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는 신설동에 있는 대광고등학교에 진학하였는데 대광고등학교는 영락교회 재단에서 운영하는 미션 스쿨입니다.
저는 종교가 없지만 먼저 말씀드린 대로 추첨제로 고등학교에 배정이 되었기 때문에 가게 된 것입니다.
학교의 교훈은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라"인데 빛과 소금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고등학교때 매주 듣던 채플과 성경 과목에도 불구하고 저는 종교를 가지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때 가끔 간증을 위해 오셨던 분들이 하신 말씀이 아무래도 인생관이나 가치관 형성에 적지 않게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그런 간증은 한달에 한번씩 전체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서 들어야 했는데 한번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제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강연자는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네덜란드에 유학하며 선진 농업을 배워 와서 우리나라에서 도입하려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귀국하여 김포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오다가 택시가 전복되어 교통사고가 나서 전신에 화상을 입었다고 하더군요.
생명을 건지기는 했지만 손가락이며 발가락조차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이 다 타서 이삼십번의 수술로도 정상적 생활이 곤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배운 농업 기술을 써먹는 것은 고사하고 하루하루 사는 것도 쉽지 않았다더군요.
그래도 집안이 경제적 여유가 어느 정도 있어서 구걸을 하지는 않아도 되었지만 손과 귀까지 타버려 흉한 외모 때문에 밖에 나가 음식을 사먹는 사소한 일조차도 꿈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합니다.
음식점에 들어가려고 하면 거지인줄 알고 돈을 주는 사람부터 재수없다고 쫓아내면서 소금을 뿌리는 사람, 보자마자 우는 아이등등 육체적 고통도 고통이지만 정신적 고통이 심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그래도 위안을 삼고 감사하게 생각한 것은 양쪽 귀가 타서 없어지고 밋밋한 옆얼굴에 구멍만 나 있을 뿐이었지만 다행히 머리카락 일부가 남아 머리를 길러 귀를 가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
대변을 보고도 자기 손으로 변을 닦을 수 없어 아내가 일일이 닦아 주어야 해서 괴롭지만 아침마다 변을 시원하게 볼 수 있으니 또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렇게도 말하더군요.
사실 그런 상항에서 감사하다는 마음이 어찌들 수 있을까 싶어 그분의 말이 그리 진실되게 와 닿지는 않았지만 그가 자살하지 않고 살아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혀 그런 마음이 없지는 않은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분을 보고 정말 삶이 저렇게 쉽지 않은 분도 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최선을 다하는구나 싶어 사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 그런 도움되는 강연도 있기는 했지만 매주 한번씩 성경 시간에 별로 설득력없는 교목(학교 전담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목사님은 인간적으로 그리 존경할만한 품성은 아니었습니다.
헌금을 자주 강요했고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비열하고 좋지 않아서 인간으로서 평균 이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 대하여 저는 신앙심이 두터운 학급 동료들과 논쟁도 많이 했는데 그 친구들은 그릇을 보지 말고 안에 든 물을 봐야 한다더군요.
목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단점이 있으니 그걸 보지 말고 종교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 친구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그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가난한 집조차도 깨끗한 물을 더러운 그릇에 담지 않으며 깨끗한 그릇에 담거나 최소한 있는 그릇이라도 깨끗이 닦아서 쓰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릇이 더러우면 결국 물도 더러워지기 때문인데 너희들이 믿는 전지전능한 하느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더러운 그릇에 자신의 깨끗하고 큰 뜻을 담느냐고 따졌던 것 같습니다.
그외에도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숱한 의문들에 대하여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마다 종교적 논쟁을 벌이고는 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처럼 종교란 이해와 설명의 대상이 아니며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을 받아 들여서 지금은 그런 주제로 종교인들과 논쟁을 벌이지는 않습니다.
그저 믿어서 해롭지 않고 다른 이들에 대하여 배타적이지만 않게 하면서 종교를 가지고 세상을 좀더 선하게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그것도 괜찮다는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을 무신론자라 하지 않으며 신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비신론자라고 말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저는 신을 믿지 않지만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 믿는 사람들을 반대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 아이들에게는 교회 다니고 싶으면 다니라고 말하는데 체질에 맞지 않는지 다니지는 않더군요.
그러나 이런 정도의 저는 그래도 봐줄만한 것이고 제 절친 한명은 아예 목탁 가지고 다니면서 성경 시간에 목탁도 두드리고 그랬습니다.
