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학창시절 고백록에서 좋아요 한 분과 댓글을 다신 분 합쳐 총 10명이 되어서 약속대로 고백록을 이어서 올립니다. ㅎㅎ)

제가 미술에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 집안이고 외가 쪽이고 미술과는 관련이 있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제 위로 그렇다는 것이고 제 아래로는 제 딸들이나 제 여동생의 조카 둘 모두, 제 남동생의 조카들조차 모두 미술 관련한 학교에 다니거나 다니고 싶어합니다.
반대로 음악이나 체육, 그리고 의사 쪽으로는 위로도 전혀 없고, 아래로도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알 수는 없지만 유전자에 그런 소질이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 보기는 했습니다.
비록 조상들은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것이 드러나기 어려웠을 수도 있으니까요.
학창시절에 미술에 대하여 제가 생각하고 있던 시각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나랑은 관계없는 것, 돈 많은 부자들이나 하는 고급 영역이라는 것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언제쯤인가 고흐라는 화가에 대하여 좀 자세히 알게 된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서점에서 고흐의 인생을 다룬 책을 보고 알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가 평생 한번도 돈을 벌어 보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 가난한 화가였다는 사실이 제게 좀 충격을 주기는 했습니다.
이런 가난한 사람도 그림을 그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그림에 대한 선입견이 좀 바뀌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였을 뿐입니다.
그건 아주 예외적이고  아주 특출난 예전의 화가들 이야기이지 현실에서는 물감이며 도화지며 다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는 생각은 크게 변함이 없었습니다.
화가 이중섭도 돈이 없어 은박지 그림을 많이 남겼다고 하지만 은박지에조차 그림을 그릴 정도의 열정을 아무나 타고 나지는 않습니다.
저희때는 돈 주고 사기 전에는 그림을 그릴만한 깨끗한 빈 종이를 얻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림을 그릴만큼 깨끗한 종이 중에 공짜로 구해 쓸 수 있는 것은 뒷면이 백지인 달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달력은 그렇게 낙서나 그림으로 사용하기에는 아까운 물건이라 책의 겉표지를 포장하는 데  쓰기에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달력을 놓고 동생들과 많이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냥 원래의 표지로 써도 되었을텐데 왜 굳이 달력으로 표지를 싸려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여하튼 달력 한장이면 책을 한권 포장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달력에 그림을 그려 본 사람은 알겠지만 달력은 흑백이든 컬러든 앞면에는 보통 그림이 들어가기 때문에 광택지 계열을 씁니다.
그래서 수채화가 먹지를 않고 색연필도 잘 써지지 않습니다.
만년필이나 볼펜으로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맨질맨질한 달력에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면 손의 놀림에 금방 볼펜으로 그린 그림이 뭉개져서 깨끗하지가 않았을 뿐 아니라  보관도 어려웠습니다.
요즘 같으면 정착제도 쓰고 하여 보관도 가능하지만 그때는 그런 것을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한들 재료가 그리 충분치 않아서 마음껏 그리기 어려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스케치북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아까워서 미술 시간에만 한장씩 아껴서 써야 했으니까요.
제 생각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고흐 같은 화가가 나오지 못하고 에디슨 같은 과학자가 나오지 못한 것은 저는 당시 우리 사회 전반을 감싸고 있던 절약과 근검 정신 때문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별로 많이 쓰이는 말이 아니지만 당시 "엄마 아빠 물자 절약, 집안튼튼 나라튼튼"과 같은 근검 카피는  생활 신조가 아닌 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근검 혹은 절약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아껴야 한다는 것이고 그림이든 아니면 다른 분야에서의 시도이든 실패나 실수를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유명한 말이지만 에디슨이 축전지를 발명하겠다면서 2만5천 번이나 실험에 실패한 것에 대하여 비아냥 거리는 기자에게 에디슨은 “나는 2만5천 번 실패한 것이 아니라 축전지가 작동하지 않는 2만4,999가지 방법을 발견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마 에디슨이 제가 살던 시대에 살았다면 그런 시도를 25000번이나 되풀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몇번 정도 하고서는 아마 아버지에게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바로 무능력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그대로 매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대화가나 시대를 뛰어넘는 과학자의 소양을 가진 사람이 우리나라에 없었기 때문이기 보다는 그런 실패를 용납하는 아니 장려하는 문화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 큰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제가 지금 피카소나 젝슨 폴록 같은 대화가가 되지 못한 것은 첫째 그만한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 어느 순간 두갈래 길에서 이쪽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며 셋째로는 마음놓고 낙서할 종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ㅎㅎ

