는 의사는 어디 가서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하는 그런 의미로 말입니다. ㅋㅋ
물론 그런 자긍심이 있다고 다 무뚝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성숙된 사람은 그런 것을 잘 조절하여 산모나 환자에게 상처를 주거나 불편하게 느끼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자긍심 혹은 오만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인격적 성숙함이 없습니다.
위의 못난 남편처럼 뭐 이런 의사가 다 있나 싶고 한심하죠? ㅎㅎ
지금에 와서야 제가 가진 실력이라는 것도 정말 형편 없고, 배경이라는 것도 보잘 것없다는 것을 알지만 아직도 희생이라는 측면에서는 누구에게도 꿀린다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제가 무뚝뚝하게 보이는 데에는 사람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부끄러움으로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것, 법적으로 허용하는 주기 이전에는 성별을 일체 알려 주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여타의 부분에서의 철저한 원칙주의 혹은 고지식함도 한몫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산부인과 의사회 활동을 할 때도 그랬고 낙태 근절 운동을 할 때도 그랬고 저는 남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 하는 편은 아니며 수줍음 때문에 할말도 제대로 못하고 그런 적이 없는 것을 보면 그런 쑥스러움은 무뚝뚝함의 원인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런 오만함은 자신의 직업 혹은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라는 점에서 그리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자긍심에 손상을 받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으니까요.
물론 가족과 관련된 것을 그렇게까지 포기하면서 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지나치게 그런 것은 저도 좀 불편하고 다른 분들께도 상처를 주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고쳐 보기 위한 방편으로 요즘은 가끔 몇가지를 시도해 보고 있는데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직업도 물어보고 사는 곳도 물어 보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마음 속에서 그런 생각을 가져 보려 노력합니다.
"이 사람도 나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일지 모른다. 직업인으로서든 주부로서든 자신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 분야에서 최고일 수 있으며 나름대로 나 못지 않은 희생을 자신의 분야에서 하고 있는 사람일 지 모른다. 나만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하는 생각으로 제가 가진 오만함을 좀 줄여보려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리 성공적으로 제대로 해내고 있지 못하고 마음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여하튼 제게 있어 무뚝뚝함이란 자신감의 표현이며 오만함의 다른 모습이고 개인적 삶의 포기라는 말과도 동의어입니다.
이제는 그런 것도 조금 덜해졌으면 싶은 것은 저도 나이가 들었고, 앞으로는 무한정의 희생도 어려울 지 몰라서입니다.
아내의 생일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고, 친 부모님이나 처가집 어르신들의 생신때도 찾아 뵙고 싶고, 나이 들어 얼마나 더 사실 지 알 수 없는 부모님을 모시고 멀리 여행도 가고 싶고, 아이들의 입학식이나 졸업식에도 시간을 내서 사진도 함께 찍고 싶고, 수련 동기들과도 만나 옛일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술도 한잔 먹고 싶습니다.
제가 많이 약해졌나 봅니다. ㅎㅎ
그렇게 앞으로 희생의 정도도 떨어질 것이고 실력도 떨어지고 있으니 오만함도 따라서 줄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ㅎㅎ
오늘은 어쩌다 보니 제 못난 점에 대한 변명의 글처럼 되었네요.
여하튼 제 삶에 있어 오만함의 뿌리를 내려준 서울대 수련의 시절의 한때를 보여 드렸는데 수석의인 4년차때 결국 의사로서의 한계 혹은 회의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준 사건이 또 생겼습니다.
뭐 대단한 사건은 아니니 너무 기대하실 것은 없지만 시간이 늦었으니 그 이야기는 쓸 수 있으면 다음 편에 쓰겠습니다.
아마 수련의 시절 고백의 마지막 편이 되겠지요.
TBCO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