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학원은 그야말로 공부를 위해서만 운영되는 공부 공장 같은 곳이었습니다.
한반에 약 100명의 학생들이 좁은 교실에서 하루 종일 공부만 했습니다.
흡사 양계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른 놈부터 먼저 도축된다는 법칙이라도 있는지 조금이라도 모이를 더 먹으려 애쓰는 닭들처럼 모두는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이라는 모이를 죽기 살기로 쪼았습니다.
수업이 저녁 7시 쯤 끝나면 싸온 도시락을 먹고 자습실에서 자습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은 중랑구가 된 묵동에서 서울역까지 학원에 가는 시간만 한시간 이상 걸렸습니다.
등하교 시간이 아까워서 4월인가 5월 쯤에는 서울역 근처 허름한 집에서 한달 정도 자취도 해 보고 또 하숙도 해 봤는데 방이 하도 더럽고 빈대도 너무 많아서 결국 포기하고 대부분의 기간 동안 집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바꾸어 타면서 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때 자취하면서 빈대라는 벌레를 처음 봤는데 등짝 뻘건 것들이 천장에 붙어 있다가 이불위로 뚝 떨어져서 다리나 등을 물면 그렇게 가려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없는 형편에 자취방까지 얻어주신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자취까지 했다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대신 오고 가는 시간 동안에는 영어 숙어나 단어를 손바닥과 팔뚝에 볼펜으로 한 50개 정도씩 새까맣게 써서 다니면서 외우곤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미친놈 보듯 힐끔 거려도 별로 개의치 않았습니다.
제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독불장군, 혹은 돈키호테처럼 지내게 된 것에는 그 시절의 습관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지금이야 휴대폰이 있어 그런 짓을 안해도 되겠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고 그렇다고 책이나 사전을 펼치기에는 지하철이나 버스에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새벽에 집에서 도시락 2개 싸서 나와서 밤 늦게 들어가는 생활을 몇달 쯤 하니 몸이 골았는지 어느 날은 버스를 타고 등원하는데 속이 너무 울렁거려서 토하고 버스 바닥에 쓰러진 일이 있습니다.
그때 어떤 아주머니인지 아가씨인지가 잘 모르겠는데 누군가 저를 일으켜 세워주고 손수건을 꺼내서 닦으라고 주더군요. 정류장이 아닌데도 버스도 바로 세워서 저를 내리게 해서 병원에 가라고 해서 손수건 들고 내렸던 기억이 나는데 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남한테 해가 되는 것은 가급적 하지 않고자 노력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은 제가 힘들었을때 도와 준 그런 마음 따스한 분들에 대한 기억이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저도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손잡고 일어날 수 있는 지지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때 잠깐 했었던 것 같습니다.
글을 쓰면서 보니 버스 관련으로 사고가 또 있었네요.
한번은 등원하는데 시간이 늦어서 버스가 막 떠나는 참이라 열심히 달려가서 버스 문의 손잡이를 잡았습니다.
지금은 그러지 않겠지만 그때는 버스가 문을 연채 출발하면서 서서히 문을 닫고는 했는데 한번 버스를 놓치면 또 이십분 이상 기다려야 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치면 안되었습니다.
저는 버스의 문 손잡이를 잡으면 버스가 설 줄 알았는데 버스 기사가 저를 못 보았는지 그대로 버스가 가속도를 붙이는 바람에 손잡이를 놓치고 달리던 버스에서 떨어져 차도에 내동댕이 쳐졌습니다.
떨어져 버스 뒷 바퀴에 깔렸거나 뒷차에 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는데 다행히 그렇게 되지는 않고 비가 온 날이라 물이 조금 고였던 웅덩이에 떨어졌습니다. 덕분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고 그저 팔꿈치만 조금 까졌습니다.
제가 떨어지는 것을 버스에 탄 사람들이 보았는지 버스가 급히 서고 운전 기사와 사람들 몇명이 내려서 저를 부축해서 버스에 태웠습니다.
저는 가방을 챙겨서 물에 젖은 몸을 일으켜 버스를 탔습니다.
그때 아마 꽤 아팠을 거 같은데 저는 버스를 놓치지 않고 탔다는 생각, 쪽팔리다는 생각에 아픈 것도 못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병원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운전 기사 아저씨 보고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운전하여 가라고 하였지만 저는 까진 것 말고는 딱히 다친 곳도 없는 것 같고 그리고 빨리 학원에도 가야 했기 때문에 병원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상처는 오른쪽 팔꿈치에 흉터로 남았는데 지금 보니 상당히 희미해 졌네요.