물론 그 친구는 불교를 믿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를 믿는 것도 아니면서 반발심에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가 피아노를 잘 쳐서 학교 행사에서 피아노 연주할 일이 있으면 연주를 담당했었고 그 친구 아버지가 고위 공무원이라서 학교에서도 함부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을 제가 어떤 모습으로 지냈는지는 수학 여행갈 때의 에피소드를 들려드리면 확실하게 감이 오실 것입니다.
고2때 경주로 수학 여행을 갔는데 기차를 타고 가는 중간에 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갔다 왔더니 제 자리에 다른 동급생이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황당한 마음에 그 친구에게 조그만 목소리로 뭐라 했는데 그 친구가 얼굴이 하얘지면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비켜 주었다고 하더군요.
기차는 자리가 모자라서 서서 가거나 중간 통로에 앉아 가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아마 그 친구가 빈자리가 있어서 앉았었나 봅니다.
아니 그 친구는 학교에서 깡패로 유명한 친구로 요즘으로 하면 소위 일진이라고 하는 친구였습니다.
그러니까 빈자리가 있으면 마음대로 여기고 저기고 앉고 그랬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도 다른 친구들은 그 친구에게 함부로 말하거나 대들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그때 저는 왜 그렇게 겁없이 행동했는지 모르지만 저는 제 자리에 누가 앉았다는 것이 화가 많이 났었나 봅니다.
여하튼 그 친구가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어서 서로 얼굴을 붉히거나 주먹 다짐이 오가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제가 흡사 불량 학생 같은데 저는 학창 시절에 단 한번도 주먹다짐을 하면서 싸워 본 적이 없습니다.
싸워 보지를 않았으니 잘 싸우는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따로 싸움 기술을 배우지 않았으니 아마 싸움에는 젬병일 것입니다.
저는 기억도 잘 안나지만 나중에 친구--목탁을 치던 제 절친--의 말을 들으니 제가 조용한 말로 그 깡패 친구에게 "너 죽을래?" 그렇게 말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보통의 경우라면 오히려 제가 흠씬 두둘겨 맞았을텐데 역시 나중에 친구에게 들으니 학교 안에서는 제가 무슨 성인 조폭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친구라고 소문이 나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학교의 조무래기 깡패가 아니라 전문 폭력 조직에 몸담고 있는 아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그 친구가 그렇게 조용히 자리를 비켜 준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ㅠㅠ.
아마 제 얼굴의 흉터 때문에 그랬나 본데 전 물론 그런 조폭의 조자도 모릅니다.
그래서 학창 시절 내내 단 한번도 제 도시락이 건드려 본 적이 없고 (뭐 부실해서 뺏어 먹을 반찬도 없었기는 하지만) 무슨 삥 뜯기나 그런 것을 안 당했었나 봅니다.
제가 살면서 흉의 덕을 본 것은 아마 그런 종류 뿐일 겁니다. ㅎㅎ
저는 얼굴의 흉 말고도 몸에 상처가 많습니다.
자세히 보신 분들은 없겠지만 손목, 팔뚝, 종아리 등등에 흉이 많습니다.
무슨 다른 이상한 이유로 그런 것은 아니고 대학교 때 친구 만나기로 했다가 매점의 유리를 못 보고 빈 유리인줄 알고 유리를 박차고 들어갔다가 큰 유리에 팔을 베였다거나 한 밤 중에 자전거 타면서 차가 거의 없는 대로를 눈을 감은 채 전속력으로 패달을 밟고 달리다가 길 중간에 쌓아 놓은 모래를 들어 받고 넘어져서 다쳤다거나, 역시 어두운 밤에 자전거를 타다가 트럭이 차도 쪽으로 문을 갑자기 열어서 그대로 들이 받고 넘어져 다치면서 기절했다거나, 어릴 때 높은 시소 타다가 반대편 아이가 갑자기 시소에서 뛰어 내려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다거나 하는 등등의 사고로 인한 것들입니다.
나중에 어머니께서 용하다는 점집에 제 점을 보러 갔더니 이 아이는 몸에 상처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아이의 목숨을 부지시켜 준 것이고 원래는 명이 원래 짧은 사람이다. 그런 액땜 덕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라고 말했다더군요.
다행히 요즘은 그렇게 사고로 다쳐 상처를 남기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사고로 인한 액땜 효과가 없어졌으니 이젠 얼마 안 남은 것일까요? ㅎㅎ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도 역시 별로 없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공부가 중요한 시기이다 보니 공부와 관련된 2개의 기억을 풀어 봅니다.
