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한달에 한번 진료를 쉬는 날이면 동업 원장에게 병원을 맡기고 아내와 아내의 친구 여약사와 함께 셋이서 병원에서 가까운  북한산에 가곤 했습니다.  북한산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라 짧은 코스는 한두시간, 긴 코스도 서너시간이면 갔다 올 수 있었습니다. 어느날 비봉인가 향로봉인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상에 올라 땀을 식히면서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북한산이 안나푸르나처럼 대단한 산도 아니고 그저 동네 뒷산보다 조금 높은 산일 뿐이지만 이렇게 한달에 한번이라도  산을 올라가 볼 수 있다는 것이 나중에 언젠가는 많이 그리운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죠. 그렇게 산에 다닐 수 있으려면 시간적으로, 육체적으로 여건이 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정신적인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이제는 그런 여유는 다시 가지기 어려울 듯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북한산 등산만 그리운 추억은 아닙니다.
공중 보건 전문의로 지방 산부인과 의료원에 근무하던 때 병원 안에 있던 관사에 살면서 관사에 함께 살던 다른 진료과 과장들과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어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것도 다시 겪어 볼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 했던 이야기들이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대단히 재미있거나 값진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그날 하루 진료하면서 있었던 가벼운 에피소드들이었을 겁니다.

이제는 다 커서 각자 제 삶을 살아가는 세아이들이 제 무릎 아래 있던 나이일 때 제가 아이를 앞에 안고 4개의 손이 함께 종이 찰흙으로 무언가 주물떡 거리던 기억도 다행히 살아 남았습니다. 무엇을 만들었는지도 역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저 그런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몇번 있었다는 것 정도만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저나 아이들이나 그런 날이 있었는지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저와는 할 이야기도 없고 함께 있으면 어색하기만 해서 오히려 함께 있는 게 불편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오래전 옛날이 생각이 납니다.  

레지던트 2년차 시절 한라 의료원에 파견 나가서 매일 저녁마다 밥통째 들고 나가서 근처 해수욕장에 가서 아내와 함께 볶음밥 해서 먹던 기억도 납니다. 당시에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매일 저녁을 보내는 방식이었지만 지금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원장님 볶음밥 볶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고 직원들이 간혹 말하던데, 이는 30년도 넘는 오랜 기간의 볶음밥 볶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ㅎㅎ

당시에는 정말 별것 아닌 것들도 지나고 보면 소중한 추억들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멋지고 화려한 기억들이 멋진 추억으로 남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올팍에 가면 가끔 웨딩 촬영하는 커플들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그날도 기억에는 남겠지만 나중에 다 잊혀지고 하나의 기억만 남겨두어야 한다면 웨딩 촬영한 날보다는 남편이 된 남자 친구가 오늘 저녁 먹었어요? 하고 처음 묻던 날이나, 아니면 어느 햇살 좋은 가을날 말없이 함께 길을 걷다가 우연히 슬쩍 손이 스쳤던 날의 기억을 남겨 두고 싶을지 모릅니다.
아이 키우면서 혹은 임신 중에 겪었던 이런 저런 불편함도 지나고 보면 그 순간 순간이 다시 오지 않는 소중한 순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비록 당장은 괴롭기만 할지도 모르고 행복은 고사하고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것들일지 모르지만 행복한 추억은 그저 좋기만 하고 기쁜 순간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정도 나이가 되니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오늘은 내일이 되면 과거가 됩니다. 그리고 그 과거는 기억 속에서만 남아 있습니다. 메마른 낙엽같은 날처럼 남는 과거도 있을 것이고 촉촉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면서 남는 과거도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과거는 잊혀집니다. 나이가 들수록 추억으로 가는 것들이 질은 메말라지고 양은 많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추억 속에 영원히 남아 나중에 두고 두고 꺼내 쓸 수 있도록 젊은 시절에, 아이들이 커갈 때 밀도 깊은 기억을 많이 남기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이 많을수록 풍성한 삶을 살았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저는 돈이 없어서 가난합니다. 그러나 로또 1등에 당첨된다거나 모르던 부자 할아버지가 갑자기 유산을 남겨 준다거나 할 수도 있는 일이니 경제적 가난은 회복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0.00001227738 %쯤이라 아주 작지만 0은 아닙니다. ㅎㅎ. 그러나 추억의 창고가 빈 것은 어떤 것으로도 채울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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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님께서는 산모들에게 평생 잊지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세요. 자부심을 지니셔야합니다. 저희 부부에게는 준이가 태어났을때 함께 계셨던 원장님과 간호사님들은 평생 잊을수 없는 추억입니다 :)!  등록시간 2016-11-3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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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podragon 등록시간 2016-12-01 17:59 |이 글쓴이 글만 보기
글이 너무 좋아서 남편에게도 보내줬어요..! 내용도 마음에 와 닿지만 심장님 문체도 넘 좋아요. 책에도 이 톤이 많이 나오면 대박일텐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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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게 보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지난 것 중에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있어서 적어 본 것인데..여하튼 좋은 추억 많이 쌓아 나가시길 바랍니다. 돈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  등록시간 2016-12-01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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