종로학원 1년 다니는 동안 친구도 없이 주로 혼자서만 공부했는데 자습실에서 공부하면서 나중에는 맨날 보는 같은 얼굴들이 있고 또 나름 실력이 있어 보이는 학생들이 있어 친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수학에 대하여 특히 저와 문제 풀이 방법을 놓고 새로운 해법을 찾았다고 자랑하기도 하고 아주 어려운 새로운 문제를 서로 만들어 내서는 풀기 경쟁도 하던 친구는 서울대 의대에 같이 입학을 했습니다.
그 친구는 나중에 졸업할 때 아내 옆에서 함께 사진도 찍었던 친구로 지금은 서울의대 약리학 교수로 있습니다.
이제는 동창회도 안 나가고 하다 보니 만난 지가 오래되었군요.
1년간의 재수 기간 동안 다른 친구들은 미팅도 하고 나름 재미있게 보내던데 저는 정말 공부만 해서 별달리 기억나는 것은 없습니다.
제 인생 중에 암울한 시기 중 하나입니다.
심적으로도 고통이 적지 않았던 시기이고 없는 형편에 그냥 아무 대학 공대나 가라시던 아버지 말씀도 어기고 재수까지 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와는 상당히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고3때인지 재수할 때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한번은 무슨 일인가로 제가 아버지께 대들어서 너 같은 놈은 대학 나와 봤자 안되고 공부할 필요없다고 하면서 책을 다 찢어 버리셨던 기억이 납니다.
교재와 참고서를 다 찢어버리셔서 한동안 찢어진 교재로 공부하느라 상당히 불편했습니다.
지금도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데 그게 꼭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니 뭐니 하는 것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대체로 다른 집들도 보니 아들과 아버지는 사이가 썩 좋지는 않더군요.
지금도 저는 제 아이들 중에 아들놈과 사이가 제일 안 좋습니다.
그렇게 어찌어찌 공부를 해서 그해 겨울 두번째 예비고사를 쳤습니다.
시험이 그렇게 어렵게 나온 편은 아니었는데 역시 점수는 좋지 않았습니다.
전국 석차는 한 1000등 정도 한 것 같은데 당시 서울대 의대는 정원이 160명이었지만 다 의대만 가는 것은 아니고 자연대도 있고 공대도 있기 때문에 전국 석차 500등 정도면 지원할만하다고 말하던 때라서 제 등수로는 연대 의대를 지원하는 것이 안정권이었습니다.
물론 본고사가 있기는 했지만 본고사라고 꼭 잘 친다는 보장도 없었으니까요.
어디를 지원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등록금에 대한 고려, 그리고 학벌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제 욕심, 남 눈치 안보고 연구하면서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무엇보다 최고 인기 학과라는 생각(당시 서울대 의예과가 자연계 중 1순위로 최상위의 커트라인이었습니다)이 뭉뚱그려져서 서울 의대(서울대 자연계열 의예과)에 지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제가 성격이 모 아니면 도인 성격이라 어중간한 것을 싫어하거든요. ㅋㅋ
그리고 만일 떨어지면 후기에 있는 성균관 대학 법대로 과를 바꾸어 지원하고 사법 시험이나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때 그렇게 되었다면 어땠을지 저도 좀 궁금하기는 합니다.
법대는 가게 되었을지, 사법시험은 붙게 되었을지, 붙었다면 변호사를 하고 있을지 뭐를 하고 있을지, 지금 봐서는 저는 검사했으면 의사보다는 잘 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
여튼 제 고등학교 졸업 동기 중에는 의과대학 쪽으로는 전교 1등하던 친구가 바로 서울의대 들어갔고 저희 반에서 1등하던 친구와 저는 둘이 서울 의대 지원하였으며 다른 친구들은 연대 의대를 많이 갔습니다.
대광고가 연대 동문들이 많아서 연대 쪽으로 많이들 가는 편이었습니다.
본고사 때의 일은 어디선가도 썼던 것 같은데 지금도 그날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다행히 그 당시 서울의대 경쟁률은 1.2:1인가로 해서 별로 높지는 않았습니다.
160명 정원에 아마 200명쯤인가 지원했던 것 같습니다.
첫 시간이 국어인가 그랬고 두번째가 영어, 그리고 마지막이 수학인가 그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쩌면 순서가 틀렸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수학을 제일 잘해서 그 과목에서 점수를 따야 한다고 생각했고, 국어는 중간이나 가능하면 살짝 그 이상, 영어는 못하는 편이니 점수만 많이 까먹지 말자 그런 생각으로 시험에 임했습니다.