하나는 고3때 여름 방학때 영어 정복하겠다고 수원에 세마대라는 정자가 있는 작은 산의 절에 들어가서 한달간 공부하던 일입니다.
저희 때는 국영수 3과목의 본고사와 국영수를 포함하여 국사, 지리, 물리, 지학, 세계사 등 여러과목의 객관식 문제를 푸는 예비고사라는 두번의 시험을 쳐서 대학에 들어가던 때였습니다.
예비고사가 요즘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것이고 본고사가 요즘의 논술고사쯤 된다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그러니까 고3 여름 방학이면 이미 국영수 본고사 준비는 얼추 끝나고 예비고사를 위해 문제집을 열심히 풀어야 할 때입니다.
그럼에도 영어책 두권만 달랑 들고 절에 들어간다는 것은 참 한심한 일이지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국영수 3과목 중 하나라도 잘 못하는 과목이 있으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명문 소위 SKY(서울대 고대 연대)에는 들어 갈 수가 없었는데 저는 영어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외가 지금보다 더 성행할 때였기 때문에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과외를 받지 않은 아이들은 영어 같은 과목은 잘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학 시험은 어쨋든 간에 영어랑 끝장 보자는 생각으로 성문종합 영어라는 책과 1200제라고 해서 조금 수준이 높은 책해서 달랑 두권, 영한사전, 빈 노트 몇권, 볼펜 몇자루를 들고 절에 들어 갔습니다.
그 절은 고시를 준비하는 형들이 숙식하면서 공부하는 그런 절이었는데 제 먼 친척 형이 소개해 주어서 가게 되었습니다.
산 꼭대기에 있는 절이고 TV는 고사하고 전기가 들어 오지 않는 곳이라 밤에는 촛불을 켜고 공부를 해야 해서 공부하고 밥먹고 X싸고 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게 없었습니다.
유일한 놀이가 세마대 정자에 올라가서 수원 시내 내려다 보는 것이었습니다.
거기 있는 동안 어머니께서 여동생과 함께 부침개등을 만들어 오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여기까지 왔냐고 하면서 앉지도 못하게 하고 그대로 내려 가시라고 했습니다.
결국 어머니와 여동생은 두어시간 산을 올라오셔서 힘드셨을텐데도 자리에 앉아 편히 숨도 돌려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돌아 가셨습니다.
전 제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죄송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때 영어책 두권을 다 외워서 내려온 덕분에 그 후 영어는 회화는 안되도 문법과 작문, 독해는 되더군요.
그 이후 영어 성적도 어느 정도 상위권으로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 때의 책은 촛농이 묻어서 원래의 책보다 두배는 무거워졌던 것 같은데 가보로 가지고 있으면서 나중에 제가 결혼해서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으면 그걸 보여 주면서 독려라도 하려 했지만 몇번 이사 다니면서 없어졌습니다.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도 그때 몸으로 깨달았습니다.
그 절에서는 밥 시간이 되면 스님께서 목탁을 치시면 학생들이 절의 제일 큰 방으로 모여서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언젠가는 칠월 칠석날이 되어서 많은 신도들이 오는 바람에 스님께서 하루 종일 목탁을 치시더군요.
식사 시간을 알리는 목탁 소리에 길들여진 때문에 그날은 하루 종일 배가 고파서 혼났습니다.
그리고 학교 다니면서 목사님께 느꼈던 한심스러움을 절에서도 느꼈습니다.
한마디로 그 절의 주지 스님이 똘중이어서 혼자 버터도 밥에 비벼먹고는 했는데 엄청 부럽더군요.
어느날은 절에서 키우던 흑염소가 병으로 죽은 탓에 흑염소 탕도 거기서 처음 먹어 봤습니다. 물론 스님도 함께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조계사에서 법란인가 뭔가 하여 중들끼리 대규모로 패 싸움도 하고 그랬던 모양인데 맨날 각목 들고 서울로 가고는 하더군요.
