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20년이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죠?"
얼마전 종영한 tvN 드라마 "시그널"에서 나온 대사입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으로 과거에 존재했던 이재한 형사가 현재의 형사인 박해영 형사에게 무전기로 말하는 내용입니다.
드라마는 무전기를 통해 과거의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는 허황한  전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과거를 바꿈으로써 현재를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의 많은 답답한 사람들이 대리만족을 느꼈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의 질문에 대하여도 현실에서의 저는 드라마의 박해영 형사와는 다르게 대답해야겠습니다.
"20년이 지나도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아니 더 나빠졌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분야는 꼭 대기 오염이나 지구 온난화 같은 것들만은 아닙니다.
저도 20년전에 비하여 건강도 더 나빠지고 가정 경제도 더 나빠져서 빚이 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자연히 나빠지는 것들이야 어쩔 수 없다치고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의료 환경이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환자가 되어 병원에 가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여전히 싫은 일이고 불편하고 겁나는 일입니다.
아파서 가기 때문에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의사인 저도 건강이 썩 좋지 못하기 때문에 일년에 한두번은 환자의 입장이 되어 병원에 가야 하는데 그때마다 흡족했던 적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의사의 입장에서 봤을때는 좋아졌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20년 전에 비하여 현재의 의료 환경이 원칙에 따르는 진료나 소신 진료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결코 아닙니다.
번듯한 건물을 가진 모든 병원들이 원칙적이지 못하고 비양심적으로 해서 그렇게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의학 교과서적인 원칙과 법적 기준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운영을 했다면 건물은 고사하고 망하지 않고 있으면 다행입니다.
30년간의 의사 생활로 제가 얻은 결론은 그랬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드라마에서는 과거의 변화를 통해 현재를 바꾼다는 불가능한 꿈을 그렸지만 현재를 바꾸어서 미래의 변화를 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의료 분야에서도 그것은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한 꿈입니다.
저는 가끔 직원들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것 말고는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 그저  많이 어렵거나 또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이죠.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많을 것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제가 죽기 전에 모든 빚을 청산하고 가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가능은 합니다.
다만 번개 두번 맞을 확률과 같다는 로또 1등에나 당첨되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처럼 상당히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지는 모르지만 세상 많은 일들이 가능합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과거를 바꾸지 못해 현재가 이렇게 되었다면 미래를 바꾸기 위해 지금 당장 기울여야 하는 노력의 양은 엄청 나게 커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움직이는 돌을 조금 더 빨리 움직이게 하는 것에는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돌을 움직이게 하는 데에는, 혹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데에는 아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엄청난 노력을 통한 미래의 변화.
그것을 얻기 위한 방법은 아래 두가지 중 하나 밖에 없습니다.
소수가 엄청나게 큰 노력을 기울이거나 아니면 엄청나게 많은 다수가 조금씩 더 노력을 기울이거나.

우리는 현재 어떤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요?
미래로부터 무전이라도 와서 현재 가야할 길을 알려 주기라도 한다면  똑바른 길을 찾기가 조금 쉬울까요?
물론 과거로부터 오는 무전이 없듯이 미래로부터 오는 무전도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경험과 학습이라는 이름의 무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랜 과거부터 바로 이 순간 이전까지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남겨 놓은 족적들로부터 오는 무전.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세돌이라는 인간의 20여년의 경험과 학습보다 알파고가 더 오랜 경험을 축적하고 더 많은 학습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귀를 열어 듣지 않기 때문에, 눈을 떠서 보지 않기 때문에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눈은 뜨지 않은 채 보이기를 바라고 귀를 열지 않은 채 들리기를 바란다면 아무 것도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전에 모 임신 출산 관련 카페를 잠깐 훑어 볼일이 있었습니다.
이 병원은 어떻고 저 의사가 어떠하며 그 직원은 어떠했다 하는 많은 글들을 보았습니다.
눈을 감은 채 주변이 너무 어둡다고 말하는 많은 분들이 거기 있더군요.
육체의 눈을 뜬다고 저절로 모든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려면 의지를 가지고 바른 눈을 떠야 합니다.
육체의 귀를 열었다고 저절로 모든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들어야 할 것을 제대로 들으려면 의지를 가지고 바른 귀를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를 바꾸어서 현재를 바꾼다는 드라마의 허황함에 담긴 진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은 어제의 미래이고 내일의 과거다. 지나고 나면 바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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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원 [2016-04-02 11:19]  시온맘 [2016-04-01 22:30]  
#2 시온맘 등록시간 2016-04-01 22:31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원장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래도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고 살렵니다~ 저 또한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겠지요 ^.^ 제가 속한 곳에서..

댓글

결과에 관계없이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가 평가해 주면 좋겠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더군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해 보시길 응원해 드립니다.  등록시간 2016-04-02 16:43
#3 이연경 등록시간 2016-04-02 00:41 |이 글쓴이 글만 보기
눈을감은채 어둡다고 말하는... ㅎㅎ
어떨땐 그런경우가 너무많아서 눈을뜬다는 그자체가 너무 어려운거아닌가 싶기도해요

꼭 그런글엔 그냥 아무기준없이 우쭈쭈하시는분들도
싫어요
그냥 무조건적인 동의와 공감...
공감없는 공감. 영혼없는 동의와 공감....

댓글

귀를 막은채 아무 것도 안 들린다고 하는 사람도 많더군요. ㅎㅎ 우쭈쭈는 엄마가 아기에게 할 때 말고는 전혀 필요 없는 것인데...ㅎㅎ  등록시간 2016-04-02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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