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화와 같은 요청이 있어서 썼다면 비록 기억은 잘 안나는 성장기이지만 훨씬 탄력을 받아 글을 재미지게 썼을텐데 그렇지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리며 (ㅋㅋ) 또한 그런 요청은 전혀 없었더라도 얼마전 읽은 책에 있던  "써라. 그냥 써라" 하는 문구에 충실하고자 그냥 씁니다.ㅋㅋ

저는 1960년도 12월 한겨울에 서울의 월리(月里) 중 한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윌리가 아니고 월리(月里 )입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달동네라는 뜻입니다. ㅋㅋ
구체적으로는 서울 동대문구 숭인동인데 지금은 소속이 종로구로 바뀌었더군요.
저는 어머니 나이 19세에 낳은 첫째 아들이었는데 제 아래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한명씩 있습니다.
지금은 자녀가 둘만 되도 용감하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하던데 그때는 셋은 기본이라 없는 살림인데도 그러셨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기와를 만드는 공장에 다녔다고 하시고 어머니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하셨는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두분 다 일을 다니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릴적 일 중에서 기억나는 것은 많지 않은데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어머니께서 해주신 세살인가 네살때의 사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혼자 기어 다니고 아장 아장 걸어 다니고 하던 무렵에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일 나가시어 친할머니 혼자 저를 보시던 중 할머니께서 잠시 조시는 사이에 제가 혼자 놀다 툇마루 밑에 있는 뜨거운 밥솥에 거꾸로 떨어져서 밥솥에 얼굴을 데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고로 인해서 없는 가정 형편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제 얼굴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이 남았고 아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어머니의 가슴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한이 남았습니다.
한창  예민하던 어린 나이때는 그렇게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어머니와 제대로 치료도 받게 해 주지 못한 아버지가 많이 미웠지만 지금은 그저 어려웠던 시절 운명의 여신의 싸늘한 외면 때문이었다 생각하고 마음에서 내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두분께서도 죄책감이나 가슴 속 깊은 한은 잊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버지야 이미 그러신 것 같은데 어머니는 아직도 모든 일에 있어 제가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하여서든 다 들어 주려 하시고 제가 결정하는 것은 다 지지하여 주시는 것 보면 아무래도 아직 지우지 못하신 듯 싶고 어쩌면 남은 평생 동안에도 가슴에서 지우지 못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재수까지 해가면서 그리고 적성도 맞지 않는 학과임에도  최고의 인재들만 들어간다는 학교 학과에 기를 쓰고 공부를 해서 들어간 이유 중에 하나도 어머니의 그런 한이 조금은 덜어질 수 있을까 해서 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합격 통지서를 받고 막상 하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말씀 드리고 싶었습니다.
"어머니. 당신 아들이 이제 얼굴의 흉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외면을 받고 한 세상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될 수 있게 의사가 될 거예요. 그러니 이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게 미안해 하지도 마시구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불효에 부끄럼이 많은 저는 그렇게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혹시 그때 그렇게 말했다면 저는 아직도 잘 먹고 살지 못해 여전히 걱정을 끼쳐 드리고 있으니 거짓말 한 꼴이 되었겠지요.
그러나 설사 그렇다 해도 어려운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사는 것과 어쩔 수 없이 타의에 의해 어려운 길로 내몰린 것과는 기분이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저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허준을 이야기하면서 "허준도 너처럼은 안하겠다. 이제 고집 좀 그만 부려라."고 말씀하신 것은 저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겠지만  자신의 자식에 대한 긍지도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물론 저는 허준 같이 살지  못했고 앞으로도 절대 그렇게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일지언정 어머니께서는 저를 허준보다 자랑스러운 아들이라 생각하고 계실테니 그 가슴의 한이 조금은 덜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하튼 지금은 그런 외모에 대한 것이야 거의 (완전히는 아닙니다. 상당히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신경을 쓰지 않지만 비관적이고 시니컬한 성격은 아마 그런 사고를 불러오게 된 어려운 가정 형편과 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한 흉진 외모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보기는 합니다.
