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간의 서울대 산부인과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산부인과 전문의 시험에 합격한 후 3년간 지방 의료원 산부인과에서 과장으로 근무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군 복부 대신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산부인과 전문의로써 실질적인 사회에서의 첫발은 군복무가 끝나던 해인 1994년  삼성의료원에서 시작하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지방 의료원에서 보다는 중환도 있을 것이고 전에도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 결정과 판단에 대하여 이젠 정말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하는 그런 전문가의 자리에 섰기 때문에 기대와 걱정이 함께 밀려 왔습니다.
그리고 공기가 깨끗한 충청도 시골에서 지내다가 서울로 올라오니 공기가 정말 탁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삼성의료원은 수서지역에 있어서 서울이기는 했지만 그나마 외곽이라 공기가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근무할 당시 삼성의료원은 아직 병원이 완공된 것이 아니고 한창 내부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진료를 하기 전이라 병원 옆 공터에 마련된 컨테이너 박스에서 각 과별로 두어개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진료를 하기 위한 여러가지를 준비했습니다.
그때는 의사 가운을 입었던 것도 아니고 컨테이너 박스에서 일을 해서 제가 의사인지 회사원인지 구분이 안 갔는데 졸업후 제 인생에서 진료 하는 의사로서가  아닌 삶을  살았던 유일한 때입니다.
하던 일도 환자를 대면하는 진료가 아니라 서류 작업이 대부분이어서 한때 제가 잠깐 동경했던 평범한 회사원과도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은 삼성의료원의 산부인과 스태프가 훨씬 많아졌지만 그때는 초창기여서 산부인과 진료를 담당한 전문의 스태프는 산부인과 L 과장님과 저를 포함하여 총 6명 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 그 중 4명은 외국 연수중이어서 L 과장님과 저 단둘이 모든 준비를 해야했습니다.  
과장님을 포함한 정식 전문의는 5명이었고 저는 정식 전문의로 채용되는 것인 줄 알고 갔었는데 임용 심사에서 제가 박사학위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산부인과 과장님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저는 1년간의 펠로우 생활을 거치고 정식 전문의로 발령을 받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펠로우 (전임의) 자격으로든 정식 전문의 자격으로든 진료를 하는 데 있어서는 다를 것이 없었지만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박사 학위가 없어서 그랬다고 하니 확 그만두어 버릴까 했지만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그 이상의 좋은 자리는 없었으니까요.
여하튼 박사 학위는 결국 그렇게 제 발목을 잡게 되었는데 이것을 예전에 알았다면 혹시 제 인생의 길이 달라졌을까 아니면 똑같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기는 하는군요. ^^

먼저 글에도 썼지만 우리나라는 유럽식의 전문의 제도와 미국식의 박사 학위 제도의 혼합이라 대부분은 박사 학위가 그리 의미는 없지만 대학 교수 발령시는 박사 학위가 반드시 있거나 최소한 과정에는 들어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전 수련의 시절에 보통 따두는 박사 학위를 따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끔 저를 보고 박사님이라고 하는 환자나 보호자분들이 있었는데 그럴때면 저는 "저 박사  아닌데요"라고 밝히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싶어 굳이 설명을 하지는 않습니다. ㅎㅎ
제가 박사 학위를 따두지 않은 것도 사실 제 똘아이 근성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지금 와서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친구는 박사 학위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산부인과 박사 학위처럼 자신이 수련한 임상 전문 과목의 박사 자리가 많지 않아서 인기가 없는 해부학과 같은 기초 학문의 박사 학위를 따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과목으로 따던 겉으로 의학 박사인 것은 똑같으니까요.
한 연차 10명중 보통 3명 내지 4명 정도가 박사 과정에 등록하여 학위를 따게 되는 데 모든 진료 과목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제가 근무할 당시는 석박사 학위 과정 입학여부는 시험으로 선발하기는 하지만 거의 요식 행위이고 대부분 누구를 뽑을지 미리 내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1년차에 들어갔을 때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한 선행 단계로 석사 과정 등록 시험을 먼저 쳐야 했지만 저는 치지 않았습니다.
