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암동에서는 한 7년쯤 개업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 제가 한창 팔팔할 때로 꿈을 안고 시작한 젊은 시절의 개업이라 의욕도 넘치고 개업 초기에는 진료실의 가구 배치도 한달 마다 바꿀 정도로 혈기왕성했습니다.
3층 건물이어서 옥상에 올라가면 응암동의 빽빽한 집들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변을 파노라마 뷰로 빙 둘러 보면서 앞으로 내가 출산과 치료를 맡을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생각하면서 명예와 부를 한손에 거머쥘 꿈에 부풀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다양한 시도들도 많이 했는데 초음파 용지를 최고급의 용지로 여러장을 찍어 준다든가, 지금은 부인과를 보지 않아 보여드릴 기회가 없지만 질염 환자의 냉검사나 균검사를 현미경으로 확대한 모습을 모니터로 환자에게 보여준다든가, 자궁 경부 염증으로 헐어 있는 분들의 질 확대경 사진을 출력해서 준다든가, 초음파 영상을 녹화해 준다든가 하는 등 여러가지 시도를 하였습니다.
이제는 거의 당연하게 된 것들이지만 냉검사 모습을 보여주는 시도나 초음파 영상을 녹화하는 것 같은 기술은 제가 알기로는 아마 제가 국내 최초거나 아니면 상당히 초기부터 한 사람인데 그 방법을 의료 업자들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에 요즘은 종종 그렇게 하는 병원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 건 컴퓨터 관련 지식이 있으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는데 제가 산부인과가 전공이고 프로그래밍등 컴퓨터 관련 작업이 부전공(따로 대학에 등록해 배운 건 아니고 독학.ㅎㅎ)이어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초음파 영상 녹화는 처음에는 비디오 테이프에 담다가 한동안은 CD에 담았는데 지금은 USB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지간한 곳에서는 인터넷 이용이 가능하니까 번거롭게 들고 다닐 것 없이 드롭박스나 구글 드라이브 혹은 에버노트 같은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하여 저장하고 볼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산모의 영상 정보 노출 위험과 저장 공간의 확보 등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약간 고민이기는 하지만.
여하튼 제가 그런 시도를 한 이유는 정확한 진단과 올바른 치료가 최종 목표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우선 의사와 환자간에 신뢰가 있어야 하는데 여러가지 사정으로 우리는 환자 의사 신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어떻게 하면 좀더 신뢰를 얻어 치료에 순응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많은 환자들이 찾아와 줄테고 저는 제가 기대한 부와 명예(실력있는 의사라고 하는 명예)를 얻을 수 있을테니까요.
그래서 비록 그 동네 주변 언저리뿐이기는 하지만 저희 병원은 장비가 좋고 의사의 실력도 좋다고 소문이 났다고 하더군요.
그런 덕분인지 응암동에 개업해 있는 동안 환자는 그리 적지 않게 보았습니다.
물론 주변에 먼저 개업하고 있어 환자를 제일 많이 보던 ㄱ 산부인과가 ㅇ 병원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대형으로 확장하는 바람에 출산 건수는 월 30여건으로 그리 많았던 편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저출산의 여파로 고생하는 요즘 산부인과 현실에서는 원장 혼자 운영하는 산부인과 병원으로는 적지 않은 건수이지만......
그런데 그때 개업하고 있으면서 주변 병원들을 다니다가 오는 산모나 환자들을 보면서 다소 충격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아주 큰 근종이 있어 초음파를 한번만 보면 알 수 있는 이상임에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들었다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았고 자궁 경부염은 커녕 질염도 없이 깨끗한 환자가 심한 경부염이 있으니 장기간 항생제 치료를 받아야 한다거나 혹은 레이져 치료 같은 파괴적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담당 의사에게 들었다고 하여 제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담과 치료를 위하여 오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해당 병원에 가서 물어 보지는 못했지만 추측하기로는 제대로 된 수련을 받지 못한 것으로 인한 오진이거나 혹은 알면서도 경영상 이유로 한 과잉 진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인 이유는 그런 사례들이 그리 드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어느날은 개업 아주 초기였는데 새로온 직원이 진료 준비를 하면서 질염 환자에게 쓰는 질정을 반으로 쪼개 놓고 있길래 왜 그러냐고 물으니 전에 근무하던 병원에서 이렇게 했는데 자기 친구들한테 물어봐도 다 그렇게 한다더군요.
