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에서 전에 제가 진찰을 하던 어떤 산모께서 태아 성감별 관련하여 건의하여 주신 글을 올렸습니다.
그 글은 과연 이곳에서 홈피를 통해 저희 병원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아시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런 문제로 현재도 난감한 상황에 종종 처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하여 올린 글입니다.
그 글에서 제 의견을 차후 밝히기로 하였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답변을 겸하여 그리고 성감별에 대하여 궁금해 하시는 모든 산모들께 드리고자 하여 쓰는 글입니다.
임신 중 태아에 대한 성감별은 몇년전까지는 임신 중에는 일체 금지가 되어 있었지만 어떤 변호사가 국민의 기본적 알권리 침해하고 하여 성감별 금지법에 대하여 헌법 소원을 내서 헌법 불합치 결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4년전 쯤 법이 개정되어 현재는 임신 32주 이후에는 알려 줄 수 있고 그 이전에는 알려 줄 경우 1년 이하의 면허 정지 처분이라는 처벌을 받습니다.
1년 이하의 면허 정지는 그전에 비하면 다소 완화된 처벌이기는 하지만 의료법의 여러 다른 처벌에 비하여 보면 굉장히 위중한 처벌입니다.
그만큼 엄하게 금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32주 이전의 태아 성감별 금지법에 대하여 산부인과 의사들 다수는 반대하는 편입니다.
2009년도 성감별 금지법 개정을 전후하여 산부인과의사회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태아 성감별 고지 기간을 임신 32주 이후로 하는 것은 태아성감별 금지와 다름 없다. 인공임신중절이 어려운 임신 24주 이후부터는 태아의 성별을 고지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러나 공청회등을 통해 사회 각층의 의견을 취합한 정부는 32주를 태아 성감별에 대한 최종 시한으로 정하였습니다.
물론 32주 이전의 태아 성감별 금지법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학병원과 일부 개원가를 빼고는 거의 대부분의 병원에서 암암리에 성감별을 해주고 있습니다.
32주 이전의 성감별과 관련하여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은 몇가지가 있습니다.
1. 법에서 정한 32주 시기가 타당한가 하는 문제.
2. 법이 제정되어 있을 경우 의사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문제
3.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경우에 불법적 혹은 비원칙적 진료 행위를 하는 문제
1번 문제에 관하여 저는 개인적으로 성감별을 32주 이전으로 24주나 28주 쯤으로 조금 당겨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기는 합니다.
물론 흔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 32주 이후에도 낙태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제가 얼마전까지 열심히 활동하던 진오비의 낙태 근절 활동 당시 받았던 제보를 보더라도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낙태는 임신 초기인 12주 전에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법적으로는 24주 정도를 성감별의 허용시기로 정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런 제 개인적 판단이나 산부인과 의사들 다수 의사와는 별도로 법이 그렇게 정해져 있을 때 의사가 택할 수 있는 선택은 "성감별 규정을 무시하고 알려준다" 아니면 "성감별 규정을 지키고 알려주지 않는다"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2번 혹은 같은 맥락이지만 3번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성별을 묻는 산모께도 그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의사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혹은 산모의 요구가 있으면 법적인 규정을 무시해도 좋은 초법적 존재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성감별이든 무어든 그렇게 법에서 금지하여 놓은 행위라도 아무도 알 수만 없다면 어겨도 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어기게 된다면 그것이 과연 성감별에만 해당하고 제왕절개의 적응증등 교과서에서 정한 여러 원칙에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는지"
산모께서는 궁금하지만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대답해 주었고 대부분 산모들은 그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소수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산모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은 지켜야 하지만 나는 예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큰 문제이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적에 그것이 잘못된 법이라 판단한다면 법을 어겨가면서 성별을 알려주기 전에 우선 법을 다시 개정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맞는 일이겠지요.
