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산할 수 있을까요?”  "언제쯤 아기가 나올까요?" 라는 말만큼은 아니지만  살면서 내가 들었던 질문 중에 꽤 많이 들은 말이  "왜 하필 산부인과 의사가 되었어요?" 하는 말이다.  아마 여자 의사에게는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을텐데 내가 남자 의사이다 보니 여자만 다루는 산부인과를 하는 게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내가 산부인과를 택한 30년전쯤에는 산부인과 의사 중에 여의사는 손꼽을 정도였는데도 1년에 200명 가까이 배출되는 산부인과 의사 중에 남자 산부인과 의사는 불과 10명도 안되는 지금은 아마  남자 산부인과 의사들은 그런 질문을 더 많이 들을지도 모르겠다.   
내과 의사에게 "왜 하필 내과 의사가 되었어요?" 하고 묻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 질문 보다는 왜 의사가 되었는지 하는 질문이 대부분이 아닐까 싶다.  
산부인과 의사로 오래 살다보니 지금은  주변에서도 더 이상 그런 질문은 하지 않는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더 이상 내게 그런 궁금증을 가질만한 사람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에 산부인과 과목을 전문 분야로 택하려 한다고 말했을 때 부모님과  1달후면 아내가 될 여자  그리고 특히 장래의 장모님께서 왜 그런 과 (ㅠㅠ)를  택하려 하느냐고, 그리고 다른 과를 하면 안되냐고 했던 기억이 난다.

왜 의사가 되었어요? 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산부인과를 택한 것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의사라는 직업이 어쩌다보니 되었다기 보다는 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야트막한 동네 뒷산을 오르는 사람에게보다는 험준한 안나푸르나를 오르려는 사람에게 산을 오르는 이유를 묻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산부인과 의사는 되기가 힘들어서라기 보다는 남자 사람이 여자 사람만 진료하는 산부인과를 택한 것에 따르는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글을 재미있게 만들려면 그 답은 감동적인 것이면 좋겠고, 연말에 연기 대상 수상자 발표시 뜸을 들이는 것처럼 맨 뒤에 천천히 밝혀야 하겠지만 글을 재미없게 써야 하니 위 질문의 답부터 말해야겠다. 감동과도 거리가 멀다.
이유는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서"다.
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고 여러가지 복합적 이유가 있지만 선택 당시 제일 큰 이유는 그것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참 어처구니 없는 이유였지만 세상사 많은 일들이 처음부터 거대한 어떤 이유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아주 사소한 어떤 결정에 의해 그 뒤의 인생 행로가 크게 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살짝 관심이 갔던 어떤 여자 동료에게 "밥 먹었어요?"라고 물어본 한마디가 평생을 함께 하는 반려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거나. 물론 내가 그랬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산부인과를 택할 당시 모교 대학병원의 산부인과 모집 정원은 10명이었고 그 중 2명은 군보로 충원을 하였고 8명은 군대를 마친 비군보로 충원을 하였다. 군보라는 것은 의과대학 졸업생 중 아직 군대를 아직 마치지 않은 지원자를 말한다. 따라서 수련을 마치고 나서 군대를 가거나 군대 대신 3년간의 대체 복무를 해야 한다.  산부인과는 군대에서 수요가 많지 않은 진료 과목이기 때문에 당시 한해 배출 산부인과 전문의 270명중 (당시는 지금보다 산부인과 배출 인원이 많았다.) 군대에 가는 산부인과 의사는 6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산부인과 의사가 없는 지방 의료원이나 지방의 보건소, 보건지소 등에 3년간 의무 배치되었다.
그래서 나는 12주간의 군사 훈련만 받았고 군대에는 가지 않았다. 대신 그 기간 동안 지방 의료원에서  산부인과 과장으로 의무 복무를 했으니 처음에 목적한 바를 이룬 셈이다.
산부인과 외에 내과나 소아과 혹은 다른 진료 과목도 군보 배당 인원이 있었다. 소아과는 내가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아서 아니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부터 배제하였다. 내과나 안과 같은 진료과목은 성적이 모자라서 지원할 수 없었고 성형외과는 경쟁도 셌지만 체질에도 맞지 않았다.  친구들이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  인상도 그렇고 흉부외과나 신경외과가 더 어울렸을 것 같다고 말하지만  꽃미남 같고 샌님 같은 사람들만 산부인과 의사를 하는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보다 더 인상이 비호감인 선배나 후배 산부인과 의사도 많다.

남들 다 가는 (아니 금수저들이나 권력있는 부모를 둔 자식들은 안가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군대를 왜 그리 안 가고 싶었을까?
내가 조직 생활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직 중에 가장 엄격하고 갑갑한 조직이 군대인 건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다. 나는 독불장군 스타일로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머리를 숙이고 하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군대 생활을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전문의 자격을 따고 군대에 가면 대위로 임관이 된다. 군의관은 장교이니 사병처럼 힘든 군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편한 군의관이라도 대대장도 있고 연대장도 있고 여하튼 상사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군대의 그 딱딱한 조직과 문화가 내게는 너무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닥치면 다 해내지 않았을까 싶어 굳이 그런 이유로 산부인과를 택할 필요는 없지 않았겠나 하는 후회가 때때로 들기도 한다.
군대를 피하고 싶은 마음 다음으로는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지금은 산부인과가 의과대학생들에게 최악의 기피 대상 과목이 되었지만 당시는 그렇지가 않았다. 일은 힘들지만 돈은 제법 많이 벌 수 있는 과목으로 알려져 있었다. 제일병원도 그렇고 차병원이나 을지병원, 길병원 등 지금의 대형 병원들의 상당수는 산부인과 의원으로 시작했다.   
지금처럼 출산률이 대폭 떨어질 줄 알았다면 어쩌면 산부인과를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산부인과 의사를 택한 30년 전에 지금과 같은 저출산 현상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2세는 끝없이 낳아야 할 것이고 출산을 돕는 산부인과 의사의 역할은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 역할이 있으니 밥벌어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 안해도 된다는 생각. 그런 내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리고 그 착각의 댓가는  적자 경영에 허덕이면서 은행빚과 싸우는 것으로  치루고 있다.