자기가 근무하든 병원의 원장님께서 질정이 용량이 많아 반으로 쪼개서 넣어야 적당하다고 했답니다.
물론 질정은 한번에 하나씩 넣게 되어 있고 사실 반으로 자르기도 불편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알고 보니 질염 환자에게 반으로 자른 질정을 넣고 의료보험 청구는 한개를 넣은 것으로 해서 얼마간의 차액을 부당하게 취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질정 한개의 값은 그야말로 정말 얼마되지도 않는데 치료 효과가 떨어지는 것은 그렇다치고 그렇게까지 해서 얼마나 더 벌겠다는 것인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그래도 그런 경우는 양심적인 의사축에 드는 편입니다.
어떤 병원은 자체 조제한 질염 치료 연고를 무슨무슨 연고라고 이름을 붙여 질염 치료시 한번 바를 때마다 천원인가 이천원씩인가 더 받기도 하고 작은 연고곽에 넣어서 팔기도 했습니다.
자체 제조라고 해 봐야 두어가지 연고를 조금씩 섞은 것 뿐으로 별것도 아닐 뿐 아니라 의약품 제조법상 함부로 약을 만들어서 쓰지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비급여로 얼마씩 받지도 못하게 되어 있기도 하구요.
아까 위에서 냉검사와 균검사에 대하여 말씀드렸지만 그런 검사 비용도 다들 비급여로 천원 내지 이천원정도씩 받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처럼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병원도 있었겠지만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다들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하기야 냉검사(의학적으로는 습도말 검사라고 합니다.)의 의료 보험 수가는 500원인가 600원인가로 되어 있으니 적당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냉검사를 보기 위한 현미경만 해도 수백만원 이상의 장비이고 그런 검사를 보기 위해 그동안 배운 의학 지식도 있지만 그런 것은 무시하고 슬라이드에 질분비물을 묻혀 관찰하는 간단한 검사로 검사 시간도 얼마들지 않아서 보험 당국에서 그렇게 책정한 것입니다.
그렇게 터무니 없는 가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보험으로 검사하기보다는 원장이 자기가 생각하기에 타당한 액수로 보험을 적용하지 않은 일반 수가로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원래부터 적정 수가로 정해지고 정해진 규정에 따라서 진료를 하고 처방을 하면 되는 것인데 의료 보험 수가가 관행 수가의 1/2 내지 1/3로 정해지다 보니 개업가의 의사들이 도저히 그것을 받아들 수가 없었던 것이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이겠지요.
환자를 내진 하면서 질을 관찰하고 소독하는 비용은 지금은 질강 처치료라고 해서 같은 질염에 대하여 1회만 3천 얼마 정도의 수가가 인정되고 있지만 그나마도 작년 3월부터 처음 적용된 것이고 그동안은 그런 수가조차도 없었습니다.
비슷한 처치인 이비인후과의 이강 소독은 7천원 정도의 수가가 의료 보험 제정 당시부터 책정되어 있습니다.
임신 중에 하는 태동 검사도 얼마전 환수 사태로 말이 많았는데 저희도 소수이기는 하지만 환급해 준 적이 있습니다.
태동 검사(전자 태아 감시)는 그간 의료 보험 적용이 안되다가 새로 의료 보험 수가가 생기면서 과거에 시행한 것들은 불법 행위로 알려지면서 대규모 환수 사태가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참고로 의료 보험법을 포함한 법체계가 미국등 외국과 우리나라는 좀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경우 어떤 행위에 대하여 하면 안된다고 하는 규정이 대부분인 반면에 우리나라는 어떤 것은 해도 된다고 하는 규정이 많은데 언뜻 보면 우리나라가 좀더 개인의 자유와 융통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떤 것을 하면 안된다고 하면 나머지는 다 해도 된다는 뜻이고 어떤 것을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은 법에 정해진 것 외에 나머지는 하면 안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의료 보험 관련으로도 어떤 것은 해도 되고 얼마의 수가다라고 정해지면 거기에 정해져 있지 않은 나머지는 아무리 의학적으로 꼭 필요한 검사라도 하면 안되는 검사가 되는 것입니다.
