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의약 분업 파동 당시 아이온 산부인과 게시판에 썼던 칼럼입니다.)

이 땅에 의사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고난의 가시밭길 같습니다.
잘못된 의료 제도와 열악한 진료 환경, 과거처럼 존경받지도 못하고 그저 밥그릇 싸움이나 하는 아주 이기적인 집단으로 도매금으로 매도당하는 현실이 서글픕니다.
옛날 허준이라고 하는 의사가 부럽습니다.
그저 진료에 신경 쓰고 환자의 상처를 성심 성의껏 열심히 보살펴 주면 그렇게 존경도 받고 또 어의까지도 되니 말입니다.
감히 어의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고 지금은 보호자로 부터 멱살 잡이나 당하는 불상사나 생기지 말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밖에는 없는 데 그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힘든 분만을 담당해서 어떻게 하면 자연 분만을 하도록 도와 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혹여 아기의 상태가 나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노심초사에 시달리면서 한 밤중에도 전화 벨이 울리면 심장이 벌떡거려서 두번 이상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는 심정을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요.
그런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무슨 큰 경제적인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저 먹고 살기도 빠듯한 현실을 일반 사람들이 알기나 할까요?

전에 저희 병원일을 도와 주시던 식당 아주머니께서 이렇게 외래 환자도 많이 보시고 분만도 수시로 하면 한달에 한 5천만원은 버시지요? 하고 물어 보시는 것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웃었습니다.
그렇게 5천만원 씩이나 벌면 산부인과 의사 생활 근 10년에 자기 집 한채 없어서 28 평 전세집에 살고 원하지 않아도 자동차 10 년 타기 운동에 동참할 수 밖에 없게 되었을까요?

일반인들은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잘 사는 의사도 있겠지만 자기가 세운 주관을 뚜렷이 가지고 원칙과 양심을 지킨다고 자부하면서 이 땅에서 의사로서 살아간다면 먹고 살기도 그리 쉬운 편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지요.
다른 분야는 잘 모르겠는 데 최소한 산부인과 만큼은 돈을 많이 벌고 못벌고는 의사가 얼마나 양심을 저버리고 자기 자신과 환자를 속이느냐 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고 감히 단언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오늘도 떳떳이 다 망가져 가는 자동차를 끌고 집으로 갑니다.

그러면 이 땅에 의사로서 저 같은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 걸까요?
돈도 없고 그렇다고 그다지 존경도 없는 의사를 하면서 도데체 무엇으로 의사를 하는 걸까요?
저는 제 뒤에서 저를 내려다 보는 저에게 떳떳하고 싶어서 아직은 쓰러지지 않고 버티어 나갑니다.
양심이라고 해도 좋고 원칙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저를 쳐다 보는 저, 다른 모든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속일 수 없는 단 한사람 내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어서 오늘도 집으로 가는 비탈진 언덕을 오릅니다.

글쎄 언제까지 돈과 명예와 존경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그저 내 자신에게만 떳떳한 마음으로 꾸려가는 의사 일을 할 수 있을 지 오늘처럼 힘이 빠지는 날에는 자신이 없어지는군요.
이제는 아무 생각없이 던지는 한사람의 비판도 요즘은 그냥 쉽게 받아 넘기기가 힘들어 집니다.
누구 못지 않게 자부심을 가지고 환자들을 위한다고 하는 의사로서 병원을 찾아 오시는 환자분 또 온라인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한마디 하는 설명에도 오늘은 유난히 힘이 많이 드는군요.

날 곳을 못찾아 해메이는 미혼모들을 보아 준다고 무슨 성자라도 되는 것처럼 혼자서 그 짐을 다 떠맡고 있는 저 자신이 오늘은 굉장히 초라하고 피곤해 보이고 어찌 보면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는 군요.
내일은 의약 분업 파동으로 집단 폐업했다고 경찰서에서 심문한다고 소환장이 왔던 데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다녀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어떤 일로건 경찰서라는 곳은 출입해 본적도 없는 데 말이지요.

이 땅에 의사로 사는 것이, 제대로 된 의사로 사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게 된 것일까요?
누구 아는 사람없으시나요?
이 땅에 의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 지 누구 말해 주실 분 안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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