원래 군보 2명은 우선적으로 석사 박사 과정 시험에 합격을 시켜주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는 비교적 능력이 있고 젊어서 부려 먹기 쉬운 군보에게 주는 반대 급부 같은 의미도 있었고 또 군보 출신들은 비군보 출신들에 비하여 대학병원의 교수로 가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교실에서 그렇게 배려한 것입니다.
그러니 저와 같은 군보가 석사 학위 시험을 아예 치지 않은  것은 극히 상식 밖의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등록금이 수백만원 많이 들기는 했지만 교수든 개업의로든 박사 학위는 상당히 유리한 것이라 서로들 하기 위해 애쓰는 편이었으니까요.
지금은 아마 개선되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당시 학위 과정 시험에 들어가려면 지도교수로 정해질 교수님의 온갖 잡 심부름도 하고 또 수백만원 대의 뇌물 비슷한 것도 의국에 내야 했는데 당시 저희 때는 한 50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법조계든 교육계든 어느 분야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썩지 않은 구석이 없지 않다고 하는데 비교적 깨끗하다는 의료계도 내부를 들여다 보면 부끄러운 구석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그런 불합리한 것들도  세상 살려면 어쩔 수 없지 뭐 하면서 용납하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제 고지식한 성격과 불의를 못 참는 성격에 저는 우선 석사 학위 시험시 합격 일순위인 저부터 포기할테니까  우리 모두 함께 거부하여 이런 불합리한 제도는 없애자고  동기들을 설득하였습니다.
다행인지 제 말빨(ㅋㅋ)로 그해 산부인과 석사 시험은 아무도 응시하지 않았습니다.
(아님 비군보 샘 중에 한두명 응시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여하튼 정상적으로 거의 모든 전공의가 지원하는 상례에서는 많이 벗어난 상태였던 건 확실합니다.)
이런 점 때문에 저는 교수님들께 반골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습니다.
반골로 찍히게 된 것에는 이런 에피소드 뿐 아니라 다른 소소한 것들도 많지만 오늘 이글의 주제는 삼성의료원 시절이고 수련의 시절이 아니니 생략하겠습니다.
물론 첫해는 그렇게 보이콧 하였고 저는 이후에도 일체 학위 과정 시험을 보지 않았지만 동기들은 결국 그 다음해인가 다음 다음해인가 학위 과정 시험을 쳤고 그 중 몇명은 학위 과정을 끝내고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박사 학위가 있어야 대학병원에 교수로 임용될 수 있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박사 학위가 없었던 저는 석박사 과정은 다음해에 들어가기로 하고  일단 펠로우(전임의) 자격으로 삼성의료원에서 산부인과 근무를 시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월급에서만 차이가 있었을 뿐이고 대외적인 진료나 일에서는 차이는 없습니다.
그리고 박사학위가 있던 없던 아직 외국 연수 중인 선배들이 들어 오기 전까지는 과장님 밑에는 달랑 저 한명 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침 8시에 출근하여 저녁 5시까지 근무하는 일과였지만 5시에 퇴근하지는 못하였습니다.(당시 삼성 그룹은 병원도 예외없이 그룹 산하 조직 전체가 한시간 먼저 출근하고 한시간 먼저 퇴근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나마 저는 저녁 10시는 되야 퇴근할 수 있었는데 이는 개원이 얼마 남지 않아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고 은근한 경쟁심이 있어 다른 과의 선생들보다 일찍 가는 것은 싫기도 해서 거의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제 병원도 아닌데 왜 그때 병신 같이 그렇게 희생했나 모르겠지만 저는 개원하여 오너인 원장이 되었든 대형 병원의 봉직의가 되었든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항상 최선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철학 혹은 생각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해서 항상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결과는 우리 인간이 간섭할 수 없는 신의 영역에 있는 것이고 우리 인간이 간여할 수 있는 영역은 과정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에  삼성 의료원에서 쓸 산부인과 관련의 여러 환자 안내문, 의사 지시서 , 수술 서약서 등 온갖 서류들을 거의 저 혼자 힘으로 만들었고 이것들은 이후 진오비 산부인과나 산부인과 의사회 활동을 하면서 만든 여러 수첩과 안내문을 만들 때도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으니 생각해 보면 아주 손해가 나기만 한 시절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제일기획(삼성 그룹은 같은 계열인 제일 기획이 그런 작업을 대부분 맡아서 했고 아산 병원은 현대 그룹 계열인 금강 기획이 맡은 것으로 아는데 그 둘이 문서 홍보 관련에서는 쌍두마차라고 하더군요.)이라고 하는 능력 좋은 디자이너와 실무자들의 도움과 조언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컨텐트만 갖추면 나머지는 그 사람들이 해 주었기 때문에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런 기획이나 문서를 만들고 다듬고 하는 일은 의과 대학 시절 노트 정리를 하면서 제 몸에 어느 정도 익숙한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두어달 후 드디어 병원이 개원을 하여 진료를 시작하면서 외국에 연수 나가 있던 선배들도 하나둘 귀국하여 진료에 참여하였습니다.