그래서 미술 시간에 스케치북 한장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제게는  오직 한번에 성공해야 하는 어떤 사명이 주어졌다는 말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고 한번 잘 못 그렸다고 뜯고 다시 그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는데 많은 친구들의 형편이 저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타고난 소질 덕분이었는지 그린 그림이나 진흙으로 만든 조각품들은 매번의  미술 시간마다 항상 미술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미술 시간에 잘 그린 그림들은 대체로 교실 뒤에 걸어두어 며칠간 전시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니까 전 중고등학교 시절 숱한 개인전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전은 아니고 공동의 전시회라고 해야 겠지만. ㅎㅎ
그래서 중고등학교 시절 특출나게 공부를 잘하지 못하고 그저 60여명 중 10등 안쪽의 상위권 정도의 성적인 저는 학교에서 단한번도 반장이나 회장을 맡아 보지는 못했으며 제가 맡았던 감투는 미화부장이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미화부장이라는 것이 요즘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교실을 이쁘게 꾸미고 하는 그러니까 뭐랄까 미술관으로 치면 큐레이터 같은 그런 역할 비슷한 것입니다.
설명이 더 어려운 말이 되어 버렸는데 여튼 그런 역할만 맡았는데 요즘 청소부를 환경미화원이라고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닙니다.
초중고등학교 시절동안 제가 받은 상도 개근상을 빼면 글짓기 상과 미술관련 상이 전부입니다.
우등상은 받아본 기억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 받았던 것도 같기는 한데 잘 기억은 나지 않고 제게 상이라 하면 글 아니면 그림입니다.
이러니까 제 인생의 길이 점점 더 의사에서 멀어지는군요. ㅋㅋ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중학교 3학년 초던가 2학년 무렵인가 기억은 잘나지 않는데 미술반 선생님께서 저를 불러서 이것저것 묻더군요.
가정 형편 등등 뭐 그런 것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요지만 말하자면 저보고 미술 공부를 해서 미대갈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힘껏 개인 교습을 해 줄테니까 한번 해 보겠느냐 뭐 그런 말이었던 것 같은데 저는 원래 가진 선입견--미술은 돈 있는 집 아이들이나 하는 것--도 있고 또 학생때 그림 좀 잘 그려서 교실에 걸린다고 그것이 평생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중고등학교 미술선생님으로 먹고 사는 것이 미술관련 진로의 전부라 알고 있었습니다.
뭐 꼭 그런 것이 성에 안 찼다는 것은 아니지만 집안 형편을 생각했을 때 그런 것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자기의 적성을 살려서 가지 않고 그저 장래 직업으로서 전망만 가지고 대학의 학과를 선택하는 풍조에 대하여 우려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지금은 조금 융통성이 생겼지만 그때는 제게 당면한 최우선 과제는 먹고 살아 남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비열하지 않고 정당한 방법으로 살아 남는 것이기는 하지만 미술은 제게는 많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지금도 저는 미술이든 음악이든 예술을 하는 방법으로 꼭 프로페셔널일 필요가 있나 생각합니다.
아마추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직업으로서 예술을 택하는 순간 많은 제약이 동반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직업으로서의 의사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어떤 치료 행위의 댓가로 돈이 오간다면 하지 않아도 될 치료나 검사를 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기 쉬울 수 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미술가가 먹고 살기 위해 그리기 싫은 극장 영화 간판도 그릴 수 밖에 없듯이 의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생활고로 가족이 거리에 나 앉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걸린다면 10중 9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뻔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의사도 아마추어로 하면 참 좋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답답할 뿐입니다.
여하튼 먹고 살기 위해 그리기 싫은 그림도 그려야 했던 것은 중세 시대의 화가들도 다르지 않았고 대화가인 렘브란트조차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면서 밥벌이를 해야 했다고 하더군요.
그때 그런 것까지 제가 알지는 못했지만 여하튼 화가에 대하여는 당시는 낮추어 부르는 말로 환쟁이라고도 불렀는데 그걸 해서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미술반 선생님께서는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잘 생각해 보라고 하였지만 저는 부모님께 말씀드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미술은 제게는 하고는 싶지만 제게 주어진 운명에서는 욕심을 내서는 안되는, 가질 수 없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에 그렇게 일주일에 한시간에 불과한 미술 시간에 제가 가진 소질과 열정을 발휘하는 것으로 저는 충분히 갈증을 채웠다고 생각하고 크게 미련을 갖지 않았습니다.
나중에서야 그런 갈증이 다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하지도 않았던 듯 한데 아마도 앞글에 말한 방황의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제 사주를 보았더니 역마살과 도화살이 있다고 하던데 어릴 때 한곳에 정착치 못하고 이사를 자주  다녔었고 학창시절 밤마다 뚝방을 헤매고 다니고 나중에 지방 의료원 근무할 때도 여기저기 많이 싸돌아 다녔으니 역마살이 있다는 점쾌는 그리 틀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금은 제 발목에 책임감과 병원경영이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족쇄가 채워져 있어 예전의 역마살이 억눌려 있는 것 뿐입니다.
도화살에 대하여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바람끼라는 것에 대하여는 연애사에 쓴 것을 인정한다면 아주 없는 것 같지는 않고 어쩌면 산부인과 의사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의 도화살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
똥을 싫어하는 항문외과 의사가 없듯이 말입니다.
여하튼 제게 미술이란 먹고 사는 문제도 고려하지 않을 정도로 죽을 정도로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이 자신의 진로를 어떤 쪽으로 잡게 되느냐 하는 것은 철저한 계산에 바탕한 것인 경우도 있지만 그런 철저한 계산도 무시하고 가야 할 정도의 열정이 어느 쪽에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많이 좌우하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의 열정이 있는 사람들은 소질 유무에 관계없이 예체능으로 가게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별 뾰족한 열정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공부 쪽으로 가는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다만 살면서 보니 그림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듯이, 음악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듯이 그저 공부가 그렇게 좋았다는 친구들도 없지는 않더군요.
그러나 대체로 제가 주변에서 만난 사람들로 판단해 보았을때는 인문계 쪽으로 진로를 정하여 공부를 택한 사람들은 예술 쪽에 다소간의 소질과 재주가 있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이기고 그 길로 나갈 만큼의 열정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만일 그때 미술선생님의 조언을 받아들여 공부 쪽이 아닌 미술 쪽으로 진로를 정했다면 어땠을까 가끔 상상해 보기는 합니다.
아마 제 예상대로 어느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미술선생님이 되어 있을지 아니면 한국 혹은 동양을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자뻑 근성으로 말하자면 박수근이나 이중섭을 능가하는 걸출한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럴 가능성은 솔직히 높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역마살과 도화살 두가지 제약 때문에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둘은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쥐약과 같은 것이니까요.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는 예술이란 상당 부분 토해내지 못한 욕망과 갈증을 쏫아 붓는 대상으로서의 것인데 역마살과 도화살로 거리에서 혹은 여자에게 그 에너지를 쏫아 부었다면 아마 걸출한 작품은 고사하고 극장 간판 하나 그리지 못했을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팩트가 뭐냐?
즉 제가 산부인과 의사를 택한 것은 그나마 잘한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ㅋㅋ

