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신드롬으로 일컬어지는 해부학 실습의 고비를 넘기고 조직학이니 미생물학이니 하는 기초 의학 과목들을 이어서 배워 나갔습니다.
의과대학생의 생활이란 강의실, 병원 실습, 도서관, 집을 쳇바퀴 돌 듯 하는 삶이라 별로 언급할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더불어 의과대학의 모든 과목들이 이유와 근거를 바탕으로 한 과학이라기보다 그저 경험에서 얻어진 경험 학문들이라 수학적 논리에 좀더 친숙한 제게는 공부가 정말 쉽지가 않았습니다.
이유도 없어 숱한 내용들을 무작정 달달 외워야 한다는 것.
고등학교 시절 지리와 세계사를 아주 싫어한 제가 그보다 더 복잡하고 이해 불가능한 것들을 외워야 한다는 것은 정말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습니다.
왜 대장균은 타원형으로 생겼고 포도상구규균은 동그랗게 생겼는지, 연쇄상 구균은 왜 쇠사슬처럼 이어져 있는지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간의 눈이 두개인 이유나 조류처럼 양쪽으로 붙어 있지 않고 사자나 표범처럼 앞면에 주로 몰려 있는지 하는 것은 차라리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미생물학이 그나마 수학적인 논리성을 좋아하는 제게 가장 맞았던 듯 싶습니다.
가스를 형성하는 균들과 산소를 좋아하는 균(호산균), 산소를 싫어하는 균(혐기성 세균) 등등 여러 특징을 가지고 세균을 추리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논리적 판단을 필요로 했으니까요.
반면 조직학이나 병리학은 비슷비슷하게 생긴 뻘건 슬라이드에 구멍이 뽕뽕 난 것이 혈관인지 피부인지, 간조직인지 위장 조직인지, 혹은 정상 조직인지 암조직인지 알아 내기란 쉽지가 않았습니다.
비교적 관찰력이 뛰어나고 미술적 재능이 있어 보고 맞추는 것은 꽤 한다고 자부하던 저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슬라이드를 보고 합당한 조직을 맞추는 것은 저 뿐 아니라 많은 친구들이 반 이상 맞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답답함과 짜증은 내가 왜 의대를 왔나 하는 회의에 종종 빠지게 했습니다.
좋아하는 수학과나 갔으면 어땠을까 후회한 적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부학이나 조직학, 병리학의 비논리적 특징은 임상 과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 등등의 임상 과목을 3학년부터 배우는데 이건 뭐 그냥 끝도 없는 자갈 해변의 돌맹이마다 아무 이름이나 붙여 놓고 외우는 것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돌맹이마다 기능도 제 각각 달랐으며 아무 원칙도 없어 보였니다.
나중에 의학이란 것에 대하여 좀더 알게 되었을 때는 그런 무원칙하게 보이는 것들 사이의 균형과 합리성이 어렴풋이 보이기는 했지만....
여하튼 당시에는 그런 것을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이 돌맹이는 이렇게 놓고 쓸 수도 있고 저렇게 놓고 쓸 수도 있다 식으로 기술되어 있는 부분도 엄청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인체라는 것이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듯 반응도 다르기 때문이고 연구자마다 정반대의 결과를 내 놓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방송에 보면 무슨 논문에 이러이러한 내용이 있다고 하면 일반인들은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착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A가 옳고 B가 틀렸다고 주장하고 싶으면 그런 주장을 하는 논문을 찾아 언급하면 되는 것 뿐이고 반대로 B가 옳고 A가 틀렸다고 주장하고 싶으면 그런 주장을 하는 논문을 찾아 언급하면 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과학에서 SCI(science citation index. 과학 인용 색인, 전세계의 중요한 과학 저널에 해당 논문이 얼마나 많이 인용되었는지 하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논문의 가치를 평가하는 지표)가 중요한 것처럼 의학에서도 얼마나 많은 연구자가 그 결과에 동의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는가가 중요합니다.
폐경 호르몬 치료만 해도 유방암에 이득이라도 주장하는 논문과 해롭다고 주장하는 논문이 각각 넘쳐 납니다.
이런 것이 가장 심한 학문 중의 하나가 제가 택한 산과학입니다.
산과학 교과서인 윌리암스 산과학이라는 책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아마도 maybe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참고로 대학마다 교제로 삼는 책이 다르지만 저희는 모든 과목은 영어 원서를 가지고 공부를 했는데 요즘 보니 일부 대학은 한글 번역판을 가지고 공부하기도 하더군요.
maybe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임신과 분만에 대하여 알려진 것이 별로 없이 모르는 것 투성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동안 산과학이 제일 싫었습니다.
수학과 가장 동떨어진 학문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제가 산과를 전공하게 된 건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가끔 자연분만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제왕절개를 해야 하나요? 하고 묻는 산모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께 확실하게 "당신은 아기 크기가 얼마고 골반이 어떻고 아기 자세가 어떠니까 75%의 확률로 자연분만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산과학에서 자연분만 가능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나라 기상청이 어떤 특정한 날에 배가 내릴지 아닐지 맞출 확률보다 적으면 적었지 절대 더 높지는 않습니다.