저는 고위험임신과 기형진단 분야를 맡아서 진료를 하였는데 다들 아는 선배여서 일하는 것은 재미있는 편이었는데 문제는 산부인과 과장님이었습니다.
준비 기간 동안에도 외래 환자용 락커의 문짝 색깔까지 세세하게 따지고 할 정도로 질릴 정도로 꼼꼼하고 세세하게 간섭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요즘 만기친람이라는 말이 유행하던데 만만기친람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ㅠㅠ.
그리고 정말 하찮은 것 하나까지 모르는 것이 없어서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습니다.
거기다가 성격은 또 어찌 불 같은지 저도 성격이 불 같아서 직원들이 실수하는 일이 있으면 산모 앞에서도 참지 못하고 따끔하게 지적을 하고는 해서 직원들이 많이 힘들어 하는데 저는 정말 거짓말 조금 보태 그 분의 1/00, 1/000에도 못 미칩니다.
그렇게 마음이 힘들면 몸이라도 편하면 좀 낫겠는데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출근하여 전공의들을 챙겨서  아침 7시 세미나를 준비하고 8시면 외래 진료를 하고 외래 중간 중간 분만과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물론 전공의들의 실수는 모두 제 책임이 되어 함께 혼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죠.
그렇게 외래 진료가 끝나면 또 컨퍼런스로 이어지고 회의를 하고 매일 10시가 넘어야 퇴근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퇴근했다고 일이 끝난 것은 아니고  지금도 똑같지만 제가 진료했던 분만 산모가 있으면  언제든 병원으로 나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들어온 선배들은 저보다 나이도 많고 하여 온갖 궂은 뒷치닥거리를 제가 도맡아서 해야 했습니다.
저도 나름 철저한 성격인데 조금만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과장님의 불호령이 떨어지는 것은 덤이라고 해야 겠지요. ㅎㅎ.
사실 제가 좀 엄살을 부리기는 했지만 전공의든 전임의든 혹은 병원의 어느 직책이든 병원 계통은 다 선후배로 엮여 있어 수직적 상하 관계가 분명해서  주니어 스태프들은 누구나 다 근무가 힘든 편입니다.
당시 삼성 의료원 산부인과 스태프도 모두 다 제 의과대학 선배들이었기 때문에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몇개월을 지나다 보니 이러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몸은 몸대로 완전 망가지고 정신도 피폐해져서 모든 일에 자신도 없어졌습니다. 그대로는 도저히 더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있는 병원의 의사이고 교수고 나발이고 다 귀찮아졌습니다.