태동 검사도 그런 것 중의 하나로 얼마전에 새로 의료 보험 항목에 등재되어 출산전 한번은 의료 보험이 적용되는 것으로 개선되었는데 기존에는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하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태아의 상태가 이상이 있는데 태동 검사로 확인을 하지 않았다면 태동 검사를 하지 않은 의사에 대하여 법원에서는 책임을 막중하게 묻고 있습니다.
의료법에는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참 말도 안되는 충돌이죠.
그러니까 의료법상 인정되는 검사가 아니니까 비용을 받으면 안되지만 하지 않아서 태아의 이상을 태동 검사로 확인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면 법적 책임과 배상을 하라는 것이죠.
한마디로 그냥 공짜로 해 주어라 그런 뜻입니다.
이런 불합리는 의료 영역에서 과를 불문하고 한둘이 아닙니다.
물론 전문가 단체들에서 그런 것의 시정을 요구하지만 밥그릇 챙기기라고 해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제가 산부인과 학회와 산부인과 의사회에서 활동을 할때 복지부 공무원들과 만날 일이 종종 있어 이런 불합리한 점을 이야기하면 그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문제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바로 잡으려면 재정이 충분히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의료보험료를 올려야 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의료보험료를 올리는 것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크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민원만 발생하지 않게 요령껏 운영해서 수가 손실을 메우는 수 밖에 없다."
말이 안 나오더군요.
이게 우리나라 복지 관련 공무원들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저는 의사들의 여러 요구에 대하여 밥그릇 챙기기 아니냐고 하는 지적에 대하여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포괄 수가제에 대하여도 그렇고 원격 진료에 대하여도 그렇고 의사 단체에서는 환자의 건강이니 뭐니 그럴싸한 변명을 가져다 댑니다.
그러나 우리 의사가 국민의 건강을 그처럼 끔찍하게 걱정하는 집단으로 국민들에게 보이도록 그동안 처신을 해 왔는지 돌아보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그러니 무어라 말하든 그건 솔직히 밥그릇 챙기기가 맞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고, 자신도 사회적 수준에 맞는 품위 유지 비용을 마련하고, 노력한 것에 대한 댓가로서 돈을 받고 하는 것 즉 밥그릇을 챙기는 것만큼 절박하고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밥그릇을 챙기지 못하면 결국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밥그릇을 챙기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집단이나 다 그렇지만 특히 전문가 집단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비전문가들은 내용을 잘 모르니까요.
위에 말한 몇가지 사례들이 밥그릇을 챙기기 위한 방편의 하나입니다.
심지어는 어떤 산부인과 의사는 막달에 출산이 가까와진 산모가 지방 친정으로 내려가 출산하겠다고 의뢰서 써달라고 하면 의뢰서를 써주면서 마지막 진찰을 할 때 산모 몰래 촉진제 질정을 넣는다고 합니다.
촉진제 질정을 넣은 산모는 내려가려 하다가 배가 슬슬 아파져 진통이 오니까 결국 내려가지 못하고 다니던 병원에서 출산을 하게 됩니다.
한명의 산모라도 확보하여 출산에 따른 수입을 올리기 위한 꼼수입니다.
산후 조리를 위해 가려던 친정으로 못 가는 것은 둘째치고 질정 촉진제가 가진 위험성을 생각할 적에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러는지 전 정말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 산부인과 의사는 돈도 많이 벌었고 여기저기 땅도 사 놓았다고 하더군요.
물론 저는 그런 의사는 일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의사가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분야도 그렇겠지만 의료에 있어서도 괴물과 파렴치한 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가 그렇게 만드는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의사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기대 수입과 일반 국민들이 생각하는 기대 수입 간에 격차가 많이 나는 문제는 있습니다.
그런 것은 사회적 공감대를 통해서 이루어 내야 하겠지요.
그렇게 되기 전까지 의사는 비록 불합리하더라도 규정을 지키려 노력하고 정부는 부정한 방법을 구사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항간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하듯이 법은 언제 개선될지 모르고 당장 병원은 운영해야 하다보니 미처 법이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적하는 불합리하다고 하는 것들은 표면적으로는 의사의 잘못이고 반성이 필요한 것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제도의 개선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것들입니다.