물론 아무런 사고를 겪지 않은 제 아이들도 모두 그리 밝고 애교 있는 성격이 아닌 것을 보면 유전적으로 그리 밝은 성격의 유전자를 타고 난 것도 아닌 것 같기는 합니다.

저는 평생 살면서 한 서너번 쯤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다섯살인가 되었을 때는 편도선이 심하게 부어서 숨도 쉬기 어려워 호흡 곤란으로 거의 다 죽게 된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때도 역시 병원에 갈 형편도 안되서 어머니께서는 저를 집근처의 어느 한약방인지 한의원인지 하는 곳으로 데려 갔다고 하더군요.
아마 정식으로 한의사는 아니고 야매(불법)로 대충 간판도 없이 하는 그런 곳이었던 것 같은데 그 한의사가 살리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면서 되든 안되든 한 번 해 보자고 하고 입을 벌려 목 안으로 무슨 침인지 약인지를 대나무 대롱으로 불어 넣었다고 하더군요.
제 생각에는 아마 편도선이 많이 붓고 염증이 생겨 곪은 것을 침으로 뚫어서 배농을 한 것이거나 아님 조직을 녹이는 약을 써서 편도 피부를 뚫어 배농을 하게 만든 것 아닌가 싶습니다.
프랑스 소설가 아멜리 노통브는 세살 때의 일도 기억하여 소설을 썼지만 저는 애초부터 그런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하여 그때의 기억은 거의 없고 깨어날 때 쯤 컴컴하고 무섭기만한  방에서 무지무지하게 목이 아팠던 것 같은 희미한 기억만 어렴풋이 있습니다.
여하튼 그 덕분에 살아나기는 했는데 그 뒤로도 몇년 동안은 감기만 걸리면 편도선이 부어서 거의 초죽음이 되다시피 고생을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편도선은 어릴 때는 그렇게 고생을 했지만 지금은 저절로 나아서 그런 고생은 하지 않으니 나이가 든다고  다 나쁜 것은 아닌가 봅니다.
물론 노안이나 튼실하지 못한 이, 희미해지는 기억력, 강인하지 못한 체력 등등 잃어야 하는 것들은 그 몇백배는 되지만......ㅠㅠ
아이들은 목구멍 크기에 비하여 편도선이 커서 조금만 부으면 숨쉬기가 어렵지만 자라면서 목구멍이 커져서 대개는 편도선염은 어릴 때는 항생제등 약물 치료만 하고  수술을 하지는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렇게 편도선과 더불어 없어도 좋을만한 신체 기관은 우리 몸에서 몇군데 더 있는데  맹장도 그 중에 하나고 사랑니도 그런 것 중 하나입니다.
과거에는 상당한 필요성이 있던 것들이지만 인간이 진화하면서 큰 필요가 없이 남아 있는 것들입니다.
물론 당장 크게 필요가 없는 듯이 생각이 들어도  편도선이나 맹장은 우리 몸에서 염증이 생겼을 때 방어군인 임파구를 만드는 기관들이라서 지금은 아무 이유 없이 제거하지는 않습니다.
과거 한때는 제왕절개하면서 맹장은 서비스로 제거하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것이 수술 합병증 문제도 그렇고 해서 손해가 더 많다고 생각하여 제거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 경향입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 동네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입학 무렵에는 경기도 구리시 교문리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은 인창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서 했는데 몇년 전인가  예전 추억을 떠올리면서 가보기는 했는데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더군요.
예전에 제가 한때 뛰놀던 장소라는 느낌은 고사하고 한번도 와 본 적도 없는 그런 낯선 곳에 온 것 같았습니다.