사실 당시 서울대 출신들은 모교에 교수로 남는 것은 한 학년 160명 중에 한두명 정도만 가능하기 때문에 동기들이 가장 선망하는 것은 아산 병원이나 아니면 삼성의료원에 취직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형 병원이기 때문에 자신이 배운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도 있고 연구에 대한 지원도 충분한 편인데다가 무엇보다 의과대학의 교수로도 함께 임용되기 때문에 정년도 보장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삼성의료원은  첫해에는 의과대학이 없었지만 이미 예정되어 있던 성균관대를 인수하여 몇해 후 의대를 설립하여 전문의들 모두 교수를 겸임으로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보장된 직장과 명예는 제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만두고 나서 근무하게 된 후배들도 몇명은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었던 것으로 알고 있고 한 여의사 후배는 일이 힘들어 진료중 코피까지 쏫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에 더하여 제가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건 대기업체의 경영 논리에 따라 운영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건강 검진 센터장이 산부인과 검진 항목을 정하면서 저와 검진 항목을 상의하게 되었는데 (다른 선배들은 다 외국에서 공부하다 와서 실제 진료에 관련된 것은 가장 최근에 대학에서 수련하고 나온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진료 관련의 세세한 업무는 과장님의 지시로 거의 제가 맡아서 했었습니다.) 산부인과 검진 내용을 보니 부인과 암 검진 항목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종양표지물질 항목이 포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검진센터장에게 이 항목은 아직 연구 단계로 의학적으로 의미가 확립된 것이 아니니 넣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검진센터장은 "삼성의료원이 삼성생명으로부터 4천억원을 지원받아 설립하였고 첫해에는 천억 정도의 적자를 예상하지만 수년내에 정상 궤도로 올려야 한다. 그러려면  어디선가는 수입을 창출해야 하는 것은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진료 부분에서는 의료 보험의 구조상 적자가 날 수 밖에 없으니 결국 수익은 장례식장과 검진센터 밖에는 없으니  다소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항목을 가능한한 많이 넣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그런 내용은 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 삼성 의료원은 삼성 그룹에서 이미지 관리 차원과 사회 기여 차원에서 연 대형 병원이었고 그런 병원을 경영 논리에 따라 의학적 근거를 무시하고 운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무 힘이 없는 말단 직원인 제 의견은 묵살되었고 과장님의 승인하에 센터장의 안대로 통과되었습니다.
큰 병원의 입장에서 보면 젊은 의사는 그저 조직의 작은 나사 하나와 별로 다를 것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검진 코스는 A,B,C 코스인가가 있었는데 당시 가격으로 100만원 이상의 상당히 고가의 검진 스케줄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때 의료라는 것은 의학과 다르게 이런 경영이라는 문제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고 결국 저는 체질상 이런 조직에는 오래 있지 못하겠구나 하고 어렴풋이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총 근무 기간 11개월로 채 1년도 채우지 못한채 저는 삼성 의료원을 그만 두었습니다.

제가 삼성의료원에 근무하고 있을때 생각나는 일 중의 하나는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대표로 있는 안철수씨가 삼성 의료원의 의학연구원에 지원하려고 왔었던 일입니다. (근데 이런 걸 밝혀도 되나 모르겠네요??)
당시 산부인과 L 과장님이 의학연구원장을 함께 맡고 있어서 사전 면접 삼아  만나러 왔다가 중간에 우연히 저와 마주친 것이었습니다.
안철수씨가 기초 학문인 생리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나중에 성균관 의대의 기초의학 교수로 오기 위해 우선 의학 연구원에 들어오려 하는 건가 짐작했습니다.
다음날인가  산부인과 과장님께서 제가 안철수씨와 동기동창인 것을 알고 안철수라는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묻더군요.
저는 제가 아는대로 "성실하고 착한 친구이고 컴퓨터에 대하여도 잘 아는 능력있는 친구"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결국 채용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친구의 입장에서 볼 때 그때 의학연구원에 채용된 것이 나았을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아직 제 연애사의 충격에서 못 헤어 나오시고 직업사에서도 그런 간질간질한 연애사를 기대하는 분들도 있는 듯하여  그런 비스무리한 것으로 하나 밝히고자 하는 데 이미 글이 길어졌고 시간도 늦어서 쓰게 되면 다음 편에 쓰려고 합니다.
물론 연애사가 아니니 연애사처럼 화끈한(??) 어떤 것을  기대하지는 않길  바랍니다.