중학교 때 어울렸던 세친구가 생각나는데 한명은 그림을 하던 친구고 한명은 성격이 좋던 친구, 한명은 야구부 주장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던 친구는 그때 벌써 유화로 위트릴로의 그림을 그럴싸 하게 모사하여 교실 뒷편에 걸 정도였는데 그 친구는 미대를 갔는지 모르겠군요.
졸업하고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마음 착한 친구는 공부도 곧잘 했는데 역시 소식이 궁금하군요.
야구부 주장을 하던 친구는 제가 교실에서 항상 제일 뒷자리에 앉았었는데 제일 뒷자리는 항상 깡패 아이들 아니면 공부와는 담 쌓은 운동부 아이들 차지였습니다.
저는 운동부도 아니었는데 왜 맨 뒷자리에 앉았나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꼭 뭐를 해야 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그냥 난 좀 별종인가 보다 하는 생각으로 학교와 세상과 약간은 겉도는 그렇다고 문제학생은 아니고 범생이에 가까운 그런 모습으로 지냈습니다.
범생이와 똘아이의 모습은 제가 평생을 가지고 사는 양극단--얼음과 불, 냉정과 열정, 무뚝뚝과 여림--의 모습의 일례라 하겠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TBCOTE.
#2 이연경 등록시간 2014-07-14 16:33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어렸을적이 이렇게 디테일하게(물론원장님의 특기이신 '살붙이기'가 좀 가미되었겠지만요ㅎㅎ) 생각이 나시다니!!!! 저의 어렸을때는 어땠을까요?  고등학교때도 잘 생각안나는데 중학교나 초등학교때라.. 하나도 생각이 안나서 큰일입니다.... 그저 폐지줍는 아저씨꺼인지, 누구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앞에 세워놓은 나무 리어카의 바퀴 굴리기 또는  고무바퀴에 송송 나있는 털;같은 고무 뽑듯이 끊어놓기.. 영웅영화에서 본 한손으로 차 밀기.. 동생이랑 신라면 스프 쫌씩먹고 헥헥거리며 뛰어다니기.... 몇년의 어린시절 놀이중에 생각나는게 몇개없어요.. 불과 몇년; 안되었을텐데요.. 저의 어린시절은 어땠을까~ 한번 생각하게 되네요 ㅎㅎ