서울의 학교들처럼 대단하게 리모델링을 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고 워낙 제가 기억력이 나빠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님 제가 하늘에서 이 나이가 되서 뚝 떨어졌거나..ㅋㅋ
어릴 때 사진을 보관해 놓은 앨범을 찾아보면 옛기억이 좀 떠오를까 하여 얼마전에는 앨범을 찾아 보았지만  앨범도 옷장 깊숙히 다른 짐들에 깔려 있어서 꺼낼 수가 없더군요.
물건도 그렇고 때로 기억도 그렇지만 너무 깊숙이 넣어 놓으면 쉽게 꺼내기 어려운가 봅니다.
그렇게 깊이 묻혀 있다가 언젠가는 쓸모없는 쓰레기들과 함께 사라지게 되겠지요.
내가 가진 기억도 그리고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 있는 나의 모습도....
여하튼 초등학교 저학년때의 기억은 거의 나지 않지만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참 예뻤던 것 같습니다.
앞가슴에 코닦는 수건도 똑바로 다시 달아주고 한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어린 나이임에도 그런 것을 보고 감동을 먹었나 봅니다. ㅎㅎ.
한마디로 너무 이쁜 선생님을 보고 뿅 간 것이죠. 제게 첫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여자입니다. ㅋㅋ
그러나 그런 기억 가지고 있다고 저를 이상한 눈으로 보실 분은 없겠지요?
반대의 경우는 욕을 많이 먹지만.....ㅋㅋ. 참고로 그런  반대의 경우는 롤리타 컴플렉스(아동 성애)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전 어릴때 학교 선생님들은 여선생님이 맡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라도 그리운 추억 하나쯤 더 생기게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여자 아이들에게는 남자 담임 선생님이어야 할텐데 초등학교는 거의 남녀 공학이니 어째야 할 지 모르겠군요. ㅎㅎ
여튼 위와 같은 이런 현상은 저만 그런 것은 아닐텐데  추측하기로는 남자 아이가 엄마 빼고 제대로 된 성인 여성을 보는 게 아마 그때가 처음이라 그럴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 때는 유아원이나 유치원을 다니는 경우가 드물었으니까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 처음 보는 성인 외간 여성인 것이죠. 혈연이 아닌.
그러니 아마 곰보 쨈보 아니면 다 이뻐 보이고 그립고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초등학교 입학때 코 닦는 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하는지는 모르겠네요. ㅎㅎ
그때는 아이들은 왜 그렇게 코를 흘렸나 모르겠습니다.
지금 아이들보면 별로 코흘리개는 없는 것 같은데, 그 시절에는 영양과 위생이 나쁘다보니 비염을 앓는 아이들이 많아서 그랬던 것일까요?

초등학교때는 학교가 동구릉 바로 옆이어서 소풍은 언제나 동구릉으로 갔습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항상 동구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소풍 도시락의 왕은 김밥이죠.
그러나 전 한번도 소풍 도시락으로 김밥을  싸 가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바쁘기도 하고 정말 당시 김이 그렇게 비쌌는가 싶기는 한데 반에서 저를 포함하여 몇몇의 아이들은 도시락으로 김밥을 싸 가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예전 이야기 하면 얼마나 오래되었다고 그런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 하냐고 하실 분 있으실지 모르겠는데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은 아니지만 1960년대 이야기이니 좀 오래된 이야기이기는 하죠? ㅎㅎ
그래서 소풍에 대한 기억은 별로 유쾌하게 기억나는 것들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기억들은 대체로 아스라히 그립게 떠오르는 것들이 많습니다.
공부에 대한 것은 전혀 기억나지 않고 이것저것 하면서 놀았던 기억만 납니다.
개구리도 잡고 기찻길 근처에서 놀고 하면서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학원 간 기억, 무슨 무슨 빨간펜 학습지 본 기억 밖에 안 날 것 같은데 저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데 빨간펜으로 동그라미 그려진 학습지가 떠오르는 것보다는 그래도 개구리나 메뚜기 혹은 가재가 떠오르는게 훨씬 자연적이지 않겠습니까?
동구릉 가는 길에는 기찻길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그 유명한 경춘선인가 봅니다.