계획대로 국어는 그런대로 쳤고 영어는 잘 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리 큰 실수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시험인 수학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습니다.
예비고사에서 커트라인 점수에서 몇점 모자란 것도 있어서 그것도 만회해야 했습니다.
수학 문제는 총 6문제가 나왔는데 예년의 경우를 보면 보통 반정도 맞으면 합격권이었습니다.
저는 나름 수학에는 자신이 있어서 먼저 종로학원 다니던 친구와 수학 문제로 서로 경쟁도 하면서 수학에 관해서라면 저희 둘이 전국에서 최상위권일 것이라고 자만하고는 했었습니다.
그래서 문제집도 가장 어렵다는 "경향과 대책"이라는 책을 보았는데 그 책은 동경대학을 포함하여 일본 여러 대학의 어려운 수학 문제들만을 모아 놓은 책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역시 어려운 편인 해법수학이라는 참고서만 봤는데 당시 대부분 학생들은 수학의 정석이라는 책을 보는 편이었습니다.
주어진 100분인가 한시간인가의 시간에서 불과 이십여분이 남을때까지 저는 한문제도 못 풀었습니다.
정말 온갖 생각이 다 나더군요.
제일 많이 든 생각은 "내가 지금 뭐가 씌였다. 그동안 그렇게 어려운 문제들도 숱하게 풀었는데 이런 간단한 문제에 왜 아무런 해법이 떠오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정말 제 머리 속을 누군가 지우개로 싹 지운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안타까워하실 어머니의 얼굴도 떠오르고..
잠시 연필을 놓고 눈을 감았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별 거 아니다. 떨어지면 후기 대학에 가서 다른 방향으로 도전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다시 보았습니다.
그저자 해법이 어렴풋이 보이는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간신히 한 문제를 풀었습니다.
하나를 풀고 나니 좀 자신감이 있어서 다른 문제는 그냥 얼핏 답일 것 같은 숫자를 무대뽀 방식으로 하나씩 대입해 보았습니다.
딱 맞아 떨어지는 숫자가 하나 나와서 답을 적었습니다.
물론 풀이 과정은 없었습니다.
당시 문제는 답이 50%, 풀이 과정이 50%의 점수였기 때문에 저는 추측하기로는 6문제중 한문제 반을 맞추었을 것입니다.
종료 벨이 울리고 답안지를 거두어 갈 때 저는 정말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다른 친구들은 어땠는지 싶어서 말이죠.
특별히 제게만 뭐가 씌인 게 아니라면 저에게만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바로 앞에 있는 친구의 답안지를 봤습니다.
빽빽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답안지의 70% 쯤 공간은 채웠더군요.
저는 20% 쯤 채웠는데 말이죠. ㅠㅠ
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략 과목에서 다른 친구들은 반 이상 썼는데 저만 그 반의 반 밖에 못 썼으니까요..
합격자 발표는 기다려 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집에는 전화를 했는지 어땠는지 기억은 안나는데 아마 전화했다면 떨어졌으니까 기대하지 마시라고 말했을 겁니다.
그래서 합격자 발표 전에 있는 신체 검사에도 안 가려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그때는 합격자 발표도 하지 않고 신체 검사부터 먼저 하더군요.
저는 관악 캠퍼스에서 하는 신체 검사도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친구들과 고려대학 근처에서 당구를 치면서 시간을 떼웠던 것 같습니다.
신체 검사에 가지 않으면 물론 불합격이었죠.
친구들은 "그래도 한번 가봐.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거잫아" 하며 제 등을 떠밀어서 저는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신체 검사장에 갔습니다.
신체 검사에 가기는 갔지만 무슨 기대를 크게 한 건 아니라 합격자 발표장에도 역시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친구들이 전화를 걸어 합격했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그해 수학 시험이 난이도 조정에 실패하여 담당자가 문책되었다던가 하더군요.
서울 공대 지원자 중에는 50%가 수학이 0점이었고 의대는 한문제만 완전하게 풀면 합격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변별력이 너무 떨어져 합격자 산정에 어려움이 있을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그때 제가 봤던 답안지의 주인공, 바로 앞의 친구는 그해 서울대 전체 수석을 한 친구로 나중에 입학하여 바로 제 앞 번호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 친구들은 저처럼 한문제 정도를 가까스로 풀었을까 말까 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합격하였다는 소식은 어머니께 제일 먼저 알려드렸고 효도라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번 해 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제가 어머니께 한 마지막 효도이기도 했지만.....
TBCO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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