앞으로 언제까지 지금과 같은 출산 방식이 유지될지는 모르지만 상당 기간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역할을 지금처럼 남자 산부인과 의사만이 독점할 것 같지는 않다. 요즘 많은 직업군에서 잠재적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는 인공 지능 로봇이 대신할 것 같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공 지능 로봇은 정형화된 업무, 비록 복잡하더라도 데이터만 있다면 예측이  가능한 분야에부터 대체해 나갈  것이다. 출산은 데이터로 예상하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다. 출산하는 순간이 언제가 될지 조차 예측이 힘든데 무얼 더 예측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분야에서는 인공 지능 로봇도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바둑과 같은 분야에서도 인공 지능이 인간 프로 기사를 이기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미래에는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듯 싶기는 하지만.
고위험 요인이 있는 임신부는 점점 늘면서 한편으로 대형 전문 병원으로의 쏠림 현상이 심해지고 다른 한편으로 고위험 요인이 없는 임산부의 출산은 남자 의사보다는 출산을 해 본 적이 있는 여자 의사 혹은 의사보다는 비전문 인력이기는 하지만 조산사들 (병원에 근무하는 조산사나 조산원에 근무하는 조산사나 관계없이)이 대치하게 되지 않을까 예상한다. 만일 조산사들이나 산파가 출산 보조 업무를 대치하게 되는  상황이 된다면  의학 발전의 역사에서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동안 의학 발전의 역사는 주술사에서 내과 의사로, 이발사에서 외과 의사로, 산파 혹은 조산사에서 산부인과 의사로의 발전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의학의 발전 역사라는 것은 비전문가에서 전문가로, 비과학에서 과학으로 바뀌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최초로 과거로의 회귀가 일어나는 의료 분야가 되는 것이니까.
여하튼 출산률 감소, 남자 산부인과 의사 기피 현상, 대형 병원 선호 현상이라는 세가지는 남자 산부인과 의사 중심의 동네 의원에게는 사마귀 앞의 마차보다도 심각한 문제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지속되거나 더 심화될 것 같다는 것이 우울한 내 예상이다. 양심적인 사마귀라면 거대한 마차에 깔려도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 보지 못했다. 그래서 "왜 하필 산부인과 의사가 되었을까?" 하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호기심 어린 질문이겠지만 내게는 회한의 독백이 될런지도......

댓글

산부인과 의사가 되어 주셔서 정말 다행이고 감사해요.. 물론 흉부외과나 다른 분야도 멋지셨겠지만 양심진료 하시니 어차피 적자는 비슷하셨을지도? ㅎㅎㅎ  등록시간 2017-01-2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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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zoomooni 등록시간 2017-01-25 22:31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재미있게 읽었어요 ㅎㅎ 역시 제목이 주는 반전이란~^^ 군대에 안갈수만 있다면 ㅋㅋ 아들이 공부를 꽤 잘해준다면 ㅋㅋ 저도 꼭 양심있는 멋진 산부인과 의사를 시켜보고 싶네요♡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지만 점점 정부에서 개입하는 부분이 늘어날테니 ㅋㅋ (쌩뚱맞게 통일이라도 되면 ㅋ 더더~ 수요는 있지 않을까염;;;) 2017년 지금과는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용^^

저도 초산에는 여자의사를 찾아가긴 했는데 ㅋㅋ 그분이 출산하러 가시면서  뵐수가 없어져서 ㅋㅋ 생각을 오히려 바꿨네염;;; 허허헛^^

일단 책이 대박나시길 바라며...화이팅입니다♡
#3 무지개 등록시간 2017-02-03 20:38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저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런 인생의 반전이 있었군요.  그런이유로 선택하셨을줄이야ㅎㅎㅎ 근데 상상을 해보면 흉부외과나 신경외과, 일반외과는 선생님을 단기간 뵙긴했지만 잘 상상이 안되고, 굳이 다른과를 상상해본다면 아이는 안좋아한다고 하셨지만 소아과는 어땠을까 생각해봤어요ㅎㅎ
#4 jsh44449 등록시간 2017-08-24 14:33 |이 글쓴이 글만 보기
여태까지 진료받으면서 의사쌤들은 어떻게 왜 그 진료과목을 고르게되었을까 궁금했었는데, 심원장님은 이렇게 산부인과전문의가 되셨군요ㅎㅎ성적때문에..군대때문에.. 밥 굶지않을것같았다는 생각도...하지만 나중엔 출산률의 반전....재밌지만 끝엔 좀 슬퍼요 ㅠㅠ 글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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