기찻길 옆 도랑에는 깨진 시멘트 틈 사이로 가재가 살고 있었습니다.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떼서 (좀 잔인하기는 하네요.) 막대기에 묶어 도랑의 시멘트 틈 사이로 밀면 가재가 물고 나옵니다.
그때 이미 저는 유혹의 기술이 가진 힘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나 봅니다. ㅋㅋ
기찻길 옆 시멘트 도랑에 살면서 먹을 것이 궁했을 가재에게 토실토실한 개구리 뒷다리는 아마 엄청난 유혹이었을 겁니다.
아마 가재도 그것이 어쩌면 자신을 낚아 채는 죽음의 먹이라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끌려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유혹이겠지요.
물론 어른들은  그런 유혹을 그럴싸한 다른 이름을 붙여 부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고, 명예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권력이나 돈, 보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 중 몇가지에는 저도 낚여 본 적이 있고 지금도 죽을둥살둥 달려들고 있기도 합니다만 역시 제일 강력한 유혹은 사랑과 행복해지고자 하는 열망인 것 같습니다.
여하튼 죽음의 유혹인지 알고  나왔든 아니면 갑자기 떨어진 로또라고 생각하고 나왔든 자신의 동굴 밖으로 나온 가재에게는 단 한가지의 운명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단단한 껍질을 벗은 조개에게 남는 것과 같은 것. 바로 죽음입니다.
배고픈 아이들의 간식거리가 되는 것이죠.
지금은 예전 경춘선은 관광객을 위한 산책길로 만들고 새로 기찻길을 내서 그 예전의 도랑은 없어졌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생물체와만 논 것은 아닙니다.
대못을 기차가 지나가는 철로에 미리 올려두어 기차가 지나갈 때 그 큰 쇠바퀴에 못이 깔리게 놓아두면 못은 아주 납작한 칼이 됩니다.
그걸 다듬고 갈아서 장난감 칼로 만들어 개구리 다리도 작업하고 했던 기억도 어쩐 일인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바로 엇그제 일인 것처럼 말이죠.
그런 놀이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들으니 기차가 탈선할 수도 있어서 매우 위험한 장난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모든 놀이에는 위험의 요소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사랑처럼 위험한 것이 없다고 하던데 제가 보기에는 놀이나 사랑뿐 아니라 사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한 일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 어느 총리후보자 건도 그렇고 제 경험으로 봐도 그렇지만 어느 순간 한방에 훅 갈 수 있는 것이 삶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너무 위험하게 논다고 뭐라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어른들은 훨씬 더 위험한 일을 하면서 아이들만 너무 보호막 안에 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아무 위험이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금 거친 친구도 사귀어 보고 더러워 보이는 흙도 만지면서 놀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사실 요즘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들이 많은 데 그건 모두 우리 인간이 주변 환경을 너무 깨끗하게 만들다 보니 아이들이 여러 감염원에 노출될 기회가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외부의 공격자들에 대하여 저항력이 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저항력 감소는 우리의 신체가 조그만 알러젠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도 과민하게 반응하도록 만드는데 그것이 알러지 반응이고 그런 알러지 반응 중 피부 알러지 반응이 아토피입니다.
여하튼 그렇게 한학년인가 두학년 정도를 교문리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때쯤 경북 의성군 길안면 탑리라는 곳에 있는 외가댁으로 살러 내려 갔습니다.
지금은 KTX도 있지만 그때는 KTX는 없었고, 있었다 해도 탑리라는 기차역은  제일 느린 무궁화호(라고 생각했지만 동네주민님의 지적을 보고 비둘기호로 정정합니다. ^^) 밖에는 안 서는 작은 마을의 역이기 때문에 중앙선을 타고 한참 가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글도 그렇게 한참 있다가 이어질 것입니다.
