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1일 토요일. 32주라서 출산 예정일도 얼마 안 남으신 산모 분이었는데 저희 병원에서 멀지 않은 인정 병원에 다니시다가 병원을 옮겨 오신다고 해서 다소 의외였던 산모였습니다. 왜냐하면 인정 병원은 제가 20여년전 개업 초기에 그 근처인 응암 오거리에 개업한 적도 있고 또 인정 병원의 원장님도 잘 아는 편인데 이쪽 은평구 서대문구 지역 내에서는 규모도 크고 나름 분만 건수도 많아서 다니시는 산모분들이 많은 병원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규모도 작고 댁에서 거리도 먼 저희 병원으로 오시나 싶어서 말이죠. 그래서 옮겨 오시는 분들께 항용 하는 말이지만 "병원마다 큰 차이도 없고 저희 병원이 별 다른 장점도 없는데 왜 옮겨 오시려고 하느냐?" "산전 관리하던 병원에서 출산까지 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다"하는 등의 다소 서운한 말씀을 드렸을 것입니다. 그것은 분만도 많지 않은 저희로서는 한분의 산모라도 와 주시는 것, 더군다나 일부러까지 찾아서 오시는 것이 반갑고 감사한 일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정말 감사하고 어떤 점에서는 많이 바라는 일이지만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작은 병원에 오셔서 기대와 다르게 실망하시게 될까 하는 염려와 와주신 것에 대한 제 나름의 감사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그런 식의 표현은 "아 이 의사는 상술에 물든 나쁜 의사가 아니라 정말 양심적인 의사인가 보다"라는 진정성이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무뚝뚝하게 뭐 이런 의사가 다 있나" 하는 오해를 사기 십상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항의를 들은 적도 있구요. 그럼에도 지금도 옮겨 오시겠다는 분들, 특히 임신 후기에 옮겨 오시겠다는 분들에게 불쑥 그런 표현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 습관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고쳐지지는 않나 봅니다.
여하튼 그런 고비를 넘기고 옮겨 오시게 된 분인데 알고보니 요즘 유행한다는 자연주의 출산 때문이시라고 하더군요. 사실 자연주의 출산이라는 것이 삭모와 관장, 회음 절개를 자제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것이야 산모와 아기가 특별히 문제가 없으면 어디서 낳든 담당 의사에게 당연히 요구하여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항상 그것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고 장점만 있는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많은 병원이 권위 의식 같은 것 때문에 산모들의 입장에서 편하기만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점을 의사의 입장에서 변명하자면 산부인과 의사는 산모들이 알지 못하는 숱한 위험한 상황들에 대하여 지식과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기 때문에 의사의 입장에서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고 편안함보다는 안전을 우선적으로 걱정하고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옮겨 오신 김O홍 산모께서는 중간에 내진시 자궁 경부 폴립(용종)으로 질출혈이 꽤 있었던 점과 초음파 검사에서 태아가 한쪽 콩팥에 경미한 수신증이 있었던 것 말고는 별 달리 고민할 거리가 없이 아기도 잘 커주고 산모도 순산체조를 열심히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정일이 거의 다되어 3일 남겨둔 금요일 저녁 7시 무렵에 양수가 파수되서 오셔서 조금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정일도 거의 다 되었고 마지막으로 37주 무렵에 본 초음파 검사상 태아 크기도 2.8kg으로 적정 수준이어서 양수 파수된 채 오래 끌지만 않으면 별 문제는 없는 경우였지만 양수가 파수되면 2가지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양수가 파수되면 질에 있는 세균이 양수 내로 침투하여 시간이 많이 경과하면 할수록 태아 감염의 위험이 높아집니다. 둘째로 양수가 많이 빠져 나가게 되면 양수가 가진 완충 작용이 그만큼 줄어 들게 되서 진통 중 탯줄 압박이 올 수 있고 결과적으로 태아에게로 가는 혈액 공급이 원할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양수 파수가 된 후 2일 이내에는 출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행히 입원 당시 진통은 별로 없었지만 내진 상 자궁 경부는 출산을 위해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고 자궁 문도 3cm 가량 벌어져 있어서 조만간 본격적 진통이 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주의 출산을 원하시는 분이니 가능하면 촉진제 사용도 자제해야 해서 자연적 진통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녁 8시 쯤 되자 가벼운 수축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태아 모니터 검사에서도 자궁 수축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태아의 심음은 정상 수준이었습니다. 산모께서야 상당히 힘들었겠지만 제가 보기에 분만 진행은 정상적으로 순조로이 되어 밤 12시 쯤에는 자궁문이 거의 다 벌어진 상태로 곧 출산이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좀 커서인지 자궁문이 다 벌어지고 나서도 아기의 머리가 골반내로 잘 진입이 되지 않고 다소 진행이 정체 되었습니다. 산모가 순산 체조도 열심히 하시고 호흡법도 익혀 놓았다고 해서 그나마 안심하고 있었는데 막상 본격적 통증의 단계에서는 그것이 생각만큼 잘 안되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산모가 골반이 좁지 않고 순산 체조의 도움을 받았는지 몇백번 (후기를 보니 산모는 몇번으로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지나서 다 잊어서 그렇지 사실 초산에서는 수백번 정도의 힘주기 과정을 거쳐야 출산이 됩니다.)의 힘주기로 비교적 수월하게 분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전 1시 26분. 건강한 남아 3.66kg의 우렁찬 아기 울음 소리가 분만실을 가득 채웠습니다. 촉진제 사용도, 흡입기 사용도 하지 않은 순산이었습니다.