제가 지금까지 딱 한번 성감별 법을 어긴 적이 있는데 오래전에 군복무 대신으로 지방 의료원에 근무하고 있을 때 임신 24주임에도 어떤 산모에게 태아의 성별을 알려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전치태반으로 첫아기를 제왕절개로 딸을 출산하였던 분인데 둘째를 임신하여서 시댁에서도 너무 스트레스를 주고 하여 아들이든 딸이든 관계없으니 성별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면 속이 후련하겠다고 알고 싶다고 제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분은 지방에 있으면서 아내와 친하게 지내던 분이었는데 아무리 설득을 하여도 안되고 딸이라도 절대 낙태는 하지 않을 것이니 제발 알려만달라고, 모르는 채 지나면 정말 스트레스가 심해서 밥도 못 먹겠고 제대로 살아가기도 힘들 정도라고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제가 성별을 알려주었는데 태아는 딸이었고 며칠 후 산모는 다른 병원에 가서 낙태를 하였습니다.
나중에 산모께 왜 그렇게 하셨나 여쭈어 보니 처음 생각으로는 딸이라도 낳을 생각이고 나중에 출산했을 때 딸이라는 걸 알아서 그때 갑자기 서한 마음이 들고 시댁 식구들이 충격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딸이라는 것을 미리 알면 마음의 대비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랬는데 막상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니 도저히 아기를 배 속에 더 품고 있을 수가 없었다고, 생각이 달라지더라고 말을 하더군요.
사람의 마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제가 정해 놓은 원칙을 지켰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서 행복했을지 불행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제가 그러지를 못하여 소중한 한 생명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간접적 살인을 한 것과 다를게 없이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아이가 태어났다면 아마 행복하게 귀여움을 받으면서 자랐을 것이라는 것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지금까지 제 경험을 보면 그러니까요.
이번에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원칙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오래전 제가 유람선을 타던 때의 기억이 납니다.
나들이철이라 배는 정원이 꽉 차서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지 못하였습니다.
100명의 정원을 넘어설 때 어떤 분이 나는 꼭 이배를 타야 한다. 나 한명이야 괜찮지 않냐고 하면서 말을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한명, 두명, 결국 20명도 넘는 사람들을 더 태워 정원초과인 상태로 배는 출발을 했습니다.
정원보다 더 많이 태운 배는 바다 한가운데서 아찔한 순간이 있기는 했지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1주일만 있으면 32주인데, 낙태를 할 것도 아닌데 알려주면 좋겠다고 하는 분들이 지금도 많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국민들의 인식도 많이 개선되었고 요즘은 태아가 단순히 딸이라고 해서 낙태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딸이기를 바라는 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건 첫째일 때 그렇고 현재 세번째 아기인 경우 남녀성비는 130:100 정도됩니다.
첫째인 경우 남녀성비가 100:100인 것에 비하면 정상이 아닙니다.
나머지 30명의 아기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요?
32주 전 태아 성감별 금지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저희가 잃는 것은 많습니다.
산모도 다른 병원으로 옮겨가거나 아예 오지 않거나 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 다니시는 분들은 궁금한 것을 견뎌야 하니 답답하고 저는 고지식하고 융통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이 법을 핑계로 산모나 가족에 대한 배려는 하지 않는 완고한 의사로 보일 것입니다.
얼마전에도 언성이 높아져 마음을 다치고 돌아간 산모도 있습니다.
성감별에 대한 이런 제 대응이 제가 무뚝뚝대마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대신 32주전 태아 성감별 금지법을 지킴으로써 얻는 것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법에서 정한 원칙을 지켰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희생되었을지 모르는 태아를 구하게 되었다는 것.
그러나 잃는 것이 여러개이고 얻는 것이 작아 보인다고 해서 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혹시 앞으로 언젠가 제가 32주 전(혹은 법이 바뀌어 기준이 내려갈 수 있도 있는데 그렇다면 그 기준에 맞추어서)에 태아 성감별을 해주고 있다면 어떤 유혹과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던 의사 한명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적응증에서 벗어난 제왕절개는 절대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의사 한명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아무리 병원이 문을 닫을 정도로 경영이 어려워도 교과서에서 인정하지 않는 원칙에 어긋난 처치라면 하지 않던 의사 한명이 결국 현실에 굴복하고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저희 병원은 어떤 경우에도 법에서 정한 임신 32주 이전의 태아 성감별은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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