물론 비둘기호처럼 느리게 시간이 흘러서 한참 있다가 다음 글이 이어질 지 아니면 그보다는 조금 빠르게 무궁화호나 혹은 KTX처럼 순식간에 다음 글이 이어질 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얼마나 뜨거운 성원의 글이 달리느냐에 좌우될 것입니다. ㅋㅋ
기차나 글이나 앞으로 나아가려면 다 에너지가 필요하거든요.
물론 그런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글이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삶이란 위험하기도 하지만 또한 예측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ㅎㅎ

TBC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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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이 [2014-06-19 23:20]  ennead [2014-06-19 12:39]  위윤진 [2014-06-19 11:04]  bella [2014-06-18 00:31]  thepetal [2014-06-17 22:50]  
#2 thepetal 등록시간 2014-06-17 22:59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어머나 원장님 ㅎㅎ
어릴때부터 차도남이셨을거같은 이미지인데... 어릴때의 기억은 뭔가 구수한걸요 ㅎㅎ
(서울에서 태어나셨으니 차도남이 맞긴한건가요 ㅎㅎ)
기찻길 근처에서 가재도 잡고 했던건 그 시절엔 흔한 풍경이었겠죠?
지금은 웬만해선 그런 놀이를 즐길만한 환경도 여건도 안되는거같아 아쉽네요~

그나저나 원장님 출생년도까지 정확히 알고보니
무지 동안이신거같아요!!
매일 피곤하신데도 그정도면...
피곤한 얼굴 뒤에 초특급 동안 페이스가 숨겨져있나봐요(제가 꿈에서 본 원장님처럼요 ㅋㅋ)
진오비 식구들은 다동안인걸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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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콜!! 무진장 마음에 안 듬.  등록시간 2014-06-18 19:32
오~~무진남말고 무진장 하세요 ㅋㅋ 무뚝뚝한 진오비 원장 ㅋㅋㅋ 콜?  등록시간 2014-06-18 15:03
파운데이션 뒤에 피곤한 얼굴이 숨어 있고 피곤한 얼굴 뒤에 50대 중반의 초라한 남자의 얼굴이 숨어 있죠. ㅎㅎ.그리고 전 차도남이 아니고 무진남입니다. 무뚝뚝한 진오비 남자. ㅋㅋ  등록시간 2014-06-18 00:10
#3 bella 등록시간 2014-06-18 00:43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저도 한 4~5년 전쯤에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가봤는데요. 그렇게 넓게만 느껴지던 운동장이 왜 이렇게 작던지요 ㅋ 꼬마들이 야구연습한다고 열심히 운동하고 한쪽에서는 줄넘기도 하고 하던데.. 저도 그렇게 꼬마였던 시절이 있긴했던건지 잘 생각이 안나더라고요...괜시리 한바퀴 뛰어보고 기웃기웃거리며 어릴때 생각을 해봤던 그날 생각이 납니다.
아 그리고, 원장님의 고백록 팬이에요 ~ 아마 육아등등이 바쁘셔서 다들 댓글을 못달지만 팬들이 많으실껄로 예상됩니다 ㅋㅋ간만에 무궁화호 타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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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a 님도 예전 추억이 떠오르는게 생길 나이가 되셨죠? ㅎㅎ. 지금은 무궁화호가 없지 않나요? 그래서 그 탑리라는 역은 이젠 어떤 열차도 서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중앙선 무궁화호는 굴도 많고 느리게도 가고 지루했죠. 다만 중간 중간에 오는 달걀 파는 아저씨들의 물건 카트에는 궁금한 것들이 참 많이 담겨 있었습니다. ㅎㅎ  등록시간 2014-06-18 00:50