25년간 산과 분야에만 있었던 제 경험이 이럴진데 다른 의사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분야는 경험이 짧을수록 확실하게 자연분만이나 수술을 장담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렇게 묻는 분들께 자연분만이 될지 잘 모르겠고 일단 시도해 봐야 알겠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산모의 골반뼈가 통뼈이기 때문에 혹은 아기가 위에 떠있기 때문에 제왕절개 수술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저는 모든 인간의 뼈는 가벼운 체중을 위해 뼈속이 텅빈 조류와 다르게 속이 꽉찬 통뼈라고 배웠는데 그게 왜 수술해야 하는 이유로 언급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태아들은 원래 양수 안에 떠 있다가 진통이 본격적으로 진행이 되고 하면서 골반내로 자연스럽게 내려오는 것이므로 본격적 진통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당연히 떠 있는 것인데 왜 그것이 수술의 이유가 되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수술을 해야 하는 복잡한 이유를 말로 설득하기 어려우니까 이해를 돕기 위해 그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혹시 그런 경우 결과는 정해 놓고 과정을 그리 유도하기 위해 그런 이해 불가능한 이유를 가져다 대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저 스스로에게 항상 질문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튼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그렇게 산부인과나 소아과, 그외의 여러 마이너 과목들을 실습하는 동안 가장 관심이 있었지만 가장 실망한 과목은 정신과였습니다.
전 정신과라고 하면 인간의 심리와 뇌의 기능을 세밀하게 연구하고 배울 것이 참 많고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정신과 병동 실습을 돌아 보고 진단과 치료 과정을 보고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신병의 진단이란 정해 놓은 몇가지 질환(정신분열증, 신경증, 강박증, 망상 등등) 에 환자가 보이는 증상을 비교하여 비슷하면 진단을 내리는 것이고 다른 특별한 검사도 별로 없습니다.
물론 뇌파 검사를 포함해 몇가지 검사가 있지만 단순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치료는 오직 안정제와 같은 약물 치료 뿐입니다.
물론 상담 치료도 있고 요즘은 거의 하지 않지만 전기 치료나 전두엽 절제술 같은 수술 치료도 있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 또는 과거에만 시행되었던 것들입니다.
모든 피부과 치료가 스테로이드 아니면 레이저 치료 뿐인 것과 비슷해 보였습니다.
물론 정신과를 전공하지 않은 제가 피상적으로 본 것이라 정확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마 실질적으로도 내용상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불어 어떤 정신과적 질환이 완치되었다는 이야기도 거의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관심이 있었던 정신과에 실망하고 의과대학생 동안 딱히 배우고 싶은 과목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저도 그렇지만 다른 친구들도 적성이나 소질보다는 장래의 경제적 댓가와 업무의 안정성을 기준으로 진료 과목을 정하게 되더군요.
그래 국내에서는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의 앞글자를 따서 피안성이라고 해서 그 3 과목이 가장 인기 있는 진료 과목입니다.
가장 인기 없는 과목은 흉부외과 일반외과 산부인과입니다. 아직 약자는 없지만 흉일산이라고 해야 할까요? ㅎㅎ
3학년과 4학년 통털어 가장 기억에 남는 과목은 의사학 과목입니다.
의사학은 의학의 역사와 의료 법규 그리고 의료 윤리등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과목이 달리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니고 4학년 한해 동안 아마 한번인가 두번 밖에 강의를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의사학 과목은 토요일 마지막 시간인가에 강의가 있었는데 4학년 때 토요일마다 강의실 바로 앞 라커룸에서는 저와 동기들이 모여 카드 노름판을 벌이고는 했습니다.
포커 게임이나 블랙잭이라는 게임을 주로 했는데 대략 10여명 정도가 고정 멤버로 게임을 하고는 했습니다.
제가 어쩌다 그런 놀음판에 끼어들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 잡기를 좋아하는 제가 단조롭기도 하고 학점도 작은 의사학 과목에 실증을 느껴서 그랬던 듯 싶습니다.
덕분에 의사학 과목은 간신히 시험만 칠정도로 공부를 해서 지금도 그 분야의 지식이 전무하며 부모님께 참고서 산다고 하고 돈을 타서는 그 돈으로 카드 놀음을 했습니다.
중고등학교와 재수 시절에도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그런 거짓말을 그 때 했습니다.
의사학 과목이 있던 반학기 동안 얼추 수십만원이나 일이백 만원 쯤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돈 외에도 잃은 것이 많지만 얻은 것도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인간 세상의 치열함, 잔인함, 비굴함, 속임수 등 인간 세상의 지옥스러움을 놀음판에서 배웠습니다.
남이 피우다 끈 담배 꽁초를 주워서 피운 적도 있을 정도로 처참한 생활이기도 했습니다.
담배를 살 돈이 없어서라기보다 밤새 놀음을 벌인 날에는 새벽녁이면 담배가 떨어져서 골초들은 그렇게라도 해서 담배를 피웠고 저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 시절을 다시 되새겨 보니 어쩌면 그때도 지금처럼 심적 육체적으로 많이 고달펐던 듯 싶습니다.
4학년 말 12월 의사 국가 고시를 치면서 방학을 했고 의과대학 생활과 함께 학창 시절은 끝이 났습니다.
다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재미있다는 학창 시절을 그렇게 쓸쓸하게 재미없게 마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을 떠올릴 때면 초라하던 라커룸 밖에는 추억할 거리도 별로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합니다.
이상으로 제 학창시절의 고백록을 끝으로 제 고백록도 마감을 합니다.
그동안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번외편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아마 없을 듯 합니다.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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