아무리 양심을 지키고 싶어도 가족을 거리에 나앉게 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테니까요.
의과대학을 들어갈 때 어떤 의사가 질정을 반으로 쪼개서 그만큼의 부당 이득을 챙기면서 진료를 하려고 생각했겠습니까?
의과대학을 들어가는 사람들이 다소간은 사회 공동의 공익보다는 개인의 안위를 쫓는 성향이 강해 보인다는 것은 저 자신도 그랬고 주변을 보면서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만 특별히 더 도덕적으로 나은 사람이 들어간 것도 아닌 것처럼 특별히 더 도덕적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의대를 들어간 것도 아닐 것입니다.
여하튼 잘못된 제도로 기인한 것이지만 저는 동료 의사들이 끝까지 원칙과 규정을 지켜주기를 바랍니다.
제가 전에 썼던 칼럼--망하는 것이 목표인 병원 어디 없나요?" --글도 그런 의미입니다.
비록 잘못된 제도라도 망하는 병원이 없으면 정부와 국민으로 하여금 문제가 없다고 착시를 일으키게 되고 따라서 제도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경제학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는데 의료에서도 이런 제도의 문제는 결국 선량한 의사들의 도태를 초래하게 됩니다.
진화론에는 "살아남는 것이 강한 것이다 혹은 변화에 적응한 자이다" 하는 말이 있는데 의료 분야에서는 강한 자 혹은 적응한 자들이 살아 남아서는 안되며 제대로 된 자들이 살아 남도록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할 책임이 환자 그리고 환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국민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하튼 너무 이야기가 추상적으로 흐르는 것 같아 의료 환경이 가진 제도의 문제에 대하여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전에 정부 당국자와 만났을 때 그들에게 했던 이야기를 올려 드립니다.
"교통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뀌면 건너려고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신호등이 바뀌지 않는다.
어찌 된 일인가 보니 사거리의 신호등이 모두 고장이 나서 전부다 빨간불이다.
조금 있으면 고쳐지려나 해서 기다려 보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고치는 사람은 오지 않고 주변에 교통 경찰도 보이지 않는데 저 멀리 경찰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멀어서 소리를 질러도 들리지 않는다.
신호가 망가져서 어느 횡단보도에서도 사람이 못 건너고 정체가 심해진다. 난 바쁜데.....
이때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몇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냥 신호를 무시하고 건너서 자기 갈길을 가는 것.
다른 하나는 신호가 고쳐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신호를 무시하고 건너가서 신호가 망가졌다고 경찰에게 말하는 것.
지금 우리의 의료 체계가 이렇다.
망가진 신호에서 무한정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적당히 순찰을 돌면서 망가진 신호가 없는지 살펴 보고 망가진 신호가 있으면 고쳐야 하는 것 아니냐?
그리고 누군가가 신호를 무시하고 건너가서 저기 신호등이 모두 고장났다고 말하면 경찰은 '신호가 망가졌는데 당신은 어떻게 왔어? 교통위반으로 범칙금부터 내라'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의사는 단속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신호를 적당히 무시해 가면서 건너 가는 것이 현재 우리의 현실이다."
위의 이야기에서 신호등은 의료 제도이고 횡단보도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의사입니다.
이런 의료 현실에서 제가 택하자고 주장하는 방법은 일단 아무도 신호를 무시하고 건너가지 말자는 것입니다.
건너지 못해서 정체가 되고 어떤 사람은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고 어떤 사람은 주저 앉아 있으면 멀리 있는 경찰이 달려오지 않겠습니까?
물론 달려오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때 가능한 일이지만....
아직까지는 제 방식이 그리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현재 국소적 정체를 빼고는 어느 신호등도 정체를 빚지 않으며 망해서 문을 닫는 곳도 없지 않지만 진료 영역 변경 정도이지 누구도 의사 자격을 버리고 택시 운전을 하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택시 운전사를 폄훼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의사 과잉 사태를 빚은 필리핀에서는 의사 자격을 가진 택시 운전사가 많다고 해서 비유한 것 뿐입니다.