#4 동민 등록시간 2014-06-18 10:57 |이 글쓴이 글만 보기
개구리 잡아 뒷다리를 떼셨다니 생각해보니 중학교 과학시간에 했었던 개구리 해부가 생각나네요. (요즘은 개구리가 희귀하기도 하고 쓸데없이 생명을 죽이는 짓이라 안 한다죠.)  허연 배를 내놓고 큰 대자로 누워있는 개구리 포즈가 어째 사람 같기도 하고~~ 개구리가 불쌍하다면서 엉엉 우는 친구도 있었고 ~~ 처음엔 달달 떨면서 껍질에 가위집 하나 내는거 끔찍해 하다가 한번 자르기 시작하니까 뭐 ㅋㅋ 나중엔 앞다리를 떼 볼까요? 뒷다리를 잘라볼까요? 다들 무감각 해지더군요.ㅎㅎ
아무튼 서울이라도 1960년대는 시골같은 풍경이었겠군요. 잡은 가재는 맛있으셨나 모르겠어요~ 게다가 콧물 수건이라니 ㅋㅋ 아장아장 걷는 심장님 못지않게 코흘리는 초등생 심장님 상상이 안갑니다. ^^
  KTX가 생기기 전에 기차의 순서는 새마을호 - 무궁화호- 통일호- 비둘기호 순이었던것 같은데  모든 역마다 다 서는 완행열차는 통일호 부터 인데요. 무궁화호 정도는 그래도 급이 좀 있는데~ ㅋ 갑자기 통일호 타고 설악산 수학여행, 대성리 강촌 엠티가던 생각도 납니다. 심장님의 성장기는 옛생각을 많이 나게 하는군요! 고로~ 다음글도 기대 됩니다. 우리 모두 완행열차 타고 추억여행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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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어찌 이야기를 일케 술술 풀어내시는지 ㅋㅋ 예술하는 사람은 몬가 다른가봉가?ㅋㅋ  등록시간 2014-06-18 15:06
제가 한참 열차타고 고향가던 2000년대 초반까진 열차들이 살아 있었으니까요. 그때까지만 해도 명절때 표를 못 구하면 무궁화호 입석으로 대구까지 4시간을 서서 갔었습니다. 만원 지하철 탄것 처럼 사람들사이에 끼여서요. 제가 본 비둘기호는 지하철 처럼 좌석이 옆으로 죽 이어진거였고 얼마 후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  등록시간 2014-06-18 11:08
기차의 급에 대하여 잘 아시는군요. ㅎㅎ. 역시 제 기억의 재편이 있었습니다. 저도 무궁화호는 좀 빠른 열차 같은데 그게 맞는지 해서 기차 등급을 확인해 볼까도 했지만 귀찮아서 그냥 썼더니 잘못 썼네요. 정정합니다. 제가 당시 타고 간 열차는 무궁화호가 아니고 비둘기호였습니다. ㅎㅎ. 끔찍하게 느리죠. 여튼 지적 감사합니다.  등록시간 2014-06-18 11:01
5# 보늬맘 등록시간 2014-06-18 18:44 |이 글쓴이 글만 보기
기차길에 대못을 올려두었다는 이야기.. 저희 아버지께도 들었던 거 같은 기억이..ㅎㅎ
저도 어릴때 외할머니댁에 놀러가면 이모부께서 개구리 뒷다리를 구워서 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
초등학교때 뭣도 모르고 주는대로 먹었었는데...ㅋㅋㅋ
세대는 달라도 향수어린 이야기를 읽으며, 제 어린 시절도 회상할 수 있어 좋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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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늬맘님 아버님께서 아마 제 연배이신가 봅니다. 그때는 다 그러고 놀았습니다. ㅋㅋ. 개구리 뒷다리도 맛있고 메뚜기 볶음도 맛있죠. 물론 요즘 젊은 사람들이 보면 징그럽다 하고 기겁하겠지만...여튼 제 글이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니 감사한 일이네요. ㅎㅎ  등록시간 2014-06-18 19:12
6# 로로맘 등록시간 2014-06-19 11:08 |이 글쓴이 글만 보기
60년생이니 저의 아부지, 엄니보다 연하시긴하지만 비슷한 시기긴하네요.ㅋㅋㅋ
저도 심장님의 글에 열렬한 애독자입니다. 하지만 글을 잘 쓰지 못하여 댓글을 잘 못다는 점.. 이해해주세요 :)
너무나도 댓글도 재미지게 잘 쓰셔서 괜히 부끄럽답니다.ㅋㅋㅋ

심장님의 성장기2가 얼른 나왔음 좋겟네요.ㅋㅋ
근데.. 심장님 겨울아이셨네요? 감성적인 겨울아이라서 이렇게 글을 잘 쓰시나봅니다ㅋㅋ 호호.