댓글

우와...................제가 원장님과 함께 묻어갈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등록시간 2014-07-14 17:19
저도 기억력이 나빠 어릴 적 이야기가 잘 기억이 나지 않고 드문드문 납니다. 그런데 의외로 기억력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얼마전 인터넷 동창모임에서 알게 된 아내의 초등학교 동창은 담임 선생님 이름도 알고 아내가 살던 동네까지 알고 있다더군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연경님과 저는 머리가 나쁜 겁니다. ㅋㅋ  등록시간 2014-07-14 17:18
#3 동민 등록시간 2014-07-16 23:26 |이 글쓴이 글만 보기
ㅋㅋㅋㅋ 심장님의 '나는 왜 미술을 하지 않았는가?'에 관한 고백을 들으니 왠지 저의 경우도 떠오릅니다. 저도 쓰라고 하면 아마 이 고백록 못지않게 디테일 하게 적을법 한데 ^^저도 달력 뒷면에 열심히 그림 그렸고 (주로 인형이랑 인형집 -_-;;;) 달력으로 교과서....는 아니고 커다란 피아노 책을 포장 했었지요. 미화부장을 했었고 당근 미술관련 상 받았고 미술샘이 이것저것 물어본것, 사주? ㅋㅋㅋ 등등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지만 가장 큰 차이가  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을 선택했다' 네요. ^^ 심장님이 미술을 선택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지 :P

댓글

전 머리를 크게 그리진 않았답니다. 그러고 보니 옛날부터 리얼만 추구하는 딱딱한 성격이었던듯 ㅋㅋ 원장님이 미술 선택하셨으면 병원은 아니더라도 미술계 내에서 마주쳤을수도 있었겠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등록시간 2014-07-17 11: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했다. 그게 가장 큰 차이고 중요한 차이죠. 누군가의 삶의 모양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달력에다 머리가 큰 인형을 그리는 동네주민님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제 큰 딸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는군요. ㅋㅋ. 제가 미술을 선택했다면 이미 굻어 죽었겠죠. 물론 그리고 나서 한 몇십년 후에 대단한 작가로 재평가될 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ㅋㅋ  등록시간 2014-07-17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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