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저는 재수를 해서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서울대학은 1/3 정도가 재수생이고 나머지가 현역(재수하지 않고 바로 진학한 학생을 속어로 그렇게 불렀습니다.)이었으며 재수생 중에는 종로학원 출신들이 제일 많았습니다.
지금도 그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론에서는 매년 2월이면 서울대에 많이 진학한 학교들의 명단을 발표하고는 했는데 학원까지 치면 종로학원이 1등일 겁니다.
저는 재수함으로써 다른 친구들보다 1년 시간이 늦어졌지만 긴 인생에 1년쯤 재수하는 것은 그리 아까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년 늦기는 했지만 대신 인생의 쓴맛도 보고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아서 얻은 것이 많습니다.
제 성격이 지금도 오만하기 짝이 없지만 그나마 조금이라도 겸손한 부분이 있다면 그 시절에 얻어진 것일 겁니다.
대신 손해인 점도 있는데 장남인 제가 제수를 함으로써 제 아래 두 동생 모두 입시에서 재수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역시 가정에서든 어떤 분야에서든 앞서가는 사람이 첫길을 어느 쪽으로 내느냐가 중요합니다.
순조때 이양연이라는 사람이 쓴 한시로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도 자주 인용하셨다는 문구 "눈길을 걸을 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말라. 오늘 내가 밟고간 이 발자국이 뒷사람이 밟고갈 길이 될테니."하는 말도 그런 의미겠지요.
제 바로 아래 여동생은 이대 경영학과에, 막내 남동생은 연대 경영학과에 진학하여 제 대학 동문은 저희 집에는 없습니다.
남동생은 재수하여 제 대학 동문이 되는가 했더니 재수하여서도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한 케이스입니다.
제 큰 딸은 재수해서라도 원하는 대학에 가기를 바랐으나 그러지 않고 그냥 제 여동생의 후배가 되었습니다.
서울대 의대는 예과 2년은 관악 캠퍼스에서 강의를 듣고 본과 4년은 동숭동 캠퍼스에서 강의와 실습을 받습니다.
예과 2년 동안은 국문학, 물리학, 유기 화학등 인성과 관련한 기초 교육과 자연계열 전공자들을 위한 필수 교과목에 대한 수업을 받았습니다.
다니는 2년동안 별로 기억에 남는 일은 없고 다만 집과 학교가 멀어서 등교에 많은 시간이 걸리기는 했습니다.
예과때는 장OO, 류OO, 서OO와 저 4명이서 항상 함께 수업도 듣고 몰려다녔는데 앞의 두 친구들은 모두 부산 친구들이라 졸업하면서 지방으로 내려 갔고 한 친구는 지금은 삼성의료원에서 근무하는데 서로 얼굴도 못보고 지낸지가 오래 되었군요.
의과대학에서의 예과는 별로 부담이 없고 수업도 많지 않아서 친구들과 당구도 치고, 동생 친구들 과외도 하고 하면서 다른 대학생들처럼 평범하게 보냈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미팅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들었지만 그때는 대학생의 전유물 중 하나가 미팅이고 소위 고고장 같은 곳에 가는 것이었는데 그런 것들도 주로 예과때 즐길 수 있는 것들입니다.
저는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미팅은 한 적이 없고 제 여동생 친구의 부탁으로 미팅을 주선해 본 적은 있습니다.
소개팅은 딱 한번 받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만났던 여학생에 대하여는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저를 연애박사처럼 오해하는 분이 있을까봐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여자와의 관계 맺기나 사귐 등에는 사실 관심도 없고 재주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자만을 진료하는 산부인과 의사가 된 것은 참 미스테리한 일입니다. ㅋㅋ
여튼 지금은 저희 병원이 있는 홍대쪽이 젊은이들의 놀이터로 유명한가 본데 당시에는 젊은이들이 자주 가는 무도회장은 종로 2가 주변에 많았습니다.
입시 학원들도 그 주변에 많았었구요.
코파카바나니 뭐니 하는 곳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저는 워낙 몸치이기도 하고 노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가본 기억은 몇번 없습니다.
본과 시절은 고등학교때의 교육과 비슷했습니다.
예과때는 과목별로 강의실을 찾아다니면서 수업을 들었지만 본과때는 같은 강의실에 교수님들이 오셔서 강의하는 식이었고 실습 교육은 의과대학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병원에 가서 받았습니다.
본과는 1학년과 2학년때는 기초 학문인 해부학, 병리학, 생리학, 조직학, 약리학, 미생물학, 발생학, 유전학 등의 과목을 배우고 3학년과 4학때는 임상 과목인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이비인후과,정신과 등등 알고 계시는 여러 진료 과목들을 모두 배웁니다.
그 중에서 의과대학 공부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학문인 해부학은 본과 올라가서 3, 4월에는 강의 위주로 교육을 받고 라일락이 피는 5월 쯤에 처음으로 실습 교육을 받게 됩니다.
해부학 실습은 모형을 이용하여 하는 것은 아니고 카데바라고 하여 실제 사람의 시신을 가지고 합니다.
이때 많은 학생들이 적성에 맞지 않아 자퇴하거나 휴학을 하는데 그런 학생이 보통 한학년 160명 중 10%쯤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끼리는 그런 현상을 라일락이 필때라서 "라일락 신드롬"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도 사람의 시신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그리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포르말린에 오래동안 저장해 놓기 때문에 실습하는 동안에는 눈이 따가워서 상당히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예민한 친구들은 기절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시신 해부실에서 시신을 앞에 두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할 정도로 다들 무덤덤해집니다.