물론 필리핀을 본 받자고 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의과대학은 지금도 제주 의과대학 다음이 서울대 공대라고 하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다들 들어가지 못해 안달입니다.
저는 망하는 것이 목표인 의사입니다.
물론 제대로 하면서도 잘 되는 것을 바랍니다.
그러나 잘못된 길로라도 가면서 망하지 않고 살아남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의과대학을 갈 때의 마음이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망하는 것이 목표라는 뜻은 잘못된 제도하에서는 망하는 것으로라도 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자고 하는 일차적 의미가 있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배운대로 하면서도 망하지 않게 제도를 똑바로 바로 잡아달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보신 분도 있겠지만 저희 병원의 초음파실 문에는 아래 사진에 보이는 것과 같은 헝겁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여하튼 이런 제도적 문제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시고 제 이야기를 계속 읽어 주시면 됩니다.
어느날 어떤 산모를 보니 임신 초기인데 계류 유산이 되었더군요.
"안타깝지만 유산이 된 것 같습니다. 아기 심장이 뛰지를 않네요."
"유산이 되었다구요?"
"예. 그렇게 판단이 됩니다."
"아니? 왜? 어쩌면 좋아?. ㅠㅠㅠ"
"...."
"왜 그렇게 된 거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임신 초기에 유산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원인 불명이고 알려진 경우 중 반 정도는 수정 시 태아의 염색체 이상이 발생해서 유산이 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럼 제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가요?"
"아닙니다. 산모께서 이상이 있어서거나 무얼 잘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니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다음에 건강한 아기를 낳기 위한 준비다 정도로 편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전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일부 조직이 아직 자궁 안에 남아 있어 소파수술을 해서 제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취를 하고 수술을 해야 하니 금식해서 내일 오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씀드려 치료적 소파술을 시행하고 당시 비용으로 4만 얼마 정도의 비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비용을 수납하면서 접수에서 보호자가 큰 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4만 3천원이라구요?"
"예"
아내가 대답을 하더군요. 당시 아내가 접수 수납을 맡았으니까요.
"아니 주변에 물어보니까 이삼십만원 정도 나온다든데? 수술 제대로 한 거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소파수술하신 거."
"근데 왜, 4만원 밖에 안되죠?"
"그건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수술이라서 초음파 비용과 처치비 더하면 그렇게 나와서 그렇습니다."
계류유산은 질병의 상태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의료 보험으로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적응증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게 하는 곳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 개원가에서는 계류유산 수술은 일반 비용으로만 수술을 했습니다.
긴혹 법규정을 알고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면 우리는 그렇게는 안하니까 그럼 큰 병원으로 가라고 말합니다.
낙태 수술처럼 보험이 되지 않는 소파수술은 지금도 비용이 적지 않지만 그 시절에도 30만원 전후로 비용이 꽤 비쌌습니다.
계류 유산 수술은 낙태 수술과 방법적으로 완전히 동일하지만 낙태 수술보다 감염의 위험이나 출혈의 위험등 수술후 합병증의 발생 위험은 오히려 더 높습니다.
그럼에도 의료보험을 적용해 수술을 하면 낙태 수술시의 일반 수가에 비하여 1/10 정도 밖에 안됩니다.
그러니까 대부분 병원에서는 일반으로 수술을 하면 하고 아니면 대학병원으로 보내 버립니다.
그러다보니 위 환자의 보호자와 같은 혼동이 생긴 것입니다.
그 분의 입장에서는 30만원 전후 나와야 하는 수술인데 4만 얼마 밖에 안 나왔으니 무언가 다른 수술을 하거나 아니면 형편없는 싸구려 약을 써서 그런가 오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계류유산 수술 뿐 아니라 다른 처치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아내로부터 구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도 다른 의사들이 하는 것처럼 하면 안되냐고 말이죠.
당신이 허준도 아니고 비싼 병원 임대료도 내야 하고 아이들도 학교에 보내야 하고 퇴직금도 없는 직업인데 노후 대비 자금도 저축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죠.
물론 제가 고집이 센 편이라 아내의 요구는 항상 묵살되었습니다.