저는 열정적인 한여름인데, 자정근처에 태어난 돼지라 엄청 게으르다고 엄마가 늘 그러셔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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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아이면 감성적인가 보죠? 겨울에 태어나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고 예전에는 혹시 수요일에 태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해 보았습니다. Wednesday's child. ㅎㅎ.  등록시간 2014-06-19 11:53
7# ennead 등록시간 2014-06-19 12:58 |이 글쓴이 글만 보기
비록 답글은 못달고 있었지만 늘 원장님의 고백록을 열혈구독하며 다음편을 기대했더랍니다~!!
원장님 덕분에 저도 어린시절을 되돌아봤네요. 다들 해보셨을 산에서 아카시아 잎 떼어가며 가위바위보하기~ 산도랑에서 개구리알이라고 건져왔는데 알고보니 도롱룡 알이었고~사루비아 꽃속의 개미도 먹고 꿀도 먹고~ 그러고보니 어릴때 곤충도 벌레도 참 잘 잡았는데ㅠ 특히 섭자리라고 몽돌로된 저희만의 비밀 해수욕 장소가 있었는데 무더운여름날 방과후 찐득해진 몸 그대로 바닷물에 첨벙 뛰어들면 천국이 따로 없었지요~ 촌사람이라 방목하며 자랐네요ㅎㅎ
결론은 원장님의 고백록 애독자가 있으니 이 기세를 몰아 쭈~욱 올려주십사 부탁드린다는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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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달던 답글까지 달아 주시니 부지런히 써서 오늘이나 내일 중에는 반드시 성장기 2를 써서 올려야겠군요. 누구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아련한 기분에 잠기게 마련이죠. 저도 그 시절이 그립군요.  등록시간 2014-06-19 13:40
8# 이연경 등록시간 2014-06-19 19:01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원장님 연세가 아마 저희 엄마랑 동갑이시지않았나요......?? 아니면 저희 엄마랑 아빠 중간에 쏙 끼는 연세인줄 아뢰옵니다 ㅋㅋㅋ 참고로 저희 엄마는 호랭이띠 입니다~ㅋㅋ 개구리 해부... 저도 중학교때 실험하곤 했는데 여중생에게 살아있는 황소개구리를 해부하라고 뛰어다니는걸 주셔서 뒷다리를 잡아서 계단에 쳐서 기절시켰던 기억이 있네요.....윽 .. 옆조는 속이 터졌는지 개구리 배가 부풀어오르곤 했는데ㅜㅜ 마취좀 시켜주시지 생물쌤은 귀찮았나봐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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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그리고 저희 엄마아빠 중간나이 맞으시네요 ㅎㅎ 저희 엄마랑 아빠가 5살차이 이니까 ㅎㅎ  등록시간 2014-06-19 19:10
음.. 그랬군요 ㅠㅠ 그때 황소개구리가 생태계파괴..뭐 이래가꼬 황소개구리를 한자루 잡아놓고 실험시키곤 했거든요 ㅠㅠ 황소개구리라 분명 손발 압정 꼽았는데 막 풀고 도망가고 이랬던 기억도.... 뭐 다신 그걸 겪을리는 없겠으니 이제 추억이네요 ㅎㅎ  등록시간 2014-06-19 19:09
전 쥐띠입니다. 호랑이띠면 저보다 2살 아래이시네요. 개구리 해부는 먼저 마취약물로 마취한 후 하게 되어있는데.ㅠㅠ....요즘은 개구리를 잡기도 어렵지만 동물보호단체의 반대 때문에 안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등록시간 2014-06-19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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