해부학 실습을 하면서 인간의 적응력이 참으로 놀랍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시신 해부 실습은 사람이 대칭이라 한쪽을 4명이 한조가 되어 실습을 했습니다.
이런 시신들은 시신을 기증한 분들이거나 혹은 무연고 시신인 경우라고 들었는데 저희 대학은 국립대학이다 보니 대부분 한조가 4명으로 한 학년당 20여구의 시신을 가지고 비교적 여유 있게 실습을 했지만 그렇지 못한 대학들도 많아서 수십명이 한구의 시체를 멀리서 보면서 공부하는 곳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대부분 시신은 나이가 들어 노환으로 돌아가셨음직한 경우들이지만 목에 줄 모양의 사반이 있는 젊고 건장한 시신으로 사형수로 생각되는 시신도 있고 젊은 나이의 시신도 가끔 있었는데 그런 시신을 보면 무슨 사연으로 왜 죽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안타까운 마음이 잠시 들기도 했습니다.
해부학 실습에서는 누가 정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책을 펴고 가이드 역할을 하는 친구, 칼을 들고 직접 해부를 하는 친구, 옆에서 그저 보기만 하는 친구등 나름대로 역할이 나누어져서 실습을 했습니다.
인체라는 것이 그림책에 있는 것처럼 혈관이나 신경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서 해부를 맡은 학생이 잘 해 주어야 그 실습조가 제대로 실습을 하여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습니다.
저는 주로 칼을 잡는 역할을 맡았었는데 아마 손도 크고 중고등학교 시절 조각이나 조소등에서도 살짝 드러나기는 했지만 나름 손재주가 있어서 그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 큰 딸이 조소를 주전공으로 한 것도 어쩌면 다 이유가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괴로운 것 중의 하나는 시험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입니다.
해부학이나 조직학 시험은 땡시험이라고 해서 매일 혹은 며칠에 한번씩 수시로 시험을 치게 되는데 10초 정도 현미경 슬라이드를 보고 무슨 조직인지 하는 것을 맞추는 것과 같은 식입니다.
의과대학 외 다른 대학들은 학기별로 시험을 치거나 작품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아는 데 의과대학은 거의 시험으로 시작해서 시험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패스를 하지 못하면 당연히 재시험을 쳐야 합니다.
의과대학 4년동안 재시험을 한번도 치지 않기는 상당히 쉽지 않은데 누군가 한 친구가 컨닝을 하는 바람에 저희 학년 전체가 재시험을 치룬 것을 빼고는 저는 재시험을 치룬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잘했다는 것은 아니고 난다긴다 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저는 중간 정도 밖에는 못했습니다.
재시험을 많이 친 친구중에 오히려 성적이 월등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외워야 할 것은 많아서 비중이 작은 과목은 재시험을 칠 생각하고 아예 중요과목만 집중하는 전략을 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의과대학은 비상한 머리는 필요없고 그저 성실하기만 하면 된다고 어느 글에선가 말씀드린 것도 이렇게 진득하니 외워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해부학의 경우 사람 두개골에만도 수십개의 구멍이 나 있는데 그 모든 구멍의 이름은 아니라도 거의 대부분의 구멍의 이름을 일일이 외워야 합니다.
그리고 300개도 넘는 뼈의 각 부위의 이름과 기능, 근육의 기시부와 종착부 등등 많은 것들을 외워야 합니다.
그래서 해부학을 배우는 1학년 때는 두개골이나 대퇴부등 뼈를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수시로 외우는 것이 흔한 풍경이었습니다.
물론 해부실습시의 뼈나 조직은 실습실 밖으로 반출이 되지 않는 것이라 동아리 별로 보유한 자체 두개골등으로 공부를 하거나 다른 동아리의 것을 빌려서 하고는 했습니다.
동아리에 드는 이유가 이런 공부를 위한 도구를 얻기 쉽다는 점, 선배로부터 노하우를 들을 수 있다는 점도 컸습니다.
저는 미술반 동아리에 들었지만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듣자니까 시신 한구를 사서 좋은 골격을 얻기 위해 동아리 선배들이 많이 노력을 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은 시신 모독죄라는 것이 있는데 합법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뼈 중에는 두개골이 가장 구하기 어려웠는데 저희들끼리 가위바위보로 술래를 정해 공동묘지에 가서 시신이라도 훔쳐다 삶아서 두개골을 얻자고 농담도 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ㅎㅎ
제가 있던 미술반은 그런 점에서 별로 좋은 동아리는 아니라서 충분한 뼈가 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외워야 할 것들이 적지 않지만 의과대학 시절의 공부는 그렇게 외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저처럼 기억력이 좋지 않으면 고생길이 훤합니다. ㅠㅠ
사람의 뇌의 용량이 무한정한 것이 아니고 한계가 있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돌에는 무언가를 새기기는 어렵지만 일단 새기면 잘 지워지지 않는다"는 제 개똥철학을 매일 되새기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몇번만 보고도 외워야 할 것들을 금방 외우는 친구들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이 많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의사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른 분야가 나았을 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에 하나도 의사가 되는 것에 있어서는 혹은 의과대학 공부를 하는 것에 있어서는 기억력이 아주 중요한 자질임에 반하여 저는 기억력보다는 솔직히 창의성(똘아이성. ㅋㅋ)이라는 점에서 더 장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TBCO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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