응암동에 개원하고 있을때 셋째 민혜를 임신했다는 것은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어느날 돼지꿈을 꾸고 생전 처음으로 주택복권을 샀더니 복권은 당첨이 안되고 얼마후 셋째가 임신되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산부인과 의사로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셋째는 위의 오빠보다 8살 아래로 임신하려고 해서 임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계획에 없던 아기가 생겨 낳을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처럼 낙태 운동에 발벗고 나서던 때도 아니었으니 낙태 수술을 하는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던 차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아내는 낙태는 도저히 못하겠는지 어느날 제게 그렇게 말하더군요.
"나 아무래도 수술은 못하겠어."
"그래 너 하고 싶은대로 해."
"그런데 당신이 나하고 하나 약속해 줄게 있어."
"뭔데?"
"당신 병원 하는 꼬라지 봐서는 도저히 셋까지 나아서 제대로 키우고 교육을 시킬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뭐 하다보면 어떻게 되겠지......"
"아이를 하나도 아니고 셋씩이나 그렇게 아무 대책 없이 싸지르란 말이야?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러니까 당신 앞으로 병원 운영에 있어서 그 무슨 쥐뿔 원칙이니 양심이니 하는 거 조금만 버려줘. 당신 말마따나 제도가 문제가 있잖아.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이 하라는 것 아니야. 당신 자존심에 그렇게 못한다는 거 알아. 그러니까 그냥 아주 조금만 당신이 양보해 줘. 우리 가족을 위해서."
"......"
"당신이 그렇게 하겠다면 낳고 못하겠다면 지울거야. 지금 형편에 둘도 빠듯한데 그런 상태로 셋은 못 낳겠어!"
"......."
"당신이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 알아. 어떻게 할래?"
"......."
"빨리 결정해. 벌써 두달됐어. 이제 더 늦으면 수술도 위험하다는 거 당신이 잘 알잖아!"
"알았어. 그렇게 할께."
그렇게 저는 조금은 비겁하게 살기로 아내와 약속했습니다.
물론 그때 아내와 한 약속은 아직까지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니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ㅋㅋ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아내와 가족에게 많이 미안합니다.
더 미안한 것은 앞으로 죽는 날까지 지키지 못할 것 같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의사 생활 더 해봐야 5년, 길어봐야 10년 정도일텐데 20년 이상 고수하면서 살아온 삶이 억울해서도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조금은 평범한 의사와 살았다면 아내는 손에 물 안 묻히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녀가 소원하는 대로 백화점에 가서 누워 있는 옷 말고 서있는 옷도 사고 그랬을텐데 그냥 못난 남편 만난 죄라고 아내가 그렇게 편하게 생각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물론 지금이야 아내는 병원에 나와서 돕지 않아 그런 속타는 꼴은 보지 않으니 그런 것으로 싸울 일도 없습니다. ㅎㅎ
오늘은 옛날 생각하면서 분만이 끝나고 저녁 무렵에 응암동 예전 병원 동네를 갔다 왔습니다.
무슨 여성의원으로 이름이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산부인과 병원이 있더군요.
전에 살던 아파트도 가보고 밤 늦게 출출할 때면 가던 꼼장어 집도 훔쳐 보고 아내가 임신했을 때 자주 갔던 대림 시장 안에 있던 순대국밥집도 가봤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조금 늙기는 했지만 10여년전 그대로더군요. 물론 저를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리 멀지도 않아 언제고 가려고만 마음 먹으면 갈만한 가까운 거리지만 이상하게 다시 가게 되지 않아 근 10년만에 처음 간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제 다시 이 곳에 올 기회가 있을까 싶어 별로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예전 생각하면서 순대국밥 한그릇을 시켜 먹고 왔습니다.
사진도 한장 찍었습니다. ^^
건너편의 거울을 보니 한창 젊었던 어느 청년은 온데간데 없고 어중간하게 나이 들은 중년의 남자가 처량하게 혼자 숫가락에 국밥을 뜨고 있네요. ㅋㅋ
꿈 많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혼자 앉아서 순대국밥을 먹고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우울 증세로 종종 고생하는데 또 증세가 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은 고백록이 아니라 평소의 제 생각을 거칠게 털어 놓은 푸념에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짬뽕이 되었네요.
짬뽕. ㅎㅎㅎ....
TBCO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