엊그제 같은데 출산하신지가 벌써 석달이나 지났네요. 입원하고 계신 동안 편안히 계시다 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아기를 무척 반기는 산모의 모습과 다르게 아기 아빠는 다소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이었습니다. 입원실로 회진을 갔을 때 다른 아빠들처럼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도 별로 보지를 못했구요. 그래서 제가 "아빠는 아기가 그리 귀엽지 않으신가 봅니다"하고 농담도 했는데 알고 보니 저처럼 남 앞에서 표현을 잘 안해서 그렇지 정도 많고 수다도 많으신 분이라고 하더군요. 남한테 알콩달콩 애교를 떨지 못하고 무뚝뚝하게 보여 점수를 깍아 먹으면서 사는 사람의 답답한 심정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런 되도 않는 농담을 한 것은 사실 제 딴에는 어렵기만 한 아기 아빠들에게 그렇게라도 말도 붙여 보려고 노력한 때문입니다. 제가 산부인과 의사를 직업으로 택한 이유 중 하나는 남자 환자를 보는 데 자신이 없어서 대하기 편한 여자만 보고 싶어서인 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름 경험이 많이 쌓였다고 생각하는 지금도 산모의 보호자인 남편들과 상대하는 것은 어색하고 편치가 않습니다. 그런 점이 있어서 일부러 아기가 귀엽지 않은가 보다 하고 말도 붙여 본 것인데 그것 때문에 혹시 남편 분께서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양수 조기 파수 등 고위험 요인도 없이 오자마자 빠르게 진행이 되고 힘도 잘 주어서 입원비 받기가 미안할 정도로 쉽게 출산하시는 분도 간혹 있는데 그런 경우처럼 순풍 낳아준 산모는 아니었지만 촉진제를 써야 하나, 흡입기를 써야 하나, 혹은 제왕절개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과 갈등을 그리 많이 하지 않고 잘 낳아준 산모여서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하나 해명을 하자면 "힘주기를 잘 하지 못하면 제왕절개 수술을 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한 말은 완전히 거짓말인 것은 아니지만 진통 막판에 탈진이 되다시피 해서 힘주기를 잘 못 하시는 산모들께 제가 자연 분만을 이끌어 내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종종 써먹는 말입니다. 이 글을 쓰는 오늘 현재까진 제왕절개 수술을 한 산모가 없어 아직까지는 "무수술 분만"을 달성하고픈 저의 바람이 깨지지는 않았으니 "힘을 못 주면 수술할 겁니다" 하는 말은 정말 수술 가능성이 높아서 드린 말씀은 아니었다는 것을 아시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만 저의 이런 고백 때문에 힘주기를 잘 못하시는 산모들께 써먹는 그 말이 앞으로는 더 이상 약발을 발휘하지 못할까 하는 것이 걱정입니다. ㅎㅎ
여하튼 고생하셨고 아기 건강하고 튼튼하게 잘 키우시고 내내 행복한 가정 이루셨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출산의 현장에 함께 하면서 값진 기쁨을 공유할 기회를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P.S 수첩 게시판이나 출산후기 게시판의 제목에는 보통 산모와 아기 아빠의 이름을 가운데 자만 가리고 함께 씁니다. 아기는 혼자서 임신한 것도, 혼자서 낳는 것도, 그리고 혼자서 키우는 것도 아니고 함께 키워 나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산모의 이름을 앞에, 아기 아빠의 이름을 뒤에 이어서 써 두는데 진료 챠트에 아기 아빠의 이름을 남겨두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산모분의 이름만 기록해 두었습니다.-->(나중에 출생 증명서에 있는 이름을 보고 추가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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