그때 저는 종교인이라는 것도 그저 사람이 사는 모습의 하나일 뿐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고 진짜 종교란 절이나 교회 혹은 성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이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도 수도 없이 읽었고 강론도 지겹도록 들었고 심지어는 신자도 아니면서 성당에 몰래 들어가 무릎 꿇고 기도도 올려 보고 불경도 적지 않게 읽어 봤지만 거기서는 제가 찾고자 하는 답--사람은 왜 사는가--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답을 찾는 중이고 죽을 때까지 못 찾고 가겠지만 새벽 3시에 폐지를 주으러 다니시는 허리 구부정한 할머니의 등에서, 머리에 물이 차는 선천성 기형 때문에 하루 종일 방에 누워 있지만 맑고 깨끗한 눈동자로 저를 보던 어느 수두증 소년의 눈에서, 자살시도의 흔적으로 손목에 숱하게 그어진 상처를 제게 보여주던 어느 직원의 얼굴에서 어렴풋이 제가 찾는 답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하나의 기억은 고3때 일인데, 어느 날인가 점심 시간이 지나서 들어오니 제 책상이 누군가가 뒤져서인지 다 헝클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반에서 항상 2등을 하던 친구가 그 앞전의 모의고사에서 갑자기 3등으로 떨어져서 누가 2등을 했나 찾고자해서 였습니다.
항상 1등을 하던 친구는 역시 저처럼 재수해서 서울의대 들어간 친구가 차지했고 문이라는 친구가 여지껏 2등을 뺏긴 적이 없었는데 2등을 뺏겨서 아무리 찾아도 2등이 나오지 않자 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도저히 없자 제 책상까지 뒤져 성적표를 확인했던 것입니다.
물론 제가 60명 학생중 한자리수 상위권에 속하기는 했지만 제가 공부를 어느 정도 한다고 생각한 친구는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맨날 뒷자리에서 운동부 아이들과 어울리고 성인 조폭 세계에 발 담군 것으로 아는 아이가 설마 상위권 성적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때 그렇게 성적이 알려지고 그 뒤 제 책상을 뒤졌던 친구가 학원의 파이널 코스도 함께 듣자, 스터디 그룹도 만들어 함께 공부하자고 제게 제안했지만 저는 제가 하던대로 그냥 혼자 쭉 그렇게 지냈습니다.
예비고사는 1978년 12월에 쳤었는데 설사병으로 밤새 잠을 못자서 뜬 눈으로 시험을 치러 갔습니다.
첫과목은 국어와 국사인가 그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종료 한 10분 남겨두고 OCR카드에 답을 옮겨 적기 시작했습니다.
다 작성한 줄 알았는데 OCR 카드의 빈칸이 꽤 남아서 어찌된 일인가 살펴봤더니 국사의 뒷 장 한페이지를 그냥 풀지 않고 두었더군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시간도 없어 눈물을 머금고 문제도 보지 않고 그냥 제가 좋아하는 3번에다 죽 표시를 하고 제출했습니다.
그 다음 시간의 시험은 어떻게 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나중에 성적을 받아 보니 예상대로 엉망으로 나왔더군요.
예비고사 점수가 전교에서 몇등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는데 아마 한 10등 전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때 전교에서 1등한 친구는 재수하지 않고 서울의대 들어갔고 저희 반에 1등하던 친구와 저는 재수를 하였습니다.
반에서 3등했던 그 친구는 서울대 농대를 들어갔다가 나중에 재수인가 삼수를 하여 서울대 치대에 들어갔습니다.
참 그때는 10반 중에 문과가 총 4반에 우반이 1반, 열반(그때 저희들끼리는 똘반이라고 불렀습니다. ㅋㅋ)이 3반이었고 이과가 총 6반에 우반이 2반, 열반이 4반이었는데 아마 지금은 그렇게 학급을 우열반으로 나누고 하면 학생들이나 부모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하튼 담임 선생님께서는 제 예비고사 성적을 감안하여 서울대 수의대나 연세대 식품영양학과가 안정권이니 거기 지원해 보라고 하더군요.
저는 떨어져도 좋고 본고사도 있으니 연세대 의대에 지원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선생님께서는 가능하면 서울대 수의대를 지원하도록 권했고 그건 지금도 그렇겠지만 서울대에 몇명이나 들어갔는가 하는 것이 그 학교의 수준을 나타내 주는 지표로 여겨져서인 점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뒤로 다시 학교에 가지 않았고 본고사는 치루지 않았습니다.
졸업하고 바로 종로 학원에 등록을 했습니다.
당시는 종합반 학원은 종로 학원이 제일 수준이 높았고 그 아래에 정일학원과 대성학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지금도 있나 모르겠습니다.
서울역 근처에 있던 종로학원 다녔던 것에 대한 기록은 별 것은 없지만 다음 편에서 써야겠군요.
TBCO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