오늘 쓴 고백록은 제 자랑 같이 된 부분이 많은데 그동안 너무 찌질한 것만 보여드렸으니 이렇게라도 하여  좀 희석하고자 한다는 점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TBC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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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군마누라 [2015-06-23 16:49]  땅콩산모 [2014-06-03 01:54]  최현희 [2014-06-03 00:51]  
#2 최현희 등록시간 2014-06-03 00:54 |이 글쓴이 글만 보기
똘아이 근성이라...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머 좀 나올라 그러믄 딱..길어졌다며 이야기를 끊으시는게 프로냄새가 납니다. 궁금증유발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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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사들만 궁금하신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등록시간 2014-06-03 09:01
#3 땅콩산모 등록시간 2014-06-03 02:36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의료보험의 구조상 적자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의미심장하네요.
실제로 삼성의료원 vip건강검진 비용이 장난이 아니던데요..
가난할수록 많이 아플수밖에 없는데 환자가 곧 돈이되고, 돈이 곧 가치가 되는 세상...
늘어난 수명을 짐스러워해야 하는 세상...
참으로 개선되었으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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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보험 숫가는 정부에서도 원가의 70%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정부조차 정상적 병원 운영을 위해 묵시적으로 불법 진료, 비급여 진료를 조장하는 꼴입니다. 참 문제가 많습니다.  등록시간 2014-06-03 09:03
#4 이연경 등록시간 2014-06-03 02:38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새누리민주당이 아니고 새정치민주연합 이랍니다 ㅋㅋ 새누리와 같은 새 이지만 음청 다른 새정치 랍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암튼 돈잘버는데는 다 이유가있어요... 저도못되게 살아볼까합니다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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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하는짓(?)이 새누리당 2중대라는 비판을 듣고있어 우회적으로 디스하시는 거 아닐까요 ㅋㅋㅋ  등록시간 2014-06-04 08:47
투표꼭해야되요 원장님~~~  등록시간 2014-06-03 09:12
제가 워낙 정치에 관심이 없다보니 이름도 헷갈리는군요. 물론 지금까지 투표해 본 적은 딱 한번 밖에 없고..ㅎㅎ. 돈은 좀 못 벌더라도 먹고만 살 수 있다면 못되게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ㅋㅋ  등록시간 2014-06-03 09:04
5# 김지선 등록시간 2014-06-03 21:24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역시 기업계열사 병원인지라 이익창출을 위해 필요없는 검사항목까지 받게하는군요;;의료인이아닌이상 일반인들은 검진항목을 세부적으로 모르니 의사가필요하다그럼 해야되는가보다 하고 거부감없이 검사받을것같긴해여..
지금도 제가 코땜 세븐란스병원을 정기적인 팔럽하고있었는데 5분진료보고 선택진료비에 내시경검사비 추가 수납하믄 기본 4만원은나오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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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보험 제도의 문제 때문에 어느 병원에서든 필요없는 다소간의 과잉진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브란스 병원만 해도 영리가 목적인 곳이 아니니 그런 불합리한 것이 그나마 좀 적을 것입니다.  등록시간 2014-06-03 21:27
6# 봄봄이 등록시간 2014-06-03 23:21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이번에 보게 된 '송곳'이라는 웹툰에 나오는 주인공 같으세요. ㅎㅎㅎ 이수인이라는 인물입니다.
시간나시면 봐 보셔도 재밌으실거 같아요-
그 인물도 심히 대쪽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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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남에게 상처주는 (뭐 본의 아니게 줄 수는 있지만) 뾰족한 사람의 뜻이 아니에요 ㅎㅎㅎ 한번 꼭 보세요~ 제가 만화를 젛아해서 이런 잼난 만화를 보면 추천을 하고 싶네요~ 보시면서 공감 많이 되실듯 한데  등록시간 2014-06-04 17:28
송곳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등록시간 2014-06-04 00:56
보지 않아도 웹툰 제목만 봐도 짐작이 가네요. 송곳이라면 뭐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주 날카롭고 남에게 상처주고..그러니까 이수인이라는 주인공이 송곳 같다는 거죠? ㅠㅠ.  등록